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7화 (17/508)

17. 누구신데 다 처드셨어요?

스슥. 사사삭!

수풀이 흔들린다.

후웅.

바람에 수풀이 눕는다.

찰나 시커먼 그림자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얼핏 산짐승처럼 보이기도 하고, 들쥐 떼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운산 중턱까지 오른 그림자들은 자욱한 운무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어느 순간 그림자들이 각각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정해진 조에 따라 이동한 것이다.

남궁천 역시 안갯속에 파묻힌 채 수풀 사이로 빠르게 이동했다.

남궁천은 십이(十二)조에 속했다.

조장은 공교롭게도 삼년생 조강민.

같은 조에는 곽철주와 송원교, 백리향도 포함되어 있다.

그 외에도 다수의 삼년생과 이년생을 합해 총 열 명으로 구성되었다.

하필이면 남궁천을 씹어 먹지 못해 안달 난 자들과 한 조다.

‘당연히 우연이 아닐 테지.’

남궁천은 운무를 헤치며 나아가는 생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조강민 정도의 후기지수라면 교관들에게 어떤 요구든 당당히 할 수 있으리라.

그가 송원교의 배후로 짐작되는 만큼 처음부터 예정된 조 편성일 것이다.

이놈들이 어떤 작당을 모의한 것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어떻게든 몸을 빼내 안가부터 찾아가야 한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자욱한 안개 때문에 사위 구분이 안 된다.

바로 앞에서 이동하는 생도의 등도 희미하게 보일 정도.

그런데 점점 주변 기척이 잠잠해져간다.

경로 이탈이다.

‘음? 어째 이거 슬슬 수작을 부리는 것 같은데?’

오히려 잘 됐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떨어지면 독단 행동을 하기가 더 수월해질 테니.

마침 앞서가던 조강민이 우뚝 멈춰 서더니 주먹을 들어 올린다.

모두들 걸음을 멈추고는 기운을 날카롭게 다듬는다.

온갖 신중한 척을 다 한 조강민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쯤이면 적당한 것 같은데. 여기서 놀아볼까요?”

왠지 들뜬 표정이다.

의미가 모호한 그 말을 송원교가 대번 이해했는지 야비한 웃음을 떠올린다.

“선배 조장의 말에 따르겠소.”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왔군요.”

백리향이 환한 미소를 그리며 대꾸했다.

다른 생도들 역시 어딘지 음침한 미소를 지은 채 본색을 드러낸다.

송원교가 입매를 한껏 비틀며 몸을 돌렸다.

“어이, 남궁천. 그동안 잘도 설쳤겠다. 오늘이야말로 네 제삿……? 응? 남궁천?”

말을 하다 말고 송원교가 당황해서 두리번거렸다.

조강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죠?”

“남, 남궁천이…….”

“……?”

“없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강민이 짜증스럽게 대꾸하고는 일순 사방으로 공력을 발출했다.

후우우웅!

기풍이 사방으로 불어나가자 자욱했던 운무가 멀찍이 퍼져 나갔다.

“어? 정말 없잖아?”

“이 쥐새끼가 어딜 간 거지?”

삼년생 생도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백리향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혹시 벌써 눈치채고 도망간 걸까요?”

“그렇다곤 해도…….”

조강민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흐렸다.

자신이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벗어나다니.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네, 남궁천!’

이내 조강민이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멀리 못 갔을 겁니다. 찾아보죠.”

생도들이 재빨리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 *

남궁천은 경공을 펼쳐 재빨리 절벽을 올랐다.

단숨에 절벽 끝까지 도달…… 해야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성기 때의 이야기.

절벽 중턱쯤에서 힘이 빠진 남궁천은 튀어나온 돌부리를 붙들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아…… 역시 아직 한참 멀었네.’

그래도 이만하면 또래 중에서도 상당한 경공 실력을 보유한 셈이다.

남궁천은 무공의 근본이 경공에 있다고 믿었다.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는 상관없다.

실제로 도망자 시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어디로든 빨리 튈 수 있는 경공술이었으니까.

때문에 환생하자마자 가장 신경 써서 익힌 것도 경공이었다.

절벽을 한참 기어 올라가다 보니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호오, 벌써 따라온 건가? 제법일세.’

아니나 다를까, 절벽 아래쪽에서 백리향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울렸다.

“앗! 저기예요!”

“뭐야? 언제 저길 기어 올라간 거야? 이봐, 남궁천! 어딜 가는 거야?”

송원교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절벽을 마저 올라갔다.

마침내 끝까지 올라선 남궁천이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강민 일당 역시 절벽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밟아주겠다고 작정한 모양이다.

‘참나, 나 하나 괴롭히려고 참 애쓴다. 애써.’

문득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어지간한 정성이 필요하겠단 생각이 든다.

물론 병신 같은 지극정성이지만.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해? 너희들이 맡은 임무에나 충실할 것이지.”

남궁천이 비아냥거리자 송원교가 절벽을 기어오르면서 바락바락 대꾸한다.

“네놈이야말로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대열에서 이탈하다니! 제정신이냐? 네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이런 독단적인 행동이 용납될 줄 알아? 우린 대열에서 이탈한 널 찾으러 온 것일 뿐이야!”

“난 잠시 볼일을 보고 올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마저 해. 피해 안 가도록 잘 처신해줄 테니.”

“말이 되는 소릴 해!”

거참, 따라와 봐야 개고생만 할 텐데.

아무래도 끝까지 쫓아올 작정인 것 같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돌아섰다.

뭐, 알아서 하라지.

원래 사람이란 게 어지간해서는 좋은 말로 조언해도 알아들어 처먹질 못하는 법이다.

직접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병신 같은 짓을 했는지 후회하게 되지.

남궁천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욕지거리를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제부턴 신중해야 한다.

눈앞에 펼쳐진 숲.

하나 평범한 숲이 아니다.

여기엔 각종 진법과 첨단 기관장치…… 까진 아니고.

뭐, 각종 진법은 진짜 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사실을 추가하자면 전생에 도망자로 살던 이력 때문에 남궁천은 온갖 진법에도 해박하다.

누군가를 피해 숨거나 따돌리기 위해 진법처럼 유용한 것도 없으니까.

일부러 기문둔갑에 뛰어난 제갈문을 찾아가서 신분을 속이고 배웠을 정도다.

물론 나중에 남궁천의 진짜 정체를 깨달은 제갈문이 당장에라도 죽이겠다며 노발대발했지만, 그땐 이미 남궁천이 유유히 떠난 후였다.

‘그러고 보면 제갈세가 녀석들도 그렇게 똑똑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조상 중에 천재가 있었다고 그 자식들이 하나같이 천재라는 보장은 없지.

다들 조상의 명성에 해가 되지 않도록 천재인 척 발버둥치는 걸지도.

그러고 보면 참 사람이란 뭔가에 스스로 얽매여 자유롭지 않은 걸 즐기는 존재다.

아, 갑자기 또 깊은 깨달음.

나는 어째서 이토록 통찰력이 깊은가?

남궁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아무렇게나 막 내딛는 것 같지만 정확한 보법에 따른 것이다.

만약 자칫 잘못하다간 다시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도 있고, 하루 종일 제자리를 맴돌 수도 있다.

암기가 발사된다거나 함정에 빠져 창살에 찔려 죽도록 기관 장치를 설치해도 좋았겠지만,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인간적이다.

물론 눈치 빠른 귀왕채 녀석들은 돈이 많이 들어서 못한 것 아니냐고 따져댔지만, 분명 내 마음속 어딘가에는 인간적인 면모가 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반각 정도를 이동하자 마침내 생로(生路)가 나타났다.

양쪽으로 단풍나무가 예쁘게 우거진 곳.

누구라도 발길이 닿을 수밖에 없는 정면 길을 놔두고 남궁천은 단풍나무 옆의 샛길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대번 주변 풍광이 달라졌다.

쏴아아아아아!

절벽 한쪽으로 폭포수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린다.

정면에는 모옥 한 채가 그림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절벽 아래에 넝쿨과 어우러진 모옥은 얼핏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은밀해 보인다.

남궁천의 입이 씨익 말려 올라갔다.

“오랜만이구나! 내 집!”

이제부턴 딱히 조심할 것도 없다.

남궁천이 허름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낡은 침상 하나와 탁자, 그리고 수납장이 보였다.

실내가 비교적 넓지만 살림살이는 단출하다.

거의 잠만 자고 무공만 수련한 탓이다.

“호오, 의외로 깔끔. 이 녀석들, 최근까지 관리를 해준 건가?”

생각보다 성실한 녀석들이다.

남궁천이 침상을 옆으로 밀어내고 밑바닥 판자까지 뜯어내자 어른 몸통만 한 상자가 나타났다.

“있다!”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상자 덮개를 열어보니 다섯 빛깔의 말 조각상과 은은한 약향이 풍겨져 나오는 목함이 보인다.

“오오, 그대로구나! 내 새끼들! 흐흐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오색풍마상(五色風馬像)과 구룡철심단(九龍鐵心丹)!

목함 덮개를 열어보니 향긋한 약향이 실내를 가득 채운다.

아, 얼마 만에 맡아보는 그리운 냄새인가?

사실 구룡철심단은 무림공적 중 한 명인 천독노(千毒老)가 제조한 영단인데, 남궁천이 몰래 훔쳐둔 것이었다.

천독노 말에 의하면 소림의 대환단 수준이라지만, 솔직히 남궁천 생각에는 그보단 한참 못 미쳤다.

대환단에 비하면 칠 할 정도?

그래도 그게 어딘가?

대환단 한 알로 반 갑자 이상의 내공을 취할 수 있다면, 구룡철심단은 대략 이십 년 치의 내공을 얻는 셈.

수십 년 전부터 영단 바람이 불어서 요즘이야 개나 소나 영단 먹는 시대라지만, 한 번에 십 년 치 이상 내공을 얻을 수 있는 영단은 여전히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뭐, 소림과 당가는 제외하고지만.’

어쨌거나 면벽수련을 이십 년은 족히 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이 눈앞에 떡하니 놓인 셈이니 가슴이 뛸 수밖에.

이것만 제대로 소화해도 절정고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으리라.

다만 초견파공안이 무적의 재능은 아니기에 더 강해질 또 다른 방법도 필요할 것이다.

초절정고수와 맞닥뜨리게 되면 초견파공안만으로는 이기기 어려운 경우도 생긴다.

전생에 맹주를 죽일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것도 그 이유다.

어지간히 비슷한 수준은 될 수 있으나, 완숙한 경지에 이른 자를 뛰어넘지는 못하는 것.

그게 바로 초견파공안의 맹점이다.

평생을 하나의 무공만 갈고닦은 자는 그 무공의 진의도 깨우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도 나만의 무공이 필요하단 얘긴데…….’

전생에는 도망 다니느라 바빠서 무공을 제대로 익히거나 창안 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그때그때 초견파공안을 이용해 임기응변으로 대신할 수밖에.

어차피 도주가 목적이었으니 그 정도만으로도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몸 상태가 더 좋아지면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게 딱 맞는 무공을 연구해야겠다.

알고 보면 내가 이렇게 진취적이다.

‘자, 그럼 가볼까?’

남궁천은 영단을 들고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냥 여기서 먹을까?’

어차피 복용할 거라면 여기보다 나은 곳도 없을 것 같다.

학관에 돌아갈 때까지 이 귀한 영단을 품고 있으면 냄새가 솔솔 풍길 테니 날파리 같은 새끼들이 꼬일 거다.

혹여나 귀왕채 녀석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테니 문제가 좀 되겠지만, 아마 지금쯤 토벌대를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을 터.

오늘 중으로 녀석들이 이곳에 올 리는 없다.

좋아, 여기서 복용하자.

결정을 내린 남궁천이 가부좌를 틀고 앉자마자 구룡철심단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단환을 우적우적 씹고 나자 배 속에서부터 대번 묵직한 기운이 느껴진다.

구우우우우.

좋아. 딱 이 느낌이야.

단전에서부터 솟구쳐 오른 기운이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확실히 거칠다.

천독노가 만든 영단은 대환단이나 소환단처럼 부드럽지 않다.

전신 십이경맥을 마치 제집 안마당인 것처럼 뛰어다니며 마구 설친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아홉 가지 경맥은 신경 써야 한다.

그래서 구룡철심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나?

어쨌거나 이 다루기 힘든 망아지를 제대로 길들이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크읏!’

순간 백회혈에 다다른 거센 기운이 정수리에서 꽝! 폭음을 울린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천독노를 닮아서 성질이 더럽다니까.’

하나 남궁세가의 창궁대연신공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심법이다.

게다가 제 어미의 무재를 이어받아서인지 몸이 생각 이상으로 잘 버텨주고 있다.

남궁천이 주먹을 꾹 말아 쥔 채로 운기를 계속 이어갔다.

* * *

얼마나 흘렀을까?

꽤 오랫동안 운기에 집중을 했더니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슈우우우우.

‘끝났군.’

단환에서 얻은 공력을 단전으로 잘 갈무리한 남궁천이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음?”

순간 남궁천이 미간을 좁히고 앞에 마주 앉은 사내를 멀뚱멀뚱 보았다.

까칠한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인.

뺨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검상은 그렇잖아도 고약한 인상을 한층 더 무섭게 만들고 있었다.

귀…… 왕?

생각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귀왕이 험상궂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으르렁거렸다.

“거, 누구신데 남의 걸 함부로 처드셨어요? 어엉?”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