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누구신데 다 처드셨어요?
귀왕이 뺨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앞의 애송이를 노려보았다.
당장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처음 발견했을 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격에 쳐 죽이려고 했다.
한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일단 놔뒀다.
그냥 죽이기에는 이 황당무계한 당돌함이 너무나 궁금했기에.
도통 남의 것을 탈취했으면 십리 밖으로 달아나도 시원찮을 판에 그 자리에 앉아서 홀라당 까먹고 운기까지 해?
간도 크지.
도대체 머리가 어떻게 된 놈일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다.
“이야, 이렇게 보니 반갑네. 정말!”
솜털 보송보송한 도련님이 맑디맑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 웃음이 어찌나 해맑은지 절로 따라 웃을 지경이다.
물론 그 웃음의 성질은 전혀 다르지만.
그런데 이어진 말은 그 웃음마저도 쑥 들어가게 만들었다.
“돼지 새끼, 되게 늙었네?”
“뭐…… 이런…….”
귀왕의 뺨이 부르르 떨린다.
그에 따라 기다란 칼자국도 춤을 추듯 파들거린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화도 쉽게 안 나는 법이다.
지금이 딱 그렇다.
대갈통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뭐?
돼지 새끼, 되게 늙었네?
뭐지? 미친놈인가?
귀왕이 손을 들어 까딱거리자 뒤에 서 있던 수하 하나가 냉큼 다가왔다.
“이 미친 도련님이 방금 뭐라고 했지?”
“저어, 그게…… 돼, 돼지 새끼, 되게 늙었다고…….”
따악!
귀왕이 수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수하가 억울한 듯 바라보자 귀왕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도 들었어, 이 새끼야.”
그럼 왜 물었냐는 듯 바라보는 수하를 무시한 채 귀왕이 남궁천을 빤히 쏘아보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천은 여전히 반가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가볍게 놀렸다.
“그 성질머리는 역시 똑같구나.”
“하! 너 이 새끼……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냐!”
결국 귀왕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여기저기서 굴러먹다 왔지. 하긴, 날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한가?”
“이런 미친놈이 따박따박 말대꾸를! 아니지, 일단 네놈이 거기 담긴 영단을 처먹은 것이냐?”
“내가 먹었어.”
“…….”
귀왕은 물론 옆의 수하들도 멍한 표정이다.
너무 당돌하다.
당돌하다 못해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대꾸한다.
게다가 시종일관 하대를.
진짜 미친놈인가?
“왜 먹었어?”
귀왕은 물어보면서도 참 멍청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묻는 게 왜 먹었냐니?
이래서야 마치 사탕 빼앗긴 아이가 ‘내 거 왜 먹었어!’ 하고 앙탈부리는 꼴 같지 않나?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 특유의 당연한 태도로 대꾸했다.
“내 거 내가 먹는데 이유가 무슨 상관?”
“네 것?”
“그래, 내 거.”
“그게 왜 네 것?”
“너희들 주인이 누구지?”
“우린…….”
가만, 왜 내가 이런 대답을 하고 앉아 있지?
귀왕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버럭 소리쳤다.
“이 애송이 새끼가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지금 뭘 잘했다고 목숨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스르릉!
찰나 남궁천이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벽라검을 뽑더니 귀왕의 목 언저리에 들이밀었다.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
그 일련의 동작이 무척 매끄럽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확실히 공력이 늘어나니 모든 움직임이 가벼워지는군.’
남궁천이 흡족한 표정을 짓는 사이에 귀왕의 수하들이 화들짝 놀라며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뭐, 뭐야? 이 새끼!”
차차차앙!
“너, 이 새끼! 무기 안 버려?”
“당장 물러서지 못해!”
비교적 조용하던 실내가 살기와 고함 소리로 어우러지며 한바탕 격랑이 휘몰아쳤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얼마짜린데 버려? 그럴 순 없지.”
팽팽한 대치 상태.
남궁천이 말을 덧붙였다.
“너희들이 한꺼번에 덤비면 나 하나쯤은 어찌할 수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나도 여기 늙은 돼지 새끼의 멱 정도는 딸 수 있다.”
명백한 협박에 수하들도 더 이상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귀왕이 눈을 날카롭게 치뜬 채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너, 이 새끼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귀왕채잖아. 그 정도는 알아.”
“……!”
귀왕은 물론 수하들마저 놀란 표정.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 토벌대는 어쩌고?”
“네놈 토벌대 일원이냐?”
“쉿. 질문은 내가.”
“토벌대라면 지금쯤 혈우림과 싸우고 있을 거다.”
“그럼 너희들은 혈우림이 아니란 소린가?”
“아니다. 네놈이 말하지 않았느냐? 우린 귀왕채다. 네놈, 어떻게 우릴 아는…….”
짜악!
“헉! 채주!”
수하들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검의 옆면으로 귀왕의 뺨을 후려친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자, 자. 호들갑 금지. 귀싸대기 한 대 처맞았다고 안 뒈지니까.”
“저, 저 미친놈이……! 남의 걸 처먹은 것도 모자라서 채주님의 귀싸대기를……!”
“아, 글쎄.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다시 묻지. 너희들 주인이 누구야?”
수하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는 사이, 귀왕이 남궁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혹, 그분과 아는 사이더냐?”
“뭐, 그렇지.”
“그분은 어찌 지내고 계신가?”
음?
이것들 설마 내가 죽은 것도 모르는 건가?
남궁천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대살성이 죽었다는 소식도 못 들은 거냐?”
“……!”
귀왕이 흠칫거리더니 눈을 부릅뜬다.
뒤에 선 수하들도 마찬가지.
이 정도로 충격받은 표정인 걸 보면 정말 몰랐던 모양이다.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속세와 담을 쌓고 사는 수도승이 따로 없군.
귀왕이 두 눈에 힘을 주며 묻는다.
“그 말이 사실이냐? 정말 대살성께서 운명을 달리하셨단 말이냐?”
“그래. 소문이 자자한데 그간 골방에 처박혀 면벽수련이라도 한 거야?”
“커흠! 나름 사정이 있었다. 그나저나 대살성이 돌아가시다니…….”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눈치다.
다른 수하들도 흔들리는 표정이 역력하다.
이놈들, 그래도 한때 정을 나눴다고 슬프긴 한 모양이다.
그래, 이것들아. 내 너희들에게 때론 모질게 굴긴 했어도 우리에겐 그 무엇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의리가 있…….
“크하하하! 그 대살성 새끼가 마침내 뒈지다니!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우린 드디어 자유입니다! 아오, 그간 눈치 보며 지낸 걸 생각하면…….”
“오늘 밤 축하주라도 한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젠 안가 관리도 때려치웁시다! 그놈이 남긴 영단이나 먹고…… 아, 영단은 벌써 저 새끼가 처먹었지.”
그제야 귀왕을 비롯한 수하들이 다시 남궁천을 본다.
남궁천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 새끼들. 그래도 의리는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뒈진 걸 자축해?
짜악!
남궁천이 다시 검의 옆면으로 귀왕의 뺨을 후려쳤다.
“크윽! 이런 썅! 왜 자꾸 따귀를……!”
“기분 나빠서.”
짜아악!
“크윽!”
“채, 채주!”
그제야 수하들도 살기를 무럭무럭 피워 올리며 견제한다.
남궁천이 연거푸 귀왕의 따귀를 때린 후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어 보자. 그자가 너희들한테 뭘 그리 잘못했냐?”
“흥! 네놈이 대살성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우리가 얼마나 억압당했는지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뭐, 네놈도 그놈이 숨겨둔 영단까지 훔쳐 먹은 걸 보면 좋은 관계는 아닐 테지?”
“흐음. 내 아버지야.”
“흐흐. 그럴 줄 알았다. 그놈에게 원수 같은 자식이 있을…… 어엉? 뭐라고?”
신나게 씨불이던 귀왕이 입을 쩍 벌렸다.
뭐, 놀랄 만도 하겠지.
정작 나조차도 내게 이렇게 장성한 아들이 있을 줄 몰랐으니.
귀왕이 잠시 멍청한 표정을 유지하다가 이내 박장대소했다.
“크하하하! 애송이가 제법 농을 칠 줄도 아는구나! 대살성에게 자식이 없다는 걸 우리가 모를 줄…….”
“모르겠지. 나도 최근에야 알았으니까.”
“미친 소리 작작해라! 갑자기 웬……!”
“그 뺨에 새겨진 검상. 자작나무 아래에서 아버지를 협공하다가 단검에 베인 상처지? 그것도 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으로.”
“그, 그걸 어떻게……?”
“안가 주변에 진법 설치하는 데 얼쩡거리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적도 있고.”
“그, 그걸 어떻게……?”
“네놈이 익힌 독자무공인 삼양철패공(三陽鐵牌功)의 단점을 지적해 준 것도 잊지 않았겠지?”
“그, 그건 또 어떻게……?”
“야, 다른 반응 없어? 예나 지금이나 어휘력이 짧은 새끼네, 이거.”
“시, 시끄럽고! 정말 네가 대살성의 자식이란 말이냐?”
“그렇다니까. 다시 말해 너희들의 새로운 주인이라고 할 수 있지.”
“그건 뭔 개소리?”
짜악!
“크읍! 이런 썩을 놈이……!”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귀왕이 욕지거리를 뱉어내자마자 남궁천이 말을 이어갔다.
“질문. 왕이 죽으면 그다음 왕은 신하가 되냐? 왕의 아들이 되냐?”
“왕의 아들이지.”
“그래, 그럼 너희들의 주인이 죽었으면 그다음 주인은 누구지?”
“주인의 아…… 아아…….”
귀왕이 멍청하게 수긍한다.
다른 수하들도 묘한 설득력에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이 녀석들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나친 단순함.
하긴 이 정도로 단순하니까 의적 놀이를 했을 테지.
안 그러면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의적 행세를 하겠나?
제 배때기에 기름기 채우며 살기도 바쁜 세상 아닌가?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이제 결정할 시간이야. 여기서 한바탕 드잡이를 벌여서 피를 보든지, 아니면 순리에 따라 나를 새 주인으로 깔끔하게 인정하든지.”
“끄응.”
귀왕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침음을 흘린다.
수하들은 그의 눈치만 본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죽는 건 귀왕이 될 테니.
제 목 앞에 시퍼런 칼날이 드리워져 있는데 굳이 모험을 하진 않을 터.
다만 귀왕도 마지막 자존심을 세웠다.
“소협을 따른다면 우리에게 좋을 건 뭐요?”
말투는 바뀌었다.
호칭도 애송이에서 소협으로 발전했다.
좋은 징조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 전에 너희들은 정말 혈우림이 아니냐?”
“그 개 같은 것들은 본 채의 원수요! 소협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본 채의 식구는 원래 마흔 명이 넘었소! 한데 어느 날 혈우림 그 개놈들이 나타나서 본 채를 공격하는 바람에…….”
귀왕이 주먹을 꽉 쥐면서 입술을 피가 나도록 씹었다.
흐음, 그래서 수하들이 저들밖에 없었던 건가?
“그럼 너희 여섯 명이 전부란 말이냐?”
“그렇소. 다들 혈우림에 당했소. 산채 역시 혈우림이 장악해서 우리만 겨우 이곳으로 대피해 지내는 중이오. 오늘은 혈우림 동태나 살피러 갔다가 토벌대를 본 거고.”
“그렇군. 이대로면 무림맹이 너희들도 소탕하려고 들 텐데.”
“어째서? 우리도 혈우림에 피해를 입었는데!”
“무림맹 입장에서는 좀도둑이나 대도둑이나 똑같은 도둑놈이니까.”
“그런……!”
“하지만 너희들이 날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도 있고.”
“정말이오?”
“물론. 그리고 이거.”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오색풍마상을 던졌다.
귀왕이 멍한 표정으로 받아보자 남궁천이 검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그걸 팔면 제법 돈이 될 거다. 무한에서 반장(飯庄: 식당) 하나 정도는 차릴 수 있을 거야. 거기서 새 출발하도록.”
“이 귀한 걸…… 정말 괜찮으십니까?”
귀왕채 녀석들의 얼굴에 감격이 서린다.
위기에서 건져주는 것도 모자라 기물까지 성큼 건넸으니 눈물이 줄줄 흐를 만도 하겠지.
내가 이렇게 자비심이 넘치고 인정이 많다.
마침내 귀왕채 무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소협을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좋아. 그럼 가자.”
“예, 주군!”
“참, 반장에서 수익이 발생하면 매달 수익의 오 할을 상납금으로 바치도록.”
“명심하……! 예?”
“왜? 설마 날로 먹으려고 했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오 할은 너무 폭리…….”
“뭐라고? 토벌대와 한바탕 놀고 싶다고? 에이, 참아라. 그러다 뒈진다. 사람이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끄응. 알…… 겠습니다.”
귀왕이 애써 웃음 짓는다.
이처럼 수하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그런데 잠깐…….
“방금 산채를 혈우림에게 빼앗겼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만…….”
“산채가 분명 라전현 쪽에서 가까웠지?”
“역시 잘 아시는군요.”
남궁천이 턱을 긁적이며 생각했다.
오호, 그럼 생도들이 좆 됐다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