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헷갈리네
서산에 걸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이년생 교관부장인 호덕창은 창가에 서서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과 각진 턱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중년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한마디로 새로운 사실이 없다는 거군.”
“뭐, 그런 셈이죠.”
탁자에 앉은 비량이 어깨를 으쓱이곤 대꾸했다.
호덕창이 여전히 하늘만 바라본 채 물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던가?”
“없었습니다. 혁련장도 윤종승이 직접 가르쳐 줬다고 말했고요.”
“가문의 절기를 그리 쉽게 가르쳐준다?”
“뭐, 철없던 꼬꼬마 시절이잖아요. 그리고 그 정도 무공을 ‘절기’라고 표현하는 건 좀 그렇죠. 막말로 황산윤가에서 식객으로 서너 달만 눌러앉아도 익힐 수 있는 수준 아닙니까?”
“그야 자네처럼 타고난 천재들에게나 그렇겠지.”
“또 이러신다. 저는 천재가 아니라니깐. 그저 감각이 좀 탁월하다? 뭐, 그 정도? 진짜 천재는 진천랑 같은 자들이죠.”
호덕창이 미세하게 흠칫거렸다.
“진천랑이라. 대살성이 천재라고 생각하나?”
“그럼요. 희대의 천재죠. 무공을 제대로 익힌 적도 없는 자가 무림맹을 아주 장기간 골탕 먹였잖아요?”
“재미있는 표현이군. 하나, 자네 발언은 다소 위험해 보여. 특히 교관으로서는 말일세.”
“어휴, 교관이 말도 함부로 못하는 직업이면 전 그만 때려치울래요.”
비량이 시종 건들건들 반응하자 호덕창은 내심 혀를 찼다.
‘하필 저런 녀석이…….’
그는 비량을 교관으로 들인 학장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교관 임명권은 우선적으로 학장에게 있으니 일단 지켜볼 수밖에.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관주에게 직접 손을 써 달라 부탁해도 되고.
‘차라리 이 녀석이 대형 사고라도 치면 좋겠군.’
그렇다면 파면시킬 명분은 충분할 테니.
호덕창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는데, 비량이 탁자 위에 다리를 척 올려두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자세.
호덕창이 노골적으로 미간을 구겼지만, 비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번엔 제가 질문.”
“뭔가?”
“왜 그렇게 남궁천에게 신경 쓰시는 겁니까?”
“그 아이가 대살성의 혈육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알죠. 단지 그 이유로?”
“자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대살성이 그간 무림맹을 얼마나 곤혹스럽게 했는지. 그런 자의 유일한 핏줄이니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연좌제 같은 건가요?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도 묻겠다는 뭐 그런…….”
“그 표현은 듣기 거북하군.”
“아니면…… 진천랑의 죽음에 떳떳하지 못한 뭔가가 있거나?”
“자네!”
결국 호덕창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그가 딱딱한 표정으로 뚝뚝 끊어지는 음성을 뱉어냈다.
“방금 그 발언은 맹을 불신한다는 뜻인가?”
“에이, 그럴 리가요. 그저 합리적인 의심이죠. 진천랑은 이미 죽었는데 그 사생아를 이렇게까지 관찰한다는 게 좀 이상하잖아요? 마치 아비에게 몹쓸 짓을 해놓고 그 자식이 복수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만하게. 선을 넘고 있네.”
“이런, 죄송. 이번엔 인정.”
“현 강호는 역사상 전례 없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위직 간부의 부정부패도 유사 이래 최저치. 이는 윗선 맹원들께서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철저한 감시를 지속했기에 가능한 것이야. 남궁천을 지켜본 것 역시 그저 그 일환일 뿐일세.”
짝짝짝……!
비량이 박수를 치자, 호덕창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이 새끼…… 아까부터……!’
비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동적인 말씀 자알 알아들었습니다. 부디 그 윗선들께 앞으로도 강호를 잘 지켜달라고 전해주세요.”
“자네는 좀 더 교관으로서 자질을 갖추도록.”
“노력해볼게요.”
비량이 예의 그 속없는 웃음을 활짝 지어 보였다.
호덕창이 가만히 노려보는 가운데 비량이 실내를 나서려다가 말고 문득 몸을 돌렸다.
“그런데…….”
“뭔가?”
“뭐, 강호의 평화, 부정부패 척결. 다 좋은데 말입니다.”
“……?”
“어쩌다 보니 제가 청룡반 생도들을 담당하는 교관이 됐잖아요?”
“그래서?”
“만약 죄 없는 내 생도들을 건드린다면…… 전 그게 누구든 용서할 생각이 없습니다.”
“……!”
순간 호덕창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비량의 눈빛이 휘몰아치는 북풍한설처럼 차갑게 느껴진 탓이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엄청난 압력.
살기나 투기처럼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기운이 아니라, 비량을 중심으로 묘하게 우러나오는 분위기다.
물론 그 직후 특유의 낭창한 미소가 그 중압감을 거짓말처럼 날려 버렸지만.
“하하. 어때요? 이만한 각오면 나름 교관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걸까요?”
“……훌륭하군.”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비량이 나가자 호덕창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진이 빠지는군.’
* * *
무한에 비가 내린다.
남궁천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릇에 코를 박고 국수를 들이켰다.
후루룩! 후루룩!
곧이어 젓가락으로 왕만두를 집어 들어 입에 쑤셔 넣었다.
우물우물. 쩝쩝.
‘오랜만에 먹지만 역시 맛있네. 비오는 날은 역시 국수지.’
그런 남궁천의 반응이 흡족한지 귀왕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주군, 음식은 입맛에 잘 맞으십니까?”
“아주 좋아. 이만하면 장사가 꽤 잘 되겠어.”
“하하하! 제가 이래 봬도 한 솜씨 합니다.”
“알지. 내가 이 맛을 느끼고 싶어서 무한에 반장을 차리라고 한 거니까.”
“어떻게 제 요리 솜씨를 다 아시고?”
“뭐, 아버지한테 들었지.”
“그렇군요. 한데 그 상납금 말입니다만.”
“왜? 양심적으로 너무 적게 내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려? 그럴 것 없어. 우리 사이에. 뭐, 너희들이 무일푼인 상태에서 내가 통 크게 투자했으니 그런 생각을 가질 만도 하지만…….”
“저, 주군…… 그게 아니고…… 상납금을 조금만 줄여주신다면…….”
탁.
남궁천이 먹다 말고 젓가락을 내려두더니 정색했다.
“현판 떼자. 투자금은 모두 즉시 갚도록 하고…….”
“아이참, 왜 이러십니까? 하하! 농, 농입니다, 크하하하!”
“그렇지?”
“그럼요! 무일푼인 저희들에게 통 크게 투자하신 주군께 오 할은 부족할 정도죠.”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육 할로 올릴까?”
“주, 주군…… 그건 좀……!”
“나도 농이었어.”
“크하하하! 역시 주군은 농도 잘 하십니다!”
귀왕이 바보같이 웃어대자, 남궁천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의문.
“그나저나 밥집 이름이 ‘귀왕반장’이 뭐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지 않습니까? 제 요리를 먹고 죽으면 때깔이 너무 좋아 귀신들의 왕이 될 거란 의미로 귀왕반장이라 지었지요.”
“뭐, 나름 열심히 끼워 맞추긴 했네.”
“그것 말고도 생각해둔 이유가 많습니다. 예컨대 둘이 먹다 하나 죽으면 귀신이 되어 왕의…….”
“됐고. 왜 죄다 먹다 죽어 나자빠져? 그래서 맘 놓고 처먹겠냐?”
“바, 바꿀까요?”
“이제 와서 현판 갈아치우려면 돈이야. 그대로 둬. 그보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남궁천은 귀왕채 무인들에게 무한에서도 용천학관 인근에 반장을 차리도록 했다.
지금처럼 수시로 드나들면서 이들의 정보력을 이용하기도 좋고 공짜로 배를 채우기도 편하니까.
귀왕이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저희들이 은밀히 알아본 사실을 고하자면, 그 교관의 본명은 비량, 나이는 서른두 살. 외모는 뭇 여성들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수려하고 특유의 백발이 잘 어울려…….”
따악!
귀왕이 뒤통수를 움켜쥐고는 울상을 지었다.
“큭! 왜, 왜요?”
“다 아는 얘기를 분위기 잡고 주절대지 말고 본론을 말해.”
“아…… 예. 그놈 알고 보니 약관도 되기 전에 절정고수 반열에 올라서 무림의 신성이라 불린 이력이 있더군요.”
“호오?”
“그 후로 무림맹 질풍대(疾風隊)에 들어가서 활약하다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고 천라단(天羅團), 청랑단(靑浪團)을 거쳐 철혈대주(鐵血隊主)의 자리까지 올랐습지요. 그때 나이가 고작 스물다섯이라고 하니 말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스물다섯에 철혈대주라…… 굉장하네.”
“예, 저도 이런 놈은 처음 봤습니다.”
귀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철혈대는 무림맹을 대표하는 타격대라고 할 수 있었다.
이십 대에는 철혈대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정을 받았다는 말인데, 고작 스물다섯의 나이로 대주까지 올랐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기재라는 뜻.
“그 후에는?”
“그게 이때부터 좀 묘합니다.”
“뭐가?”
“철혈대주로 활약한 게 딱 일 년인데, 그야말로 혁혁한 공을 여러 번 세웠더군요. 그런데 일 년 후부터 갑자기 정보가 뚝 끊어집니다.”
“철혈대주로 계속 활약한 건 아니고?”
“예. 스물여섯 살부터는 돌연 지방 한직으로 쫓겨나거든요.”
“흐음. 얼마나?”
“대략 이 년 정도입니다.”
“그다음에는?”
“무림맹 본단으로 돌아와 여러 조직에 들어가는데,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켜서 계속 강등되지요.”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강호 신성이라 칭송받던 자가 대뜸 이 년간 한직으로 쫓겨나더니 문제아가 되어서 돌아왔단 말인가?
이거 정말 재미있는 놈일세.
“계속 읊어 봐.”
“예, 그렇게 줄곧 강등되다가 무림맹 말단 조직 평무인으로 내려오지요.”
“무슨 문제를 일으켰는데?”
“반골 기질이 있는 건지, 대체로 명령불복종 같은 것들입니다.”
“그건 왠지 마음에 드네. 계속.”
“뭐, 이제부턴 아시는 대롭니다. 말단 조직에서도 잘려서 탱자 탱자 놀다가 이번에 용천학관에 교관으로 들어왔지요.”
“흐음, 그렇군. 꽤 자세히 털어왔네. 뭐,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저어, 그래서 말인데. 여기저기 어둠의 경로로 정보를 캐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나간 돈이 꽤 됩니다. 첫 달 상납금만큼은 어떻게 좀…….”
하긴. 충분히 이해하는 바다.
강호에서는 결국 정보도 돈이니까.
이만큼 정보를 모으려면 지출이 꽤 컸으리라.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첫 달 상납금은 사 할로 낮춰주지.”
“예? 면제가 아니고요?”
“응? 현판 떼자고?”
“아닙니다. 사 할 드리겠습니다.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을.”
내가 이렇게 양심적이다.
이렇게 수하들의 속사정까지 다 헤아려준다. 이러다 거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귀왕이 격한 감사 기도를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정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무리의 생도들이 쏟아지듯 들어오는 게 아닌가?
다들 비를 맞았는지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귀왕과 수하들…… 아니, 이젠 귀왕과 점소이들이라고 해야 하나?
헷갈리지 않게 귀소이(鬼小二)라고 부르면 편할 것 같다.
아무튼 그들이 동시에 반색하며 소리쳤다.
“어서 옵쇼!”
모처럼 대박 손님에 귀왕반장이 분주해졌다.
“어이쿠, 비를 많이 맞으셨네요.”
“닦을 것 좀 갖다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그런데 생도들의 반응이 어째 시큰둥하다.
다들 하나같이 남궁천을 힐끔거리더니 약속이나 한 듯 자리를 빽빽하게 채우고는 한껏 험악한 분위기를 잡는다.
그런 묘한 흐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귀소이들은 연신 수저와 물병, 수건을 나르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벌컥!
문을 거칠게 열면서 나타난 네 사람.
조강민과 곽철주, 송원교와 백리향.
그들이 나타나자 먼저 와 있던 생도들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는 남궁천을 쳐다본다.
남궁천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한동안 얌전히 지낸다 싶더니.
“남궁천, 여기 있었나?”
송원교가 이죽거리며 다가온다.
남궁천이 젓가락을 내려두고는 물었다.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는 게 정말 가능한지 궁금해서 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