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0화 (20/508)

20. 불나방이 많다

조강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말씀인지?”

“뭐, 별것 아냐. 어쨌거나 내가 돌아왔으니 슬슬 가볼까?”

“잠깐만요. 이렇게 우리를 피곤하게 하셨으니 먼저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조강민이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동시에 함께 온 조원들이 슬금슬금 다가서면서 남궁천을 완전히 포위했다.

노골적인 적개심.

투기를 넘어 살기까지 느껴진다.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래서 애새끼들은 피곤하다니까.

이것들은 지금 산채에서 난리가 난 줄도 모르겠지?

남궁천이 검집으로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어이, 동생.”

“동생……?”

조강민이 뺨을 씰룩이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여기 동생이 너 말고 또 있어?”

“그렇군요. 말씀하시지요, 남궁 형.”

“지금 실전이잖아. 그럼 최소한 진짜 적이 누군지는 파악해야지. 형이 오늘 모처럼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고 와서 기분이 좋거든? 다 같이 웃으면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잖냐? 선 넘지 말자.”

“후후후. 남궁 형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는 법이죠.”

“어? 네가 생도들의 적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생도들의 적은 너처럼 규율을 함부로 어기고 무단이탈을 일삼아 동료를 위험에 빠트리는 새끼죠.”

“거참, 말 곱게 한다.”

“그럼 고운 말 처들을 짓을 하시든가!”

파앗!

순간 조강민이 바닥을 차며 날아오더니 그대로 일검을 내질렀다.

쉬이이잇!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하지만 초견파공안을 가진 남궁천에겐 이미 붉은 기운이 명치를 찌를 듯 쏘아지는 게 보인 상황.

파밧!

대번 보법을 밟으며 물러난 남궁천이 일순간 발검하며 조강민의 검을 쳐냈다.

쉬까아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조강민이 서너 걸음 물러났다.

촤아아앗!

왼발로 반원을 그리듯 미끄러진 조강민이 눈을 부릅떴다.

‘막았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기습 공격이었다.

손속에 사정을 둔 것도 아니다.

기분 탓일까?

며칠 전 관내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다.

검을 쥔 손바닥이 아직도 저릿하게 울린다.

‘뭐지? 이놈…… 힘을 숨기고 있었나?’

어느새 남궁천은 검을 뽑아 든 채 짝 다리를 짚고 서 있다.

“기어이 좋은 기회를 발로 걷어차겠다는 거야?”

“대열에서 무단이탈한 주제에 말이 많군요.”

조강민이 씹어뱉듯 말하면서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기운이 응집하면서 공기가 팽팽해진다.

그가 입은 장삼도 부풀어 오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송원교를 비롯한 조원들이 예기를 줄기줄기 뿜어대며 거리를 좁혀온다.

조강민이 싸늘해진 눈빛으로 읊조렸다.

“휴관기 때 어디서 제법 잔재주 좀 익혀온 모양인데. 그걸 믿고 너무 까부는군요. 오늘 일은 스스로 자초한 거라는 걸 알아주세요. 다들 뭣들 합니까? 대열에서 무단이탈하여 조원을 위기에 빠트린 저 새끼를 어서 쳐……!”

찰나 시커먼 그림자들이 허공에서 후두둑 떨어지듯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파파파팟……!

마치 남궁천을 지키겠다는 듯 에워싸며 나타난 여섯 무인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감히 누가 남궁 소협을 위협하는가!”

느닷없이 나타난 불청객에 조강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또 뭐야?

어디서 산적 같은 놈들이……?

하지만 평범한 산적은 아니다.

특히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저 인간.

무공 수위가 자신보다 한 수 위가 분명했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

절정고수!

상대의 뺨에 새겨진 칼자국이 꿈틀댄다.

“어이, 젊은이. 남궁 소협께 무슨 볼일이신가?”

조강민이 멍하니 바라보다가 남궁천을 향해 불쑥 소리쳤다.

“남궁천! 설마 혈우림 무인과 내통했던 것이냐? 과연 대살성의 자식다운……!”

“갈! 뭔 개 같은 헛소리냐? 우리가 어딜 봐서 그 빌어먹을 혈우림으로 보인다는 거냐?”

“혈, 혈우림이 아니라면…….”

“우린 혈우림에게 납치당해서 온갖 고문을 견뎌야 했던 선량한 무인들이다! 여기 계신 남궁 소협께서 우릴 구해주셨다!”

귀왕의 말에 남궁천이 내심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혹여나 맞춰 놓은 말을 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다.

귀왕이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소협! 무슨 일입니까?”

“몰라. 얘들이 날 때리고 싶대.”

남궁천의 직설적인 말에 조강민을 비롯한 조원들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반면 귀왕은 도끼눈을 치뜨고는 장창을 붕붕 휘둘렀다.

“어째서 네놈들은 정의로운 소협을 위협하는가!”

“이, 이건 용천관 내부 문제요. 당신들이 끼어들 필요는 없소.”

“아니 될 말! 은공이 위험해 보이는데 넋 놓고 구경만 하는 건 은혜를 입은 자의 도리가 아니지!”

후우우웅!

귀왕채 무인들이 일제히 기공을 끌어 올리자 뜨끈한 열기가 사방으로 훅 불어나갔다.

그 기세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치잇……!”

조강민이 혀를 차고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생도들과 달리 온갖 실전 경험으로 날카롭게 제련된 기운이다.

이래서야 오히려 자신과 조원들이 당할 게 뻔하다.

이대로 덤비자니 개박살 날 것 같고,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상한다.

그때였다.

“이놈들!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

고함소리와 함께 계평량이 경공을 펼치며 달려왔다.

“교관님!”

조원들이 반색하며 그를 반겼다.

계평량은 귀왕채 무인들을 보고는 경계심을 가지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귀왕이 예의 바르게 포권했다.

“우리는 그저 이름 없는 무인들이오. 그간 혈우림에 납치당해서 감금된 채 지내다가 귀관의 남궁 소협께 도움을 받아 이렇게 무사히 탈출하게 됐소.”

“한데 왜 병장기를 뽑아 들었소?”

“아, 이건 여기 생도들이 남궁 소협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응당 조강민을 비롯한 조원들을 혼내야 할 일임에도 계평량은 남궁천을 먼저 추궁했다.

“남궁천. 그게 사실이냐?”

“우연히 진법에 빠졌는데 이들이 갇혀 있던 모옥을 발견했습니다. 밖에서만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계평량이 이번에는 조강민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묻는 눈치.

하나 조강민이라고 내막을 알 리가 있나?

조강민이 가만히 고개를 젓자, 계평량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조강민은 여기 계신 분들을 모시고 조원들과 함께 하산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러자 귀왕이 이맛살을 푹 찡그리며 물었다.

“저어. 생도들을 혼내지 않는 거요? 분명 남궁 소협을 위협한…….”

“본관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거요. 귀하들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소.”

“끄음. 알겠소.”

“남궁천은 나 좀 보자.”

“저만요? 왜요?”

계평량이 날카롭게 쏘아보자, 남궁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뭐, 알겠습니다.”

썩을. 이유나 알려줄 것이지.

질문하는 생도를 째려보다니. 교관으로서 자질이 한참 부족한 놈일세.

* * *

계평량은 안갯속을 헤치며 성큼성큼 걸었다.

남궁천은 그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어색한 침묵이 신경 쓰였던 건지 계평량이 불쑥 물었다.

“휴관기 동안 무공을 익혔더냐?”

꼴에 교관이라고 남궁천이 달라진 걸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좀 강했습니다.”

피식.

계평량이 실소한다.

“그럼 그간 힘을 숨기기라도 했다는 뜻이냐?”

“원래 강호에서는 적당히 숨겨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드러냈느냐?”

“너무 숨겨도 호구 되더라고요.”

남궁천은 되는 대로 대답했다.

사실 이 대화가 별로 의미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쩐지 계평량이 시간을 끄는 느낌이었기에.

“목적지가 있는 거군요?”

“왜 그리 생각하느냐?”

“비교적 빠른 속도, 일정한 보폭, 자욱한 운무에도 망설임 없이 내딛는 걸음. 갈 곳이 확실하다는 뜻이겠죠.”

“제법이구나.”

계평량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남궁천이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길을 갈 때도, 원하지 않는 길을 갈 때도 있는 법이지. 하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길을 가게 된다. 그래서 되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돌이킬 수 없게 된 사람도 있지. 그게 인생인…….”

“병신 같네.”

“뭐?”

“아, 아닙니다.”

젠장, 또 속마음이 그대로 나왔다.

이 아찔할 정도의 솔직함이란.

사실 난 이런 선문답이 제일 싫다.

어딜 가냐고 물었으면 간단하게 목적지만 씨불이면 될 것이지. 이게 뭔 개소리냔 말이다.

개똥 같은 철학을 장황하게 나불대던 계평량이 마침내 말을 맺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그 많은 경우 중 하나라고 생각하길 바란다. 그 누가 가해자도, 그 누가 피해자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지금 어딜 가냐고요.”

결국 답은 듣지 못했다.

계평량은 이 대화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알고나 있을까?

계평량이 남의 속도 모른 채 피식 웃었다.

어딘지 무정한 미소다.

“거의 다 왔다.”

계평량이 커다란 바위를 끼고 돌아가자 저만치 자욱한 운무 사이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공력을 집중해 안력을 높였다.

복면을 쓴 삼인조.

이것 봐라? 일이 희한하게 돌아가네?

용천관 교관이 복면 쓴 자들을 만날 일이 뭐가 있지?

이내 복면인들이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복면인 중 하나가 남궁천을 힐끔 보고는 물었다.

“이 아이를 처리하면 우린 놔주겠단 말이지?”

계평량이 불편한 듯 눈살을 찌푸린다.

“입이 가볍군.”

“어차피 곧 뒈질 애새끼 앞에서 뭔 상관이야? 숨길 것도 없지 않나?”

“빨리 끝내.”

“어려울 일도 아니구만. 옆에서 지켜볼 텐가?”

“저쪽에 가 있겠다.”

말을 마친 계평량이 바위를 끼고 돌아갔다.

하, 이런 거였나?

남궁천은 계평량이 사라진 방향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았다.

대충 좋지 않은 일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로 악질일 줄이야?

이건 정말 못 참겠는데?

모처럼 분노 조절이 안 되네.

그런 남궁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면인들이 냉소를 지으며 주절댄다.

“하여튼 정파 새끼들이란. 온갖 비열한 짓은 다 해대면서 양심 있는 척은 쩐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뭐, 바위 뒤에서 기다리면 자기들 짓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나 보지?”

남궁천도 참지 못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희들 말에 백번 동감이다. 정파란 것들이 알고 보면 아주 쓰레기들이야.”

“맞아, 맞아.”

“온갖 고고한 척은 다 하면서 하는 짓거리는 더럽기 짝이 없어. 한마디로 존나 재수 없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우리 꽤 말이 통하는구나?”

“그러게. 그런데 너…… 뭐냐?”

복면인 중 하나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며 남궁천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다.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뭐가?”

“이 애송이 새끼가 미쳐 돌았나? 누구 맘대로 대화에 끼어들어? 뒈질 때가 되니까 눈깔에 뵈는 게 없어? 이 밟아죽일…….”

퍼억!

슈우우우욱, 콰다앙!

남궁천의 일장에 얻어맞은 복면인이 그대로 포탄처럼 날아가 나무기둥에 처박혔다.

“오, 황산윤가 혁련장이 꽤 쓸 만하네.”

남궁천이 손바닥을 보며 중얼거렸고, 다른 복면인 두 명은 입을 딱 벌렸다.

남궁천이 손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새끼가 잘나가다가 왜 욕지거리야? 짜증 나게.”

“너, 너 이 새끼! 뭐야?”

차차앙!

놀란 복면인 두 명이 동시에 칼을 뽑아 들었다.

남궁천이 목을 우두둑 꺾었다.

“왜? 너희들도 덤비게? 야, 이것들아. 형한테 두드려 맞고 죽거나 병신 된 인간만 사열종대로 연무장 삼백 바퀴야. 그런데 오늘 형이 기분이 좀 좆같아. 그럼 본능적으로 좆 됐다는 생각 안 드냐?”

“닥, 닥쳐라! 이 미친 새끼!”

“죽어엇!”

두 복면인이 동시에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찰나 남궁천이 초견파공안을 발휘하며 맞부딪쳐 갔다.

어지럽게 쏟아지는 붉은 빛깔 사이를 비집으며 남궁천의 신형이 춤을 추듯 한다.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아 들면서 생각했다.

확실히 강호에는 불나방들이 많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