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거짓말을 못해요
남궁천이 나서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자 귀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가십니까?”
“천천히 가자.”
“예? 어서 가서 토벌대를 도와야…….”
“토벌대는 지금쯤 산 반대편에서 오고 있을 거야.”
“그럼 라전현 쪽에서 올라온 무리는…….”
“나와 같은 용천관 생도들이지. 실전 경험을 쌓으려고 참가한.”
귀왕이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더욱 서둘러서 내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야…… 지금쯤 난리가 났을 테니까요.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있다고 해도 경험이 부족한 그들로서는 혈우림을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혈우림이 머릿수도 많을뿐더러 일류고수가 여럿 있습지요. 물론 절정고수도 있고요.”
“멍청하긴.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려야 할 것 아냐?”
“예?”
“지금 내려가 봐야 그 난리통에 휩쓸려서 괜히 힘만 뺄 것 아니냐? 교관들과 생도들이 어떻게든 개기다 보면 정예 토벌대가 도착할 거다. 우린 그때쯤 돌아가면 돼.”
기가 막히도록 이기적인 논리에 귀왕이 입을 척 벌렸다.
뭐지? 이 새낀?
그래도 용천관 생도라면 명문정파에서 나고 자랐을 텐데, 얍삽하기가 제 아비와 같은 수준이지 않은가?
이래서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생기나 보다.
남궁천이 귀를 후비며 물었다.
“그보다 지금 너희들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지?”
“저와 부채주는 절정 초입에 들어섰고, 나머지는 일류 수준입니다.”
“내가…… 아니, 내 아버지가 지적해준 부분을 잘 깨우쳤나 보네.”
“예, 덕분에 작은 성취가 있었지요.”
“그런데도 아버지한테 맺힌 게 많단 말이지?”
“아, 그건…… 하하, 저어…… 워낙 엄하시다 보니…….”
“좋아. 이왕 내가 너희들의 새 주인이 되었으니 그간 아버지에게 품었던 불만이 있으면 털어놔 봐. 내가 개선해줄 테니.”
진심이었다.
한 무리의 수장 자리가 자유분방한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이제부턴 남궁의 성씨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역시 제왕의 가문답게 어느 정도 통솔력을 겸비할 필요가 있으리라.
통솔력의 기본은 아랫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고.
이 바다처럼 넓고도 깊은 마음.
어쩌면 나는 타고난 제왕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귀왕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물어본다.
“정말…… 괜찮습니까?”
“물론이지. 다 말해.”
“사실…… 이전 주군은 좀 폭력적이었습니다. 걸핏하면 머리를 때려서 요즘 멍청해진 느낌도 들고…….”
“원래 멍청했던 건 아니고?”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그래도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넘어가고.”
“예, 아무튼 이전 주군은 분노 조절이 잘 안 됐지요. 밥맛이 없다고 패고, 똥을 시원하게 못 쌌다고 패고, 잠자리를 설쳤다고 패고, 심심하다고 패고, 기분이 좋아서 패고…….”
내가 그렇게 많이 때렸나?
“너희들이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버지가 너무했네. 맘 같아선 한 대 쥐어박고 싶었겠는걸?”
“역시 소협께선 저희 마음을 잘 이해해주시는군요. 혹시 소협도 아버지께 쌓인 게 많으십니까?”
“아무래도 부자관계가 원만하진 못했지.”
“역시 그렇군요! 그럼 용기 내서 더 말씀드리지요. 정말이지 그놈은 미친놈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어느 날 미쳐 돌았습지요. 그날 전 그놈 얼굴에도 제 낯짝의 상처와 똑같은 걸 새겨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놈이 잠들었을 때 단검을 뽑아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는데, 갑자기 눈을 번쩍 뜨지 뭡니까?”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지자 남궁천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서?”
“아! 니미럴, 좆 됐다! 생각했는데, 그 순간 제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조가 동탁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검을 바친 일화였습지요.”
“오호!”
“전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서 단검을 받쳐 들며 말했습니다. 단검을 주군께 바친다고요. 그게 나름 보검이었거든요. 그랬더니 멍청하게도 그걸 또 믿으면서 저한테 상까지 주더라고요. 킬킬.”
귀왕이 헤프게 웃어댔다.
“아아. 그랬구나. 그게 칼로 그어버리려던 거였구나. 충심 어린 선물이 아니었구나.”
“쩝, 나름 보검이었는데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뒈질 거였으면 가져가지나 말지.”
그래, 기억난다. 그 단검.
아마 무림맹 어떤 대주 배때기에 쑤셔 넣은 게 마지막이었지? 경황이 없어 미처 회수하진 못했다. 지금쯤 무림맹이 잘 보관하고 있겠군.
그나저나 듣다 보니 이상하게 기분 나쁘네.
남궁천이 귀왕의 뒤통수를 차지게 후려쳤다.
따악!
“크윽! 가, 갑자기 왜……?”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과의 의미로.”
“사과를 왜 이렇게…….”
“아, 그러네? 뭐, 부전자전이란 말도 있잖아. 아무튼 내 사과 받아줄 거지?”
남궁천의 번뜩이는 눈빛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귀왕이 어딘지 멍청한 미소를 짓는다.
“그, 그럼요. 하하…… 하…….”
“그래, 사람은 그렇게 늘 긍정적이어야지. 자, 이제 충분히 쉰 것 같으니 슬슬 움직여 보자.”
“예, 주군.”
귀왕과 수하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천의 뒤를 따르는 귀왕은 왠지 새로운 주인이 전 주인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 * *
챙챙! 챙!
푹! 쉬이익, 콰장!
“크아악!”
“이여업!”
난잡한 싸움.
여기저기에서 기합성과 비명이 터지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잡기가 부서지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어디론가 다급히 달려가는 자, 그 뒤를 바짝 추격하는 자, 고함을 지르는 자, 비명을 지르는 자, 구석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오들오들 떠는 자.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난장 속에서도 유난히 돋보이는 자들은 역시 혈우림 수뇌 무인들과 생도들을 이끄는 교관들이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곧 정예 토벌대가 도착할 것이다!”
“조금만 버텨라!”
교관들이 너도나도 소리친다.
산채 한쪽에서는 화마가 치솟으면서 시커먼 연기를 풀풀 뿜어낸다.
“쿨럭! 쿨럭, 쿨럭!”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달리던 윤종승이 시커먼 그림자와 부딪치곤 엉덩방아를 찧었다.
“크윽!”
“웬 놈이냐!”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시퍼런 도신이 코앞에 멈춘다.
시선을 들어 보니 혈우림 무인이다.
그는 상대가 아직 어린 생도라는 걸 확인하고는 입매를 비틀었다.
“뭐야? 이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는.”
순간 윤종승의 심연에서 반발심이 불쑥 고개를 든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내가 만만하구나!
그렇잖아도 용천관 공식 호구가 되면서 가슴속 울분이 차 있던 윤종승이었다.
연기를 많이 들이켠 탓에 사리판단이 안 됐던 것일까?
“이이익!”
생각보다 먼저 행동이 앞섰다.
튕기듯이 일어난 윤종승이 그대로 일장을 뻗었다.
황산윤가의 독문무공인 혁련장.
쉬이익, 퍼억!
“커억!”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상대가 기습 공격을 받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쿠당탕!
어깨를 들먹이며 씨근거리던 윤종승이 멍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내, 내가…… 혈우림 무인을……?’
실전에서 적을 물리쳤다는 고무감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밑바닥을 다지다 보면 강해진다던 말.
이런 거였을까?
그때 등 뒤에서 드리워지는 그림자.
등골까지 오싹해지는 살기를 느낀 윤종승이 천천히 돌아섰다.
시커먼 연기 속에서 유난히 번뜩이는 안광.
거구의 사내가 커다란 도끼를 사선으로 그어내렸다.
“헉!”
헛바람을 삼킨 윤종승은 그 자리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마침내 섬뜩한 파육음이 귓가를 스친다.
촤아악!
순간 뜨끈한 피가 안면을 확 덮친다.
‘어……?’
고통이 없다.
천천히 눈을 떠보니 상반신이 반쯤 찢어진 거구의 사내가 그대로 허물어진다.
쿠웅!
거구 뒤에 선 자가 대도를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말했다.
“뭘 멍청하게 서 있는 거야? 뒈지고 싶어 환장했어?”
“팽, 팽수혁……?”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싸우기 힘들면 도망이라도 쳐라!”
“아, 그, 그래. 고, 고마워!”
윤종승이 얼떨결에 대답하고는 후다닥 뛰어갔다.
팽수혁이 그 뒷모습을 보고는 혀를 찼다.
하여튼 한심한 것들!
약한 녀석들을 괴롭힐 때는 세상에서 제일 센 척하면서 정작 실전이 벌어지면 꽁무니 빼기가 무섭다.
팽수혁은 내공으로 안력을 높인 다음 안개와 연기로 휩싸인 산채를 둘러보았다.
전술이고 나발이고 없는 개싸움.
애초에 정보가 잘못 됐다.
혈우림의 본거지가 라전현에서 더 가까운 곳일 줄이야.
정예 토벌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생도들이 입는 피해가 크다.
팽수혁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마침 위쪽에서 거센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쳇! 이제야 도착한 건가?’
다행히 토벌대가 온 모양이다.
마침 교관 계평량도 팽수혁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팽수혁! 괜찮으냐?”
“예, 교관님.”
“정예가 이제 도착한 모양이다. 네가 청룡반 아이들을 찾아서 통솔해줄 수 있겠느냐? 싸움이 난장이 되는 바람에 조 편성이 의미 없어졌구나.”
“교관님은요?”
팽수혁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계평량이 주위를 둘러보며 답했다.
“나는 남궁…… 아니, 조강민을 찾아야겠다. 십이 조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구나.”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하마!”
계평량이 경공을 펼쳐 달려가자, 팽수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 뒷모습을 보았다.
“십이 조면…… 남궁천이 속한 조였지, 아마?”
* * *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송원교가 허탈한 표정으로 눈앞에 치솟은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저 절벽은 반시진 전에도 기어오르지 않았던가?
벌써 이러길 두 차례다.
절벽 위에 다다라 숲을 헤매다 보니 다시 절벽 아래로 내려왔다.
물론 앞서간 남궁천은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진법인 것 같아요.”
백리향의 말에 송원교가 턱을 괴며 대꾸했다.
“하면 그 진법을 남궁천이 설치했을 리는 없을 테고. 혈우림이 설치한 건가?”
“그렇겠죠. 어쩌면 남궁천이 혈우림에 잡혀갔을 수도 있겠어요.”
“아니면 어딘가에서 우리처럼 헤매고 있거나.”
송원교가 대꾸하면서 넌지시 조강민의 눈치를 살폈다.
항상 해맑게 웃던 조강민이 더 이상 미소 짓지 않고 있다.
조강민의 목소리에서 분기가 느껴진다.
“뭐가 됐든 우린 남궁천을 찾아야 합니다. 토막을 내든, 포를 뜨든. 껍질을 벗기든. 물고기부터 잡아야 요리도 할 것 아니겠습니까? 후배님들.”
“조 선배의 말이 맞소.”
“그럼 병신같이 맞장구만 칠 게 아니라 방법을 강구해야지요?”
“끄음. 남궁천을 찾을 방법이…….”
그때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뭐야? 아직도 날 찾고 있었어?”
순간 모두가 멈칫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풀숲을 헤치며 태연히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남궁천.
그제야 조강민의 안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이렇게 무단이탈하시면 곤란합니다, 후배님. 교관님들께 혼난다고요.”
“그러게 먼저 돌아가라니까. 그랬으면 지금쯤 개고생 좀 했을 텐데 아쉽네.”
남궁천이 저도 모르게 진심을 말해 버렸다.
내가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다.
거짓말을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