24. 뭘 드시겠습니까?
송원교가 흠칫거리고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남궁천을 가까이에서 보니 지난번에 당했던 기억이 절로 떠오른 탓이다.
다른 생도들은 남궁천의 건방진 말투에 도끼눈을 뜨고는 노려보았다.
그제야 귀소이들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슬며시 나서려는데 귀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귀소이들이 돌아보니 귀왕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지켜보자는 뜻.
마침 조강민이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짓더니 송원교 옆으로 다가와서 손을 휙 저었다.
퍼억!
“크윽!”
손등에 얻어맞은 송원교가 코피를 뿌리며 주춤 물러났다.
“아, 미안해요. 송 형. 무심코 손을 저었는데 거기 멍청하게 서 있을 줄은 몰랐네요.”
“괘, 괜찮소.”
송원교가 붉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하지만 조강민이 더 싸늘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
“아니, 뭐 한심하게 잔뜩 쫄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 그렇지 않소.”
“그렇죠? 천하의 정주문 소문주가 용천관 공식 호구님 앞에서 병신처럼 쫄 리가 없잖아요?”
“물, 물론이오.”
코를 움켜쥐고 대답하는 송원교의 모습이 처량하다 못해 가련할 지경.
지켜보던 남궁천이 불쑥 말했다.
“놀고들 자빠졌네.”
조강민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다시 뵙는군요, 남궁 형.”
“그래, 동생. 밥 처먹으러 왔는가?”
“아뇨. 사실 오늘은 남궁 형께 볼일이 있어서요.”
“그렇군. 그런데 어째 동생은 항상 밥 먹을 때마다 나타나는군. 강호인이 개만도 못하다는 걸 몸소 증명하느라 여러모로 고생이 많다.”
“역시 남궁 형은 절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그 이해되지 않는 말은 언제 들어도 재미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데 재미를 느낀다는 건, 내 언변이 그만큼 뛰어나단 뜻이겠지?”
“하하하!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아니면…….”
“아니면?”
“단지 미친 새끼거나?”
“과연. 나와 달리 넌 이해가 잘 되도록 잘도 씨불이는구나. 그래서 싸가지도 없고 재미도 없고. 뭐, 그렇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직설적이긴 하죠.”
“그래서 우리 개만도 못한 동생은 날 왜 찾아왔을까?”
“곧 무한연합용봉회가 치러진다는 건 아시지요?”
“알지.”
“지금부터 무연회 이틀 전까지는 무한의 모든 학관이 자유견식기간입니다.”
“자유간식기간? 뭐, 자유롭게 간식을 먹어도 되는 그런 건가?”
“자유견식…… 입니다.”
“아, 자유견식. 그래서?”
“알다시피 이 기간 동안은 어떤 조건으로 비무를 벌이든 학관에서 관여하지 않습니다.”
“어떤 조건이든?”
“그렇지요.”
“그래서 나 하나를 다굴하겠다고 너희들이 떼로 몰려온 거야?”
“물론 우리가 전부 남궁 형을 줘 패려는 건 아닙니다. 남궁 형은 우리 넷만 상대하면 됩니다.”
조강민이 곽철주와 백리향, 그리고 송원교를 가리켰다.
“다른 생도들은 그저 참관자일 뿐입니다. 아무래도 남궁 형과 이곳 주인장이 각별한 사이 같아서 말이죠.”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한마디로 이 네 사람을 제외한 생도들은 귀왕채 무인들을 억류하기 위해 온 것이란 뜻.
자유견식기간이라.
‘참 좆같네.’
이래서 백도라는 놈들이 더 나쁘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온갖 정의롭고 명예로운 척은 다 하면서 학관에 이런 괴상한 제도를 만들어?
이런 식으로 한 명을 몰매질하는 게 가능하도록?
남궁천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조강민이 말을 이었다.
“좀 억울하실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생도들의 기량을 파악하는 제도지요. 훌륭한 인덕과 재능을 겸비한 후기지수라면 결코 여러 사람에게 몰매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한마디로 자정 기능이 있다는 거네? 어차피 맞을 놈이 맞을 거라는?”
“이야, 이해력이 빠르시군요. 역시 남궁 형입니다.”
백도란 놈들이 더 나쁘다는 말은 취소.
다시 생각하니 조강민의 말대로 자유견식기간이라는 것, 아주 좋은 제도이지 않은가?
자정 기능이라.
하긴. 그런 게 없었다면 이놈들을 어떤 식으로 조져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을 텐데.
그렇다면 그 자유견식기간이라는 걸 제대로 이용해 줘야지.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
“그거 아주 좋은 제도네.”
“역시 남궁 형이라면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그럼 나가실까요? 아무래도 여기선 좀 그렇죠?”
“그래, 여긴 좀 그렇지. 남의 영업장 방해하면 안 되잖아?”
뭐, 내 영업장이기도 하고.
남궁천이 기꺼이 일어나자, 조강민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혹여 이대로 달아나실 생각이시면 그만두는 게…….”
“거, 종알종알 시끄럽다, 동생. 싸우자며? 따라와.”
남궁천의 박력에 몇몇 생도들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고, 어떤 생도는 휘파람을 불며 비아냥거렸다.
조강민이 곽철주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온 남궁천이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 줘 패기 딱 좋은 날씨다. 안 그러냐? 동생.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줘 팬다는 말도 있잖아.”
“남궁 형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정정해야겠군요.”
“오호, 어떻게?”
“남궁 형은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웃으며 씨불여대는 너도 마찬가지야. 자, 덤벼라. 귀찮으니 순서 정하지 말고 한꺼번에 하자.”
스르릉.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아 들자 시퍼런 예기가 흉흉하게 뻗어 나온다.
확실히 비 내리는 거리에서 검을 뽑아 든 채로 괴이한 웃음을 짓는 남궁천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조강민이 턱짓을 하자 곽철주를 비롯한 세 사람이 흩어지듯 달리더니 곧 남궁천을 포위했다.
조강민 역시 검을 뽑아 들고는 남궁천을 겨눴다.
“당최 어디까지 진심인지 모르겠군요.”
“걱정 마. 이 몸은 언제나 참교육에 진심이니까.”
“설마 이곳 주인장과 점소이들을 믿는 겁니까?”
다운산에서 봤을 때, 이들이 꽤 강한 자들이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들도 나설 수 없다.
관전이라는 명목으로 생도들을 서른 명이나 끌고 오지 않았나?
만약 주인장과 점소이들이 생도에게 손을 댔다간 학관은 물론 각 명문정파에서 절대 가만있지 않으리라.
한마디로 남궁천을 돕겠답시고 섣불리 나섰다간 한순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조강민이 피식 웃었다.
“혹 저들을 의지하는 거라면 아무런 도움도…….”
“넌 주둥이로 싸우냐?”
팟!
찰나 남궁천이 바닥을 차며 조강민에게 쏘아지듯 날아갔다.
‘이 새끼, 말하는 도중에……!’
조강민이 두 눈을 부릅떴다.
빠르다!
며칠 전 남궁천의 등짝에 일장을 먹일 때만 해도 이 정도의 기량이라고 생각진 못했다.
그사이에 무공 수위가 상승했나?
설마. 대단한 영약이라도 복용한 게 아니고서야.
어쨌든 생각을 길게 끌 수는 없는 상황.
조강민이 재빨리 땅을 툭 찍어 차며 물러났다.
하나 그 이전에 이미 남궁천은 조강민의 단전에서 일어난 공력이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을 따라 새끼발가락으로 뻗는 걸 보았다.
다리 외측부로 이어지는 족소양담경을 사용하는 보법은 대체로 사선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남궁천은 조강민보다 앞서 벽라검을 비스듬히 내질렀다.
쒸이익, 푹!
“컥!”
조강민의 입장에서는 마치 원래부터 검이 있던 곳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것과 같은 어이없는 순간이었다.
“소가주!”
화들짝 놀란 곽철주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남궁천도 자연스럽게 몸을 회전하며 재빨리 검을 뿌렸다.
이번엔 초견파공안도 필요 없다.
오랜 세월 도망자로 살다 보면 자신을 노리는 자들의 심리 상태를 금방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일단 송원교와 백리향은 당한 기억이 있는 만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당연히 조강민이 선공을 맡을 것이었으나, 남궁천이 먼저 공격해 버렸다.
조강민이 위험해지면 반사적으로 곽철주가 움직일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한데 조강민이 부상까지 입었으니 곽철주의 냉철함이 흔들릴 수밖에.
바로 지금처럼!
“노오옴!”
부우우웅!
언월도가 비를 가르며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다.
‘역시 동작이 너무 크네.’
제 주인이 당하는 바람에 흥분했다는 증거다.
충견이 따로 없다.
나도 이런 충견 하나 있으면 참 좋겠는데.
잠깐 떠올린 생각에 무심코 시선이 귀왕에게 향했다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역시 충견보다는 충신이 나을지도.
생각이 끝날 때쯤 벽라검이 곽철주의 왼팔을 그었다.
츄아앗!
츄파파파팟!
곽철주가 놀란 표정으로 보법을 밟으며 물러났다.
그 바람에 바닥에서 물보라가 마구 일어났다.
과연 충견답게 물러날 때조차도 조강민을 등진다.
조강민은 옆구리에 삼 촌 정도 깊이의 검상을 입었고, 곽철주는 왼팔에 얕지만 한 뼘 정도 되는 상처가 생겼다.
“저, 저럴 수가?”
부상을 입지 않은 송원교와 백리향은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기 힘든 표정으로 보았다.
조강민이 얼른 지혈하더니 악바리처럼 소리쳤다.
“이 병신 같은 송 후배야! 뭘 멍청하게 구경하고 자빠졌어! 정신 안 차려?”
“아……!”
그제야 송원교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검을 고쳐 쥐었다.
순간 남궁천이 일갈했다.
“짜져 있어! 뒈지기 싫으면!”
“……!”
송원교가 망치로 머리를 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꿈쩍도 못했다.
백리향도 검과 채찍을 손에 쥐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 지독한 살기……!’
남궁천의 전신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도, 도대체 이 기운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평범한 살기와는 피부에 와 닿는 정도가 다르다.
마치 이미 수많은 시체가 눈앞에 깔려 있는 것만 같다.
어디선가 지독한 피비린내마저 나는 것 같다.
이제부터 죽이겠다는 느낌보다, 벌써 많이 죽여 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 소름 끼치는 살기 속에서 곽철주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언월도로 바닥을 쿵 찍었다.
마치 나를 넘을 수 있으면 넘어보라는 듯.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충견이네.
하나 나는 충견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도 잘 알고 있지.
남궁천이 서늘한 음성을 던졌다.
“비켜. 나는 한 놈만 패.”
물론 그걸 받아들일 곽철주가 아니다.
“건방진!”
곽철주가 굵고 짧은 말을 뱉으며 황소처럼 돌진해온다.
투투투투투!
바닥을 차는 소리와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타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다.
남궁천의 시야에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을 타고 발끝에서 쭉쭉 내뻗어지는 붉은 광휘가 보인다.
곧이어 오른팔 수양명대장경을 따라 휘둘러지는 언월도까지.
황소처럼 돌진해 태산도 일도양단할 기세!
모르고 당한다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일격이다.
하나 알고 보면 지나치게 단순하다.
파밧!
언월도가 떨어지기도 전에 남궁천이 곽철주 곁을 스치듯 지나쳤다.
“……!”
뒤늦게 언월도를 휘두르는 곽철주는 맨땅을 보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콰자악!
이번에도 곽철주가 맨땅을 찍어버리자, 남궁천은 그대로 조강민에게 날아가 일검을 내질렀다.
쒸이이잇!
“헛!”
까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조강민이 휘청거리며 물러난다.
하나 진짜는 지금부터다.
“크아아압!”
투투투투투!
등 뒤에서 매서운 기합성과 함께 묵직한 투기가 살벌한 속도로 달려든다.
파파파파팟!
마침내 거대한 파도 같은 공격이 횡으로 들어올 때, 남궁천이 기다렸다는 듯 바닥을 찍어 찼다.
파밧!
남궁천의 신형이 공중에서 제비를 넘으며 조강민을 훌쩍 뛰어넘었다.
“헉!”
“엇!”
곽철주와 조강민이 동시에 비명을 터뜨렸다.
졸지에 곽철주의 언월도가 조강민을 노리게 된 것.
“소가주!”
곽철주가 비명처럼 외치며 온힘을 다해 언월도를 비틀었다.
퍼억!
“크억!”
마침내 비틀어진 언월도 옆면이 조강민의 어깨를 강하게 때렸다.
포탄처럼 튕겨 나가는 조강민의 뒷덜미를 남궁천이 기다렸다는 듯이 낚아챘다.
“어이쿠! 개새끼가 주인을 물어다줬네?”
남궁천의 비아냥거림에 곽철주의 눈이 뒤집혔다.
“끄아아아!”
한편 반장에서 이를 지켜보던 생도들이 슬그머니 나서려고 하자, 귀소이들이 다가와 어딘지 살벌한 웃음을 지었다.
“손님들? 아직 주문을 안 하셨습니다만? 분위기 좋을 때 음식부터 시키시지요?”
어딘지 소름 끼치는 미소.
귀왕도 양손에 식칼을 들고 히죽 웃었다.
“자, 뭘 드시겠습니까? 참고로 오늘은 개업 기념이라 모든 음식이 특별히 좀 비쌉니다.”
이제 오히려 억류당하는 쪽은 생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