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2화 (22/508)

22. 헷갈리네

스팟!

자욱한 운무가 일순 흐트러졌다.

운무 사이로 그림자가 얼핏 드러났다.

하지만 죽립을 깊이 눌러쓴 데다 여전히 운무가 짙었기에 어렴풋한 형상만 드러나는 것에 그쳤다.

자박자박.

조용히 움직였지만 딱히 기척을 숨기려는 조심성도 보이진 않았다.

죽립을 쓴 그림자는 제일 먼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혈우림 무인들을 하나씩 살폈다.

그가 마지막 혈우림 무인을 살필 때, 마침 저쪽 커다란 바위 뒤쪽에서도 기척이 느껴졌다.

역시나 검은 피풍의를 두르고 흑립을 깊이 눌러쓴 자다.

온통 시커먼 옷으로 가렸으니 운무가 없다고 해도 정체를 알 도리가 없었다.

죽립인이 혈우림 무인의 시체를 살필 동안, 흑립인은 바위 아래에 뒤통수가 깨진 채로 절명한 계평량의 시신을 살피고 있었다.

마침내 두 그림자가 바위 옆으로 걸음을 모았다.

이제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

하나 죽립인이 고개를 들자 하얀 고양이 가면이 드러났고, 흑립인은 검은 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고양이 가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옥구슬이 구르듯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

하나 목소리에 실린 기운은 북풍한설만큼이나 냉랭하다.

“이러면 수지가 안 맞아. 흑사(黑蛇).”

“내가 할 말이다, 백묘(白猫). 계 교관은 낫질하는 녀석에게 당한 것 같군.”

“그 낫질하던 녀석은 목이 잘렸는데?”

“계 교관 짓이라고 보나?”

“에이, 설마. 이해는 안 되지만 동료에게 당했어.”

“서로 치고받고 죽인?”

“뭐, 적어도 둘 정도는 그렇게 보여.”

“또 다른 건?”

“한 녀석은 기습에 당한 것 같은데…… 연꽃 모양의 상흔이 남았네.”

“연꽃 모양이면…… 혁련장인가?”

“글쎄. 그건 그쪽에서 밝혀야겠지.”

“알아보지.”

“설마 그걸로 끝? 사과 정도는 해줘야 할 텐데.”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너희들끼리 치고 박고 죽였다고.”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 그게 확실하단 건 아냐. 사후 처리를 한 것인지 시체 상태가 정상은 아니니까.”

“어쨌든 우리로서도 계 교관을 잃었다. 그걸로 퉁쳐.”

“무책임하네.”

찰나 백묘가 손을 뻗어왔다.

쉬이잇!

새하얀 접선이 예기를 품은 채 날아오자, 흑사가 얼른 몸을 젖히고는 연검을 뽑아 들었다.

뚜카앙!

휘리링, 휘리링링.

흑사가 쥔 흑빛의 연검이 연신 휘청거리며 기묘한 흐느낌을 터뜨린다.

마치 시커먼 뱀이 허공에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오락가락하는 것만 같다.

흑사 가면 아래의 눈빛이 번뜩였다.

“백묘, 그만하면 됐어. 선을 넘지 마.”

“역시 쉽지 않네. 수지타산을 맞춰보려고 했더니.”

“흥! 자꾸 이러면 계산을 처음부터 다시 하는 수가 있어.”

“알았어, 알았어. 뭐, 모든 게 계획대로만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대신 이번 일, 우리로선 매우 유감이야.”

백묘가 새하얀 부채를 펼쳐 들고는 살랑살랑 저었다.

비로소 흑사도 연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고는 돌아섰다.

“적당히 주제 파악하고 물러나라.”

흑사가 몸을 날려 자리를 뜨자 백묘가 가만히 미소 짓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제 파악이라…… 당신들이야말로 주제 파악은 하고 있으려나?”

* * *

‘흐음, 왜 감감무소식일까?’

남궁천은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지금쯤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혈우림 무인 중 한 놈에게 혁련장을 먹였으니, 분명 그걸 알아본 인간이 있을 거다.

그래,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봤을 테지.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혁련장은 사실 누가 자신을 노리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덫을 놓은 것이었다.

어릴 때 윤종승이 남궁천에게 혁련장을 알려준 적 있다는 사실을 듣고서 요긴하게 써먹은 셈이다.

물론 철없을 때 지나가듯 알려준 혁련장을 남궁천이 진짜 사용했다는 걸 알게 되면 윤종승이 놀라자빠지겠지만.

‘뭐, 초견파공안 덕분이지만, 중요한 건 어릴 때 가르쳐 준 적이 있긴 하다는 거지.’

그나저나 그 정도로 친했으면서 호구 놀이에 동참을 해? 다시 또 살짝 열받네.

어쨌거나 그렇게 덫을 쳤으니 슬슬 걸린 물고기를 잡을 차례인데…….

‘왜 안 걸려들지?’

대별산에서 돌아온 지 벌써 보름이 지났는데.

학관은 평온했고, 윤종승은 여전히 공식 호구 노릇에 충실했으며, 남궁천을 건드리는 녀석들은 보기 드물어졌다.

물론, 조강민이나 송원교 같은 녀석들이 이대로 숨죽이고 지낼 리가 없겠지만, 아직까진 이렇다 할 도발이 없다.

‘설마 정말로 계평량이 독단적으로 날 죽이려고 한 건가?’

그럼 진짜 미친놈인데?

하긴 일가족이나 친인척 중에 나한테 죽은 녀석이 있다면 내 자식에게나마 복수를 시도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쳐도 너무 무모하지 않나?

분명 좀 더 윗선의 배후가 있을 것 같은데…….

남궁천의 생각이 깊어지는데 마침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내가 성큼 들어섰다.

왁자지껄하던 연공실이 일순 조용해지면서 시선이 모였다.

눈부신 백발에 단정한 이목구비, 깊고 맑은 눈동자.

그야말로 꽃미남이라는 칭호가 딱 어울리는 사내.

“와…… 개잘생겼다.”

윤종승이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멍하니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송원교가 뒤통수를 차지게 후려쳤다.

따악!

윤종승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다가 곧 송원교의 험악한 표정에 꼬리를 말았다.

송원교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매를 비틀며 꽃미남에게 다가갔다.

“누구시오? 학관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꽃미남이 멀뚱히 송원교를 바라보다가 이내 속없는 미소를 활짝 지어 보였다.

“나? 새로 온 교관인데?”

“새로 온 교관이면 자기소개부터 제대로 하고…… 응? 교관? 교관이라고요?”

송원교는 물론 다른 생도들마저 웅성거리며 꽃미남을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꽃미남은 나이가 많아야 이제 막 약관을 지났을 법했기에.

교관치곤 너무 젊지 않은가?

그런 시선을 어느 정도 인지했는지, 꽃미남이 예의 그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이래 봬도 먹을 만큼 먹은 나이니까 오해는 말고. 서른두 살이거든.”

“서른…… 살이라니. 많아 봐야 나보다 두세 살 정도 차이날 것 같은데…….”

송원교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꽃미남이 어깨를 으쓱였다.

“못 믿겠어? 호패 까?”

“호패에…… 나이가 나와요?”

“아, 나이는 안 나오나?”

송원교를 비롯한 생도들이 다시 멍한 표정이 됐다.

뭐지? 머리에 대못 하나 빠진 것 같은 이 인간은?

남궁천 역시 말없이 새로 온 교관을 지켜보기만 했다.

꽃미남이 연공실 단상 중앙으로 걸어가더니 이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모두들 반가워. 내 이름은 비량(費倆). 청룡반의 새로운 담당 교관이야. 사이좋게 잘 지내자.”

“…….”

“거기, 네 이름은?”

“네? 아, 송, 송원교입니다.”

“그래, 원교야. 자리에 좀 앉아줄래?”

“아, 네…….”

송원교가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비량이 말을 이어갔다.

“다들 알다시피 전임 담당 교관님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셔서 내가 온 거야. 뭐, 내가 여기서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지만 잘리기 전까진 잘 부탁해.”

비량은 시종 낭창한 얼굴로 말을 이었고, 몇몇 생도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비량이 들고 온 서류를 대충 훑어보며 말했다.

“다들 알겠지만 조금 있으면 무한연합용봉회가 시작될 거야. 모두가 출전하기 어려운 만큼 다들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결과 내길 바랄게. 이상.”

말을 마친 비량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더니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생도들이 멍하니 바라보는데, 송원교가 얼른 일어나며 소리쳤다.

“잠, 잠시만요!”

“응? 아, 내가 질문을 안 받았구나. 질문 있나?”

“그야 당연히…….”

“뭐지?”

“음…… 그러니까…… 저어…… 그게 끝입니까?”

“뭐가?”

“그러니까 이게 끝이냐고요. 수업 안 하세요?”

“아아, 수업. 흠…… 수업이라. 그래, 수업이라는 게 있었지. 흐음.”

비량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자 송원교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도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교관이면 당연히 수업을 해야 할 것 아냐?’

하지만 비량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비량이 어딘지 순수하다 못해 어벙해 보일 정도의 미소를 활짝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좀 봐줘. 너희들도 따분한 수업은 지겹잖아?”

송원교와 생도들이 입을 척 벌렸다.

아니, 뭐 이런 교관이 다 있지?

도대체 이 인간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거야?

생도들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비량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연공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도 생도들은 한동안 움직일 생각조차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송원교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비량이었다.

그가 연공실을 한 번 슬쩍 둘러보더니 물었다.

“남궁천과 윤종승이 누구지?”

이내 생도들의 시선이 남궁천과 윤종승에게 각각 향했다.

비량이 예의 그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나 좀 볼까?”

* * *

창문 하나 없는 방.

남궁천과 윤종승이 나란히 탁자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서는 비량이 팔짱을 낀 채 서성였다.

어느 순간 비량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러니까 네가 혁련장을 남궁천에게 가르쳐 줬단 말이지?”

“예, 아주 어릴 때 잠깐…….”

윤종승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치다.

비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머지는 남궁천이 말한 대로 상황이 전개된 거고.”

“예.”

남궁천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지금껏 비량은 남궁천에게 다운산에서 있었던 일을 추궁했다.

남궁천은 비량을 가만히 응시했다.

언젠간 누군가 덫에 걸려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이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배후가 너냐?’

확실히 비량은 수상한 점이 많다.

어딘지 어설프고 낭창한 성격 같지만,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운은 고수의 향기를 품고 있다.

이건 직감으로 알 수 있다.

생존 본능에 특화된 도망자로서의 절대감각 같은.

다만 특이한 점은 이럴 경우 보통 적개심이 생기게 마련인데, 비량에게는 적개심이 생기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성격이 워낙 낭창해서 그럴까?

아니다. 원래 자신의 성격이라면 그럴수록 더 경계했을 거다.

도망자의 삶에서는 자신에게 이유 없이 웃어주는 인간이 제일 위험했으니까.

그래서 잔뜩 예의 주시하면서도 이상하게 저 멍청한 미소만 보면 긴장이 절로 풀어져 버린다.

‘도통 감이 안 잡히는군.’

이럴 땐 차라리 정공법으로 부딪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남궁천이 일부러 불쾌한 듯 물었다.

“반시진이나 절 잡아두고 이런 걸 캐묻는 이유가 뭡니까? 설마 제가 교관님을 살해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아, 오해는 하지 말고. 나는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니까.”

“위에서? 누가요?”

“글쎄. 생도가 그런 것까지 궁금해? ‘어째서’나 ‘왜’가 아니라 ‘누군지’를 묻는구나?”

이것 봐라?

속없는 척 떠들어대면서도 의외로 날카로운 면이 있지 않은가?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궁금하죠. 제가 혈우림 무인에게 혁련장을 먹였으니, 혹시 높으신 분 눈에 띄었으면 출셋길이 열리는 거니까요.”

“오호, 그렇지! 죽어도 싼 놈들을 죽였으니 포상을 받아야 합당하겠네. 혹시 기대하는 포상이라도?”

비량이 오히려 들뜬 표정으로 묻는다.

이놈, 확실히 쉽지 않다.

속을 모르겠다.

보통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둘 중 하난데.

나만큼 미친놈이거나,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놈이거나.

이 녀석은 어느 쪽인지 구분도 안 되네.

‘재미있는 놈이네, 이거.’

남궁천이 내심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야 모르죠. 주는 사람 마음일 테니까.”

“하긴. 생도에게 금일봉을 하사하진 않을 테고. 그 정도로 곧장 출셋길을 보장하기도 그렇고. 아마 목패로 깎아 만든 상패 따위나 주지 않을까? 뭐, 상징적 의미로다가.”

“치사하네요.”

“맞아, 치사하지. 근데 세상이 원래 좀 치사해.”

이런 부분에서는 어지간히 나와 의견이 잘 맞는 것 같다.

“그럼 전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고생했어. 어서 가봐.”

“그럼.”

“저, 저도 이만!”

윤종승이 먼저 일어나서 도망치듯 방을 나갔고, 남궁천이 그 뒤를 따라 나가려고 할 때였다.

“천아.”

문득 등을 두드리는 목소리.

돌아보니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

한데 그 미소가 지금까지와 달리 사뭇 의미심장해 보인다.

“위에는 내가 잘 말해둘 테니 걱정 마.”

남궁천이 미간을 슬쩍 모았다.

이 새끼, 진짜 헷갈리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