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람은 긍정적이어야 한다
“죽어서 시체로 돌아온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계평량의 말에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잠시 소란이 멈추길 기다린 계평량이 말을 이었다.
“이번엔 그만큼 위험하단 뜻이다. 그리고 실전 임무 중에 사망하더라도 학관과 맹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동의서에 서명해야 한다. 그러니 참가 신청은 신중히 하도록.”
그러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송원교가 입매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떠나는 토벌 원정대 아닙니까? 저희처럼 백도를 추구하는 생도들이 불의를 알고도 목숨이 아까워 불참한다면 무슨 낯으로 고개를 들고 다니겠습니까? 아마 우리 반 생도들은 전원 참여할 겁니다. 다들 그렇지 않은가?”
“물론이오, 송 형!”
“옳은 말이오!”
너도나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나 송원교는 철저히 남궁천을 의식해서 한 말이었다.
만약 남궁천이 대별산 원정대에 불참한다면 조강민이 애써 계획해둔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
지난밤 남궁천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한 후,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조강민에게 복수를 부탁하지 않았던가?
모처럼의 좋은 기회가 허망하게 날아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물론 너희들의 진심은 이해한다. 하지만 생각이 다른 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하는 말이야.”
계평량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남궁천에게 향했다.
마치 ‘너 같은 대살성의 사생아는 당연히 빠지겠지’라고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네놈이 빠지겠느냐?’라고 압박하는 눈빛 같기도 했다.
물론 남궁천은 불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하면 대별산으로 갈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였는데 이런 기회가 저절로 굴러오다니.
오히려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 판이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강호 곳곳에 존재하는 무림공적들이 날 도와주는구나.’
뭐, 송원교의 눈빛을 보면 뭔가 꿍꿍이를 따로 준비한 것 같지만 그딴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 봐야 애들 장난이 아닌가?
칼끝에 목숨 걸어놓고 사선을 넘나들던 전생에 비한다면 저런 애송이들의 빤히 보이는 장난질은 소소한 유희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단 원하는 시기에 딱 기다렸다는 듯이 대별산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이 반가울 따름.
이래서 될 놈은 된다는 말이 있는 거지.
남궁천이 보란 듯 송원교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그 미소가 맘에 들지 않는지 송원교는 냉랭하게 코웃음치고는 외면해 버렸다.
‘쯧쯧. 저렇게 부정적이고 옹졸해서야.’
나 봐라.
대별산에서 저 애송이들이 어떤 작당을 하든지 관대한 자세로 환하게 웃지 않는가?
사람은 늘 이렇게 밝고 긍정적이어야 한다.
* * *
점심시간, 남궁천은 더 없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오늘 점심 요리는 오리백숙이었다.
남궁천에게는 각별한 사연이 있는 요리이기도 했다.
남궁선을 처음 만났을 때 먹은 요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리백숙을 보면 남궁선과의 첫 만남이 떠오르고, 서로 사랑에 빠질 줄도 모른 채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그렇게 서로에게 살검을 들이밀며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 뺨을 길게 베였지.’
남궁천은 문득 떠오른 옛 생각에 저도 모르게 뺨을 손으로 쓰다듬다가 피식 웃었다.
지금은 육신이 바뀌었으니 흉터가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얼굴의 흉터는 지워졌지만 마음의 앙금은 다소 남았다.
‘아, 다시 생각하니 살짝 열받네.’
초면에 그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선 정말 죽기 살기로 살검을 펼쳐올 줄이야.
내가 그렇게 추파를 던져댔는데 싹 무시하고는!
갑자기 부정의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느낀 남궁천은 애써 아픈(?) 기억을 털어내며 오리백숙의 야들야들한 식감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마침 식사하던 생도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딘지 귀여워 보이는 얼굴에 다소 왜소한 몸집의 청년이 큰 체격의 사내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워낙 상반되니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그들은 바로 조강민과 곽철주였다.
몇몇 여생도들은 조강민을 보고선 눈을 반짝이며 술렁거렸다.
대체로 귀엽다거나 멋있다거나 잘 생겼다는 등의 감탄사였다.
남궁천은 ‘귀여우면서 멋진’ 존재가 정말 가능한 것인지 의구심을 품긴 했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뭐,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보고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조강민은 식당을 한 차례 휘이 둘러보더니 창가에 앉은 송원교에게 다가갔다.
“송 형, 밥이 잘 넘어가나 봐요.”
듣기에 따라서 묘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말.
하지만 다른 생도들은 모처럼 등장한 이 어린 천재를 구경하느라 말투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한 사람만 빼고.
“그, 그냥 먹는 거요.”
“에이, 엄청 잘 드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맛있어요? 먹다 죽어도 모를 만큼?”
“아니오. 사실 별로 입맛이 없소.”
송원교가 수저를 내려놓자, 조강민이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에이, 농담이에요. 저도 모처럼 여기 요리를 먹고 싶어서 왔어요. 그럼 마저 드세요.”
그런데 조강민이 서너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어엇!”
느닷없이 균형을 잃은 조강민이 하필이면 남궁천이 있는 쪽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조강민이 중심을 잡으려다가 얼결에 손을 뻗었고, 공교롭게도 남궁천의 등을 쳤다.
퍽!
그 충격에 남궁천이 그대로 요리를 엎으면서 난리가 났다.
와장창!
남궁천의 앞섶은 쏟아진 국물로 흥건하게 젖었고, 그릇에 담겨 있던 요리는 탁자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조강민이 얼른 자세를 바로잡고는 연신 사죄했다.
“아,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새로 익힌 보법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그만 발이 꼬여 버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아,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예……?”
의외의 반응에 조강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 이럴 땐 둘 중 하나다.
자신이 일부러 시비 거는 걸 알지만, 기에 눌려 모른 척 넘어가는 경우.
그게 아니면 시비 거는 줄도 모르는 멍청이.
그런데 이 인간은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내?
게다가 이어지는 말은 더 의미를 모르겠다.
“뭐, 오늘은 긍정적인 날이니까. 사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소리야말로 개소리지. 안 그래? 강호인이 다 아는 진정한 싸움터는 객잔이잖아. 여긴 객잔이 아니지만 뭐 비슷한 느낌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밥 먹을 때 참 잘 건드리는 강호인들이야말로 개만도 못한 건가? 개와 인간의 경계는 늘 어려운 문제야.”
“저어,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나도 개소리한 거라고 생각해라.”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곽철주가 불쑥 나서며 주먹을 뻗어왔다.
“말투!”
쉬이이잇!
정말이지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하지만 놀랍게도 조강민이 먼저 손등으로 그의 주먹을 가볍게 막아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지켜보던 생도들마저 나직이 감탄을 터뜨릴 정도였다.
“철주, 그만해. 비록 내가 학관 선배지만, 이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
이해하고 배려하는 척하지만, 본인이 학관 선배라는 점을 모두가 상기시키도록 지적해주는 저 재치.
훌륭하다. 아주 칭찬해.
나쁜 놈이 될 자질을 잘 갖추고 있다.
저기서 조금만 더 대책 없이 삐딱해지면 무림공적도 가능할 텐데.
아, 보통의 후기지수라면 장래희망이 무림공적은 아닐 테니 쓸데없는 생각인가?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전 무림을 상대한다는 자부심이 다소 지나쳤던 모양이다.
“그래, 무림공적이라는 게 무슨 거창한 별호 같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조강민이 더욱 모를 표정이 되어서 물었다.
“저어,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 별거 아냐. 그냥 개소리의 연장이지. 그보다 네 말대로 내가 인생을 한참이나 더 살았으니 하대를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말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조강민이 활짝 웃었다.
“이제 보니 남궁 형은 참 재미있는 분이었군요.”
“그렇지. 내가 한 재미 한단 소릴 좀 들어.”
“하하.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일은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괜찮아. 대신 엎어진 건 네 책임이니까 뒷정리 좀 부탁해. 그럼 나는 이만.”
남궁천이 시원하게 손을 흔들어주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 뒷모습을 보던 조강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피식 지었다.
‘남궁천. 제법이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구석에서 말없이 지켜보는 이도 있었다.
밥을 먹을 때조차 커다란 대도를 내려놓지 않는 생도, 바로 팽수혁이었다.
* * *
잘 참았다.
남궁천은 스스로를 대견하다는 듯 제 어깨를 다독였다.
살짝 위험할 뻔했다.
하필이면 밥 먹을 때 건드린 것, 그리고 하필이면 남궁선과 추억이 깃든 오리백숙이었던 것, 또 하필이면 오리백숙이 너무 맛있었던 것.
이 삼박자가 딱 맞아 들어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선을 넘을 뻔했다.
그랬다간 아마 지금쯤 피를 보고 있는 건 자신이 되었으리라.
‘그 녀석이 낙양조가 소가주인가?’
윤종승에게 들은 인상착의를 떠올려보면 거의 틀림없다.
‘절정을 앞두고 있겠군.’
놈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견파공안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다만 등 뒤에서 느껴진 찰나의 기운에 몸에 밴 생존본능이 발휘됐다.
일순 등짝에 공력을 집중했고, 몸을 숙이면서 충격을 완화시켰다.
만약 무방비 상태에서 그 일장을 맞았더라면 지금쯤 뼈에 실금이 가서 걷기도 힘들었으리라.
그나마도 작정하고 때린 것이 아니니 실금 정도겠지만.
‘옆에 선 덩치도 절정을 앞둔 것 같고.’
둘이 같이 덤비면 지금은 답이 없겠는데?
송원교의 배후가 그놈들이었나?
하긴. 어디 그놈들뿐일까?
하지만 늘 그랬듯이 나는 이번에도 답을 찾을 것이다.
사면초가에 빠져 죽을 위기를 수시로 넘던 전생에 비하면 이런 건 코딱지 파다가 코피 좀 난 수준에 불과하다.
역시 다시 생각해도 난 참 긍정적이다.
뭐, 가끔 세상을 비난하고, 신에게 쌍욕을 퍼붓거나, 칼 든 놈들이라면 모조리 썰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음, 이건 진짜 대살성 같으니까 취소.
아무튼…….
‘이건 좀 아프네.’
남궁천이 장삼을 벗어 동경에 등을 비춰보았다.
탄탄한 등짝 복판에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인주처럼 새겨져 있었다.
‘아오, 저 시뻘건 것 좀 봐.’
뭐? 보법 생각하느라 발이 꼬여?
제길, 나도 검술 수련하느라 손이 꼬인 척해 버릴 걸 그랬나?
뱃대지에 벽라검 좀 쑤셔 박아주면 그제야 눈물 질질 짜면서 진심 어린 사죄를…….
’아니다. 오늘은 긍정적인 생각.
그래, 잘 참은 거다.
오줌도 모아놓고 싸면 더 시원한 법.
차곡차곡 적립해 두고 한꺼번에 갚아줘야지.
보아라, 내가 이렇게 성실하기까지 하다.
‘그나저나 조강민, 제법이네.’
* * *
전각 모퉁이를 돌아서던 송원교는 느닷없이 쏘아져오는 투기를 느끼고는 얼른 일장을 뻗어냈다.
쉬이익!
하지만 어둠 속에서 나타난 손이 금나술을 펼치더니 그대로 송원교의 손목을 꺾었다.
우득!
“끄아악!”
비명이 터지기가 무섭게 상대의 손길이 우악스럽게 뻗어왔다.
쿵!
“컥!”
멱살이 잡힌 채 신음을 터뜨린 송원교는 그제야 상대가 팽수혁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너, 넌……?”
“시끄럽고. 남궁천하고 무슨 일이 있었지?”
“무, 무슨 말을…… 컥!”
“너희처럼 한심한 것들이 더 이상 남궁천을 건드리지 않는 건 뭔가 있는 거겠지. 말해봐. 그 새끼한테 왜 빌빌대는 건지.”
“무, 무슨 소리를……! 누가 그딴 호구 새끼한테…… 컥!”
“누굴 눈 뜬 장님으로 아나?”
팽수혁의 전신에서 투기를 넘어 살기까지 느껴지자 송원교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듯했다.
‘이, 이 녀석이 이렇게 강했나?’
평소 워낙 과묵해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자신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별수 없이 송원교가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팽수혁의 눈빛이 더 없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 그 한심한 쓰레기가 널 가볍게 꺾었단 말이지?”
“가, 가볍게 꺾은 것까진 아니고…… 조금은 힘들게…….”
“닥치고 꺼져.”
“알, 알았어. 대신 내가 그 호구새끼한테 졌다는 건 비밀로…… 으힉!”
송원교는 말을 마저 잇기도 전에 팽수혁의 살벌한 눈빛을 보곤 얼른 달아났다.
홀로 남은 팽수혁이 어딘지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그 대살성의 사생아 새끼가 진짜 강해졌단 말이지? 크하하하!”
광기마저 느껴지는 그 웃음소리에는 진득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 * *
문득 밖에서 들린 웃음소리에 남궁천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흐음. 세상엔 의외로 긍정적인 놈들이 참 많구나.”
그런데 어째 저건 긍정적으로 미친놈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