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6화 (16/508)

16. 사람은 긍정적이어야 한다.

사두마차를 탄 남궁천은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며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저만치 대별산 자락이 보인다.

이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초가을 경치를 감상하는 날이 오다니.

정말이지 감회가 새롭다.

이래서 사람은 환생하고 볼 일이다.

전생엔 하루 종일 쫓겨 다니느라 경치고 나발이고 눈 돌릴 틈이 없었다.

잠깐 한눈을 팔다간 모가지가 땅바닥을 구르고 있을 테니 두 눈이 시뻘게지도록 부릅뜨고 인간들만 살필 수밖에.

하지만 지금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깨면 실바람을 맞으며 풍경 감상하고.

“참 좋다.”

남궁천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마주 앉은 송원교와 백리향이 영 불편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남궁천은 참 좋을지 어떨지 몰라도 두 사람에게는 이보다 최악일 수도 없었다.

‘저 빌어먹을 자식!’

송원교는 내심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남궁천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백리향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한데 저놈이 끼어드는 바람에……!’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

애초에 학관에서는 생도들을 통솔해서 이동하지 않았다.

대신 각자가 알아서 집합 장소인 라전현까지 오도록 했다.

떼로 몰려다니면 적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이유였지만, 남궁천은 전혀 납득하지 않았다.

‘다 돈 아끼려고 지랄하는 거지. 하여튼 정파 놈들은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학비를 얼마나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때마저 경비를 생도들의 사비로 충당하게 하다니.

이게 사두마차가 굴러다니는 요즘 시절에 말이나 되는 소린가?

어쨌거나 그러한 이유로 남궁천은 송원교의 호화마차를 얻어 타게 된 것이다.

물론 송원교가 먼저 태워준 것은 절대 아니다.

남궁천이 마차에 함께 타겠다고 했을 땐 질색을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공식 호구에게 얻어터진 전력을 묻어주겠다는 혜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남궁천은 편안한 여정을 시작했고, 송원교와 백리향은 시종 좌불안석인 상태.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백리향이 송원교에게 말을 건넸다.

마치 남궁천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송 공자. 라전현이면 대별산 지맥에서도 다운산이 있는 곳인데…… 힘든 싸움이 되지 않을까요?”

“아마 그럴 거요. 다운산(多雲山)은 그 이름처럼 운무가 항시 끼어 있는 곳이라 사위 분간이 어렵소. 산세도 험해서 예로부터 요충지였지. 한마디로 적들이 몸을 숨기거나 매복하기에도 좋단 뜻이오.”

“적들은 납치와 인신매매를 일삼는 악질이라던데. 어떤 조직일까요?”

“나도 거기까진 모르겠소. 아마 라전현에 도착하면 자세한 걸 들을 수 있을 거요. 하나 소저는 너무 걱정 마시오. 위급할 시에는 이 송 모가 반드시 소저의 힘이 되어 주겠소.”

“푸웁!”

순간 남궁천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입에 물고 있던 육포 찌꺼기가 튀었다.

송원교와 백리향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정말 너무하군! 더럽게 이 무슨 무례인가?”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서.”

“뭐가 그렇게 웃긴단 거냐!”

“아…… 뭐 여러 가지로. 옛 생각을 하다 보니.”

“쳇!”

송원교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팔짱만 끼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드잡이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비무에서 호되게 당한 탓에 그럴 만한 용기까진 나지 않았다.

백리향 역시 그 사건이 있었던 날 이후로 남궁천을 쉽게 대하지 못했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엔 남궁천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그놈들이 누군지 알려줄까?”

“네가 그걸 안단 말이냐?”

“아주 잘 알지.”

이래 봬도 전생에 도망자로 살면서 온갖 나쁜 놈들은 다 만나봤으니까.

송원교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물었다.

“누군데?”

“귀왕채.”

“귀왕…… 채?”

송원교가 백리향을 힐끗 보니,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모른다는 눈치.

송원교가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네가 그들을 어떻게 알고?”

“뭐, 그것까진 알 것 없고.”

남궁천이 대충 대답하고는 몸을 등받이에 묻었다.

사실 전생에 귀왕채에 몸을 잠시 의탁한 적이 있다.

뭐, 좋게 말해서 의탁이고, 솔직히 반강제로 굴복시켜 한동안 군림했었다고 봐야겠지.

귀왕의 뺨에 새겨진 기다란 검상은 자신이 친히 만들어준 것이다.

당시 놈들은 나름 의적 행세를 했는데, 대략 마흔 명의 인원이 다운산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나저나 도망 다니느라 바빠서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무림맹이 토벌대를 꾸려야 할 정도로 커버린 건가?’

의적이든 뭐든 무림맹 눈에는 그저 사라져야 할 좀도둑으로만 보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녀석들 소식을 들은 게 삼 년 전이니까 정말 급성장한 모양이다.

그놈들에게 안가를 이따금씩 관리해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세월이 흐르면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 법이니까.

어쩌면 의적놀이는 진작 때려치우고 정말로 사람을 납치하면서 온갖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르지.

이번에 갔을 때 약속대로 안가를 잘 관리해줬다면, 기회 봐서 안면 있는 몇 놈 정도는 구해줄 생각도 있다.

그게 아니면…… 무림맹이 알아서 다 죽여줄 테고.

잠시 옛 기억을 더듬는데, 송원교가 코웃음을 쳤다.

“흥, 보나마나 그놈들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나 보군. 그걸 자랑이라고 떠드는 건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내가 당했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럼 네가 귀왕채를 혼내주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런 셈이지.”

“허풍도 지나치면 병이다. 설마 귀왕채도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은 아니겠지?”

이렇다.

대게 수컷들의 본능은 이처럼 어리석다.

공작새가 위험을 무릅쓰고 암컷 앞에서 화려한 날개를 과시하듯.

지금 이 녀석은 옆에 앉은 백리향을 의식해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에 목숨을 걸고 있다.

이 얼마나 가련한가?

하나 나는 공작의 날개를 보고 달려드는 거친 짐승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마음을 품은 대인배 인간이지.

잠시 녀석의 말버릇을 고쳐줄까도 생각했지만 대인배라 그만두었다.

마침 라전현으로 마차가 들어서자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다.

이제부터는 걸어서 무림맹 지부로 가야 한다.

문이 열리자 윤종승이 땀범벅이 되어 헐떡거리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윤종승은 여기까지 경공을 펼치며 따라온 것이다.

그는 확실히 용천관 공식 호구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송원교와 백리향은 남궁천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자, 윤종승에게 더욱 악랄해진 듯했다.

송원교가 헐떡이는 윤종승에게 짜증을 냈다.

“뭐 하고 있어?”

윤종승이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그 자리에 엎드렸다.

송원교가 차갑게 비웃고는 윤종승의 등을 밟고 내렸다.

백리향도 내리고 나서야 윤종승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를 악다문 표정에는 오기를 넘어 독기마저 느껴졌다.

남궁천이 그런 윤종승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인과응보지.’

이윽고 남궁천이 내리자 윤종승이 바짝 다가오더니 팔을 꽉 붙들었다.

남궁천이 뭐냐는 듯 바라보자, 윤종승이 울분엔 찬 음성을 쥐어짰다.

“진짜지?”

“뭐가?”

“지옥을 겪으면 확실히 강해진다고 한 말! 진짜겠지? 아니, 진짜여야 한다. 진짜가 아니면…….”

이놈 보게.

지옥을 겪다 보니 정신이 출가했나?

“아니면?”

“절대로…… 안 참는다. 절대로! 그땐 반드시 네놈을……!”

“봐라. 나한테 몇 대 처맞고 빌빌대던 네가 지금 감히 내 팔을 붙들고 살기를 쏟아내기 직전이야.”

“…….”

“벌써 대단한 발전이지 않냐? 너보다 강한 존재 앞에서 이렇게 독기를 품는 것 자체가 이미 강해졌다는 증거지. 그 감정을 잘 기억해.”

“……!”

“포기가 아니라, 독기를 유지해. 그럼 그게 힘의 원천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아, 이걸 내가 천이에게 가르쳤어야 하는 건데.”

“뭐?”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윤종승이 이맛살을 구겼다.

따악!

남궁천이 윤종승의 뒤통수를 차지게 후려쳤다.

“큭! 이런 씨, 뭐야!”

“대드냐? 눈깔에 힘 안 풀어? 독기도 삐끗하면 포기가 되는 거야. 구분 잘해라.”

“에이 썅! 어쩌란 거야?”

따악!

“크윽!”

“야이 새끼야. 그게 그렇게 쉬우면 인생이겠냐? 뭐든 한끗 차이지. 결국 눈치라고. 알았어?”

“도대체 뭔 개소리를……!”

따악!

“으윽!”

“매사에 진중하면 개소리에서도 철학이 들리는 법이다.”

“……칫!”

마침내 윤종승이 더는 대들지 않고 혀만 찼다.

이제야 눈치가 좀 생긴 모양이다.

그나저나 개소리에서도 철학이라니.

되게 막말 같은데도 뭔가 있어 보이는데?

내가 이렇게 말도 잘한다.

‘그나저나 토벌 대상이 정말 귀왕채라는 걸 확인하면 송씨 놈이 또 놀라 자빠지겠군.’

* * *

“토벌 대상은 ‘혈우림’이라는 조직이다.”

응?

남궁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혈우림? 그건 또 뭐지?

처음 듣는다.

분명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대별산 지맥의 다운산이라면 귀왕채였는데?

이것들이 그새 이름을 바꿨나?

하긴 귀왕채라는 호칭이 좀 촌스럽긴 하지.

힐끔 돌아보니 송원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매를 비튼다.

아마도 자신이 허풍을 쳤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하아, 저 얄미운 표정 좀 봐라.

저 눈깔을 그냥 콱!

아니지, 지금은 참자.

성실한 마음으로 차곡차곡 적립만 해두는 거다.

남궁천이 잠시 잊었던 성실함을 되새기는 사이 계평량이 설명을 이어갔다.

“내일 새벽, 산 반대편인 금채현에서 무림맹 정예조직이 선공에 나설 것이다. 너희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할 테니 너무 긴장 말고 지시에 잘 따르도록.”

즉, 혈우림의 본진은 반대쪽 산기슭에서 접근하기 더 쉽다는 뜻이다.

아닌데?

귀왕채는 여기서 더 가까웠는데?

설마 이것들이 산채도 옮겼나?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이곳에 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안가에 들려 영단을 취하고 기물을 팔아 넉넉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귀왕채든 혈우림이든 내 것만 챙기면 그만이다.

삶에 여유가 생기니 내가 남 걱정을 다하는구나.

나도 알고 보면 이렇게 마음이 넓다.

하지만 요즘은 마음 넓은 사람이 손해 보는 세상 아니던가?

어서 좁히자, 마음을.

* * *

다음 날 아침, 다운산 기슭.

교관들의 통솔 하에 운집한 용천관 생도들.

저마다의 표정에 잔잔한 긴장감이 흐른다.

어떤 이는 혈기 왕성하여 당장에라도 악을 처단하겠다는 사명감에 똘똘 뭉쳐 있고, 어떤 이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병장기를 꽉 움켜쥔다.

혁혁한 공을 세워 무림맹에 눈도장을 찍겠다는 이도 있고, 용천관 공식 호구를 이참에 확실히 매장해서 위신을 되찾겠다는 이도 있다.

그리고…….

“으흐흐. 영단. 영단. 기다려라, 내 새끼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남궁천도 있다.

그런 남궁천을 유심히 노려보는 시선 중에는 천재 후기지수로 알려진 조강민과 호신위 곽철주도 있다.

생도들을 한 차례 훑어본 교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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