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불나방이 많다
남궁천은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이런 가벼운 몸놀림은 오랜만이었다.
주변 공기의 움직임이 마치 제 숨결처럼 느껴진다.
이제 막 구룡철심단을 소화했기 때문에 몸이 더욱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다.
똥을 싼 직후에는 유난히 몸이 가볍게 느껴지듯.
하필 비유가 좀 더럽긴 해도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비슷한 맥락이다.
배변 후의 가벼움은 상대적이다.
즉, 이전의 몸 상태가 너무 무거웠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너무 도취되어서는 안 된다.
여차하면 삐끗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쉬이이익!
스팟!
검기가 스쳐 지나가면서 소맷자락을 갈랐다.
피츗!
핏방울이 튀어 오른다.
팔뚝을 길게 베였다.
덕분에 잠깐 취할 뻔했던 정신이 맑아진다.
“노오옴!”
슈아아악!
허공을 가르면서 대부(大斧)가 떨어져 내린다.
물론 그보다 앞서 붉은 기운이 땅을 가르는 걸 보았기에 남궁천은 여유 있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
쉭, 콰앙!
바닥을 때린 대부가 그대로 틀어박혔는지 꿈쩍을 하지 않는다.
남궁천이 그대로 대부를 밟고 날아오르면서 일각을 내질렀다.
퍼억!
발끝이 정확히 턱에 적중하자 놈이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간다.
“크아악!”
콰당탕탕!
턱이 완전히 부서졌는지 복면 안쪽이 피로 축축하게 젖었다.
의식을 잃은 건지 죽었는지 모르겠다.
뭐, 의식을 되찾는다고 해도 당장 일어서진 못할 거다.
남은 복면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하나 곧 기합성과 함께 몸을 날려 온다.
이번에도 초견파공안이 어김없이 발휘된다.
놈의 단전에서 솟구친 붉은 기운이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을 따라 뻗어 나가면서 바닥을 찬다.
화살처럼 날아든 녀석이 양손을 교차한다.
쌍겸을 사용하는 놈이다.
다시금 단전에서 솟구친 기운이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을 따라 낫자루를 타고 뻗어 내린다.
파밧!
남궁천이 보법을 밟자 놈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사용한 보법은 조금 전 턱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복면인의 보법이었으니까.
한 번 보고 그대로 보법을 흉내 내다니?
한편 남궁천은 물러나면서 생각했다.
‘서로 붙어 다니는 놈들이었군.’
아마도 이 복면 삼인조는 매사에 함께 지냈을 거다.
그러면서 자연히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합격술만 펼치면 무적이라고 느꼈을 거다.
사실 남궁천이 어리다는 이유로 방심하지만 않았어도 이들이 이렇게 힘든 싸움을 하진 않았을 거다.
어쨌거나 이들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사이.
달리 말하면 각자의 무공이 서로의 단점을 파고들 수도 있다.
휘이익! 스카앙!
낫 한 자루는 허공을 가르고, 다른 한 자루는 벽라검에 튕겨 나간다.
남궁천은 뻗어오는 붉은 기운을 비집고 나아가며 생각했다.
어째서 강호에는 이토록 불나방이 많은가?
이쯤 되면 싸우기보단 도망치는 게 낫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텐데.
혹시 이들이 익힌 무공은 모닥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을 보고 착안한 것일까?
생각이 너무 나갔다.
내가 이렇게 가끔 정신 줄을 놓을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생각이 샛길로 새어서 산으로 가기도 하고 뭐 그렇다.
그래도 이걸 즐기는 이유는 소 뒷걸음질로 쥐 잡듯이 간혹 깨달음을 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하나 남은 불나방이 이제 장렬히 불타야 할 순간이다.
아, 한 마리 더 있었지?
남궁천은 복면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저만치 안개 너머의 바위 쪽을 노려보았다.
* * *
“요란하게도 하는군.”
바위를 등지고 선 계평량은 내심 혀를 차고는 먼 산을 보았다.
어차피 안개가 자욱해서 먼 산 따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보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몇 차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저게 흑도의 방식이다.
뭘 해도 시끄럽고 산만하다.
저들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처리하는 법을 모른다.
자고로 고수일수록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처리하는 법이건만.
하긴. 살인을 즐기는 놈들이니 말 다 한 게 아닐까?
어쨌든 이걸로 됐다.
지저분한 일을 대신하는 자들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자신은 그저 결과만 확인하면 된다.
마침내 바위 너머 안갯속이 고요해졌다.
남궁천이 요즘 들어 무공에 성취가 있는 것 같더니, 꽤나 반항이 심했나 보다.
생각보다 오래 걸린 걸 보면.
저벅저벅.
바위 뒤편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계평량이 먼 산을 보며 물었다.
“끝났나?”
“끝났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그러게. 왕년에 나 같았으면 진작 끝났을 텐데.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
“시체는?”
“저쪽에. 그런데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뭐가 좀 더 낫나?”
“글쎄. 최소한의 도리랄까?”
계평량이 대답을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왜? 네가 생각해도 웃겨?”
“시끄럽다. 왜 자꾸 그딴 걸 묻지? 일 끝났으면 꺼져라.”
“내가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네 양심도 어쩌면 복면 같은 것 아닐까? 왜, 사람들이 복면을 쓰면 용기가 좀 생긴다잖아? 너도 그 양심이라는 복면을 쓰니까 나쁜 짓을 더 수월하게 하는 게 아닐까? 마치 거기서 먼 산 바라보고 있으면, 적어도 나는 깨끗하다고 합리화하기 쉬워지는 것처럼.”
“양심이라는 복면이라. 그럴싸하군.”
“그렇지? 내가 주둥이를 좀 잘 털어. 생각도 깊고 깨달음도 잘 얻고. 거기에 솔직하기까지.”
“도대체 아까부터 뭔 소리를 하고 싶어서…….”
계평량이 짜증스럽게 돌아보다가 멈칫했다.
안갯속에서 걸어오는 남자.
“너, 넌……!”
놀랍게도 남궁천이 아닌가?
계평량이 두 눈을 한참이나 끔뻑이다가 다시 제 손으로 눈을 비볐다.
“남궁천……?”
진짜 남궁천이다.
애초에 남궁천이 살아남았을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껏 목소리가 이상해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사랑스러운 생도를 봤으면 웃어야지. 왜 귀신이라도 본 표정일까?”
“네, 네놈이 어찌……?”
계평량이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남궁천의 전신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계평량이 더듬거렸다.
“녀, 녀석들은……?”
“이놈들?”
남궁천이 왼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휙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 든 계평량이 헛바람을 삼키고는 얼른 놔 버렸다.
“헉!”
툭, 데굴데굴……!
피를 흘리며 바닥에 구르는 것은 복면인의 머리.
남궁천이 복면인에게서 빼앗은 낫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우리 교관께서는 왜 새파란 생도 하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뭐가 그리 미워서?”
“천, 천아.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아무래도 오해가…….”
“이봐, 교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딴 말이 튀어나와? 교관은 어느 쪽이지?”
“뭐가 말이냐?”
“불나방이야? 맹수야?”
“뭔……?”
“불나방은 모닥불을 보고 달려들지. 맹수는 불을 보면 도망치고. 우리 교관은 어느 쪽일까?”
남궁천이 말을 건네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
먼저 움직인 쪽은 계평량이었다.
“이익!”
쉬잇!
계평량이 창졸지간 발검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운을 감지한 남궁천이 재빨리 발로 차서 검파를 도로 밀어 넣었다.
팍, 철컥!
뽑히다가 만 검신이 검집에 도로 처박힐 때, 남궁천이 낫을 들고 사선으로 휘둘렀다.
쒸이잇, 콰작!
“끄아아악!”
피가 솟구치면서 남궁천의 뺨에도 튀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피 냄새네.”
남궁천이 피 묻은 얼굴로 조소까지 지어보이자 흡사 광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끄으윽……! 잠, 잠깐만……!”
계평량이 왼팔을 축 늘어뜨린 채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는 아직 새파란 애송이가 아닌가?
한데 어째서?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다가왔다.
“안타깝네. 그래도 맹수였으면 불에 구워 먹는 맛이라도 있을 텐데.”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그 전에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야지? 왜 그랬냐? 맹주가 시키더냐?”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계평량이 바위에 등을 부딪치고는 멈췄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단 생각이 들자 오기라도 생긴 모양이다.
그가 차갑게 힐난했다.
“흥! 네놈 따위를 죽이는데 맹주님까지 나설 일이겠느냐? 대살성의 자식이 죽길 바라는 자가 어디 한둘일까? 네놈이 이 땅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자는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많을 것이다!”
“그래서 배후는 밝히기 싫다?”
“배후 따위가 없어도 내가 스스로 했을 일이다!”
남궁천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드는 생각이지만 역시…….
“강호에는 불나방이 많다니까.”
“미친놈!”
파앗!
계평량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남궁천이 한 박자 더 빨랐다.
계평량의 검을 피한 남궁천이 그대로 상대의 이마를 쥐고는 바위로 밀어붙였다.
꽈앙!
“커억!”
계평량의 뒤통수와 바위가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꽝! 꽈앙!
“끅……!”
쾅! 퍼억! 퍽, 퍽, 퍽……!
연이어 머리를 부딪친 계평량은 마침내 뒤통수가 완전히 깨져 나가면서 즉사하고 말았다.
계평량이 바위에 기다란 핏자국을 남기며 허물어지자 남궁천이 씨근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아, 모처럼 흥분했네. 새끼가 너무 솔직했어.”
그러고 보면 사람이 지나치게 솔직해도 문제다.
적당히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지.
남궁천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계평량을 무심히 내려다보고는 그 위에 아무렇게나 낫자루를 던져두었다.
그럼 이제 적당히 거짓말을 하러 가볼까?
* * *
다운산 기슭에 용천관 생도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내상을 입은 자도 있었고, 연신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무위를 자랑하는 생도도 있었다.
의원들은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팽수혁은 한쪽에 서 있는 송원교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교관님은 어디에 있나?”
“글쎄. 남궁천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셨는데…….”
“여태 어디에 있다 온 거냐?”
“남궁천이 무단이탈하는 바람에 녀석을 찾아다녔지.”
“저들은 누구야?”
팽수혁이 턱짓으로 귀왕채 무인들을 가리켰다.
송원교가 대략의 사정을 전해주자 팽수혁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남궁천이 구해준 자들이란 말이지?”
“그렇다네.”
확실히 이해하기 힘든 일들 투성이다.
남궁천에게 뭔가 변화가 생긴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호구 녀석이 어떻게 인질까지 구할 수 있었겠나?
그 변화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팽수혁은 오히려 반가운 기분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제야 건드릴 맛이 나겠구나.’
그동안은 원수의 자식이 너무 형편없어서 허탈감만 느꼈다.
딱히 조부의 복수를 할 마음도 생기지 않을 만큼 나약한 녀석이었으니까.
경멸과 멸시도 놈에겐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제법 칼 좀 휘두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제대로 가문의 원수로 대해서 한 번은 밟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산기슭 쪽에 모인 생도들이 웅성거렸다.
팽수혁과 송원교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마침 피투성이가 된 남궁천이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남궁 소협!”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귀왕채 무인들이 제일 먼저 달려가 남궁천을 맞이했다.
다른 교관들과 생도들도 우르르 몰려갔다.
교관 하나가 다그치듯 물었다.
“남궁천! 무슨 일이냐?”
남궁천이 서 있을 힘도 없다는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계, 계평량 교관님이…… 혈우림 잔당에 당해서 돌아가셨습니다.”
“뭐, 뭣이!”
교관들의 표정이 격하게 흔들린다.
남궁천이 그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폈다.
‘이 중에서는 계평량의 암계를 공유한 자가 없는 모양이군.’
모두들 진심으로 믿고 놀란 표정이다.
남궁천은 목소리를 쥐어짜듯 말을 덧붙였다.
“저, 저는 계 교관님이 목숨을 걸고 싸워주신 덕분에……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눈물도 한 방울 쥐어짜고 싶었는데 나오질 않는다.
역시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그럴싸하지 않은가?
원래 나는 참 솔직한 놈인데…….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거짓말도 참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