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4화 (14/508)

14. 생각 깊은 놈들.

다음 날 저녁.

남궁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내 맘 같지 않은 법이라지만, 어찌 이리들 생각이 짧을까?

모처럼 뒤끝 없는 마무리를 지어줬더니, 송원교는 끝내 지저분한 결말을 선택했다.

수업이 끝난 후 송원교는 남궁천을 자근자근 씹어 먹겠다는 표정으로 비무를 신청해 온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너, 너 이 새끼…… 어떻게……? 크윽!”

겨우 말을 뱉어낸 송원교가 입가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면서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송, 송 공자…….”

넋이 나간 듯 지켜보던 백리향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떨리는 시선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만인의 조롱거리였던 용천관 공식 호구.

한데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착 가라앉은 저 눈빛은 시리도록 차갑다.

마침내 남궁천이 한기를 풀풀 휘날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도 할 거냐?”

“아, 아니…… 나는…….”

백리향이 얼른 시선을 외면했다.

그녀는 당황했다.

먼저 시선을 피해? 내가?

지금껏 남자들의 시선을 피한 적이 있던가?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데 지금은 도저히 남궁천의 눈길을 똑바로 마주 볼 자신이 없다.

‘어째서 저딴 호구에게!’

그때 남궁천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할 거면 말해. 확실히 혼내줄 테니.”

“건방진……!”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가 눈빛이 마주치자마자 저절로 입이 다물어진다.

어딘지 사악한 미소가 엿보이는 눈매.

어젯밤 남궁천이 자신에게 묘한 사술을 펼쳤을 때와 같은 표정이다.

문득 그 일이 떠오르자 뺨이 화끈 달아오른다.

‘왜 하필 지금 그딴 생각이……!’

지금도 모르겠다.

자신이 무슨 짓을 어떻게 당한 것인지.

사술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사공(邪功)이 아니란 건 분명했다.

사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밖에.

본래 방중술이란 어딘지 음란하게 보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도가의 수행법 중 하나다.

그러니 오히려 정공이라고 할 수 있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백리향을 노려보았다.

“왜 대답이 없어? 더 혼나고 싶어?”

“아, 그건……!”

백리향이 다시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혼나고 싶냐니?

그래, 그저 혼나고 싶을…… 뿐이야. 응?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동시에 백리향의 머릿속에 절망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내가 미쳐가는 거야?’

백리향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돌연 몸을 휙 돌리더니 달려갔다.

“백, 백리 소저!”

쓰러진 송원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백리향은 이미 전각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어이없는 반응은 뭐지? 설마 색기가 아직도 남아 있나?

아닐 거다.

분명히 다 제거했는데.

혹시……?

“그 방중술은 내가 독자 개발한 것인데 색화소심술(色化素心術)이라 이름 지었지. 거사를 치르고 색기를 제거하기도 수월해서 부담이 없어. 뭐, 너무 늦게 제거하면 불안 요소가 좀 있긴 하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이 빌어먹을 색마 땡중이 미완성된 방중술을 팔아먹었어?

뭐, 돈 주고 산 건 아니니까 엄밀히 따지면 팔아먹은 거라곤 할 수 없다.

그래도 뭔가 속은 기분.

웬만한 무공이라면 한 번 펼쳐본 후 초견파공안으로 단점을 보완했을 텐데, 이 방중술은 펼칠 일도 없을뿐더러 무공과는 질적으로 달라서 문제점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색기를 제거해도 색화소심술의 영향이 남는 게 그 불안요소라면?

이거 어쩌나?

‘뭐,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

그렇다.

어디까지나 백리향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모든 건 인과응보이자 자업자득 아니겠는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나는 할 만큼 한 거다.

오히려 주화입마에 걸려서 완전히 미쳐 버리거나 뒈지지 않게 막아준 걸 고마워해야지.

뭐, 결국 그것도 날 위해서 한 거지만.

그나저나 이제 이놈은 어쩌지?

남궁천이 싸늘한 눈초리로 앞에 쓰러진 송원교를 보았다.

송원교는 처참한 몰골을 하고서도 악의에 찬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녀석이 피 끓는 가래침을 탁 뱉더니 쏘아붙였다.

“이런다고 네놈이 용천관 호구에서 벗어날 것 같으냐? 네놈이 백리 소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곧 후회하게 될 거다! 어디서 잔재주 좀 배워 와서 날 꺾었다고 상황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라. 그래 봐야 너는 대살성과 붙어먹은 년이 싸지른 새끼일 뿐이니까! 이 세상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넌 차라리 그냥 뒈지는 게 나았을 거다!”

아, 듣자듣자 하니까 패설이 좀 심하네.

이놈의 학관은 생도들에게 매를 부르는 재주라도 가르치는 걸까?

따악!

“커억!”

남궁천이 힘껏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송원교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모 욕하는 놈이 제일 나쁜 거야.”

“흥!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일 뿐……!”

따악!

“컥!”

“학습 효과가 없는 새끼네. 그럼 처맞아야지, 뭐.”

“잠, 잠깐! 그만둬! 패배를 시인하겠다! 이건 무인으로서의 예의가……! 아아악!”

퍽! 퍽! 빡! 퍼억!

남궁천은 힘껏 두드려 패면서 말했다.

“예의는 사람끼리 따지는 거지. 네놈은 사람이 아니니까 생략하겠다.”

그러고도 남궁천은 한참이나 매질을 이어갔다.

* * *

오늘 밤도 어김없이 운기조식을 마친 남궁천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몸 상태를 제법 끌어 올리긴 했는데…… 아직 부족해.’

송원교나 백리향처럼 일류 초입에 이른 자들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절정고수와 손을 섞거나 다수의 일류고수를 상대하게 되면 위험하다.

물론 자신에게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무수한 경험이 있다.

하나 그것만 믿고 안심할 수는 없다.

‘송원교의 말대로 지금 나는 대살성의 피를 이은 자식.’

사람들의 시선이 결코 곱지 않을 터.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전생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황이지만 마냥 맘 놓고 지낼 수는 없다.

남궁천이 몸을 일으키고는 창가로 다가섰다.

밤하늘의 별이 총총히 빛을 뿜어낸다.

남궁천은 수많은 별무리를 보며 생각했다.

‘당신 보고 있나? 내 아들을 괴롭힌 것들을 응징해 줬어. 그러라고 내게 이런 기회를 준 거지? 당신도, 천이도. 당신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당신이 잘했다고 칭찬 한마디만 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별빛을 이어가니 그리운 얼굴이 된다.

그렇게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다.

“커흠!”

잠시 나답지 않게 감상에 젖었다.

창문을 닫고 돌아선 남궁천은 다시 강해질 방법을 고민했다.

어쨌든 힘이 있어야 살아남는 강호가 아니던가?

‘예전의 남궁세가였다면 지금쯤 온갖 영약을 처먹고 내공이라도 잔뜩 쌓았을 텐데.’

이젠 그런 호사를 누리기 힘든 가문이 됐다.

천하대살성과 연을 맺고도 아직까지 강호에서 지워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남궁세가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역시…….

‘안가(安家)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데…….’

남궁천이 전생에 무림맹을 피해 다니던 시절, 강호 곳곳에 은신처로 안가를 마련해 두었다.

이는 무림공적으로 찍힌 자들의 습성 같은 것이다.

안가 중에는 나름 귀한 영약이나 기물을 숨겨둔 곳도 있었다.

혹여나 위급할 때 안가를 찾아가 응급처치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것이다.

급전이 필요할 때는 기물들을 되팔 수도 있고.

‘문제는 이곳 무한에만 안가가 없다는 점이지.’

유동인구가 이렇게 많은 곳에 왜 안가를 두지 않았냐고?

그야 당연히 무림맹이 있는 곳이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등잔 밑에 있을 경우다.

병신처럼 그 말만 철썩같이 믿고 등잔 밑으로 기어들어 가다간 그 전에 들켜서 뒈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무림맹 본단이 있는 무한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지낼 수밖에.

‘그나마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이 대별산이려나?’

대별산에 안가를 둔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산새가 장엄하고, 안휘와 호북, 하남의 접경지대이기 때문에 어디로든 튀기가 좋다.

문제는 거기까지 다녀오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인데.

‘생도로 지내려니까 의외로 제약이 많네.’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도망자의 삶이 더 자유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결국 인생사 생각하기 나름이던가?

아아, 이 와중에도 깨달음이라니.

내가 이렇게 생각이 깊은 놈이다.

* * *

퍼억!

“크윽!”

쿠당탕탕!

발길질에 튕겨 나간 송원교가 잡동사니와 함께 아무렇게나 굴렀다.

용천관에서 창고로 사용하는 낡은 전각 안.

“끄으으으.”

송원교가 꿈틀거리며 힘겨운 신음을 흘렸다.

저벅저벅.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우악스러운 손길로 송원교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크윽!”

웬만한 어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얹어야 할 정도로 체격이 큰 사내.

그가 송원교의 머리채를 잡고는 질질 끌고 오더니 의자에 앉은 청년 앞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털썩!

“크읍……!”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송원교는 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마침 창틈을 통해 달빛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오자 의자에 앉은 사내 얼굴이 어둠 속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어딘지 앳된 얼굴.

그 외모만큼이나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송 형. 송 형이 잘못한 건 두 가지예요. 알아요?”

천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낭랑한 목소리.

송원교가 어금니만 꾹 깨물고 있자, 옆에 선 거구가 그대로 일권을 날렸다.

“대답!”

빠악!

“크억!”

구당탕탕!

얼굴을 얻어맞은 송원교가 그대로 튕겨 나가 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의자에 앉은 청년이 푸념하듯 말했다.

“철주. 사람을 그렇게 무식하게 때리면 어떡해? 이가 빠지면 말을 알아듣기 힘들잖아.”

“죄송합니다, 소가주.”

거구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바로 낙양조가의 소가주와 호위무사였는데, 의자에 앉은 청년이 소가주 조강민, 거구의 사내는 호신위 곽철주였다.

낙양조가는 백리세가와 함께 강호칠대세가에 속했는데, 소가주 조강민이야말로 희대의 무공천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겨우 열일곱 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용천관 삼년생이 된 것은 용천관주가 그를 학관에 들이려고 일찌감치 발 벗고 나섰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이에 낙양조가에서는 나이가 조금 더 많은 곽철주를 호위무사로 함께 입관시켰다.

조강민은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후기지수답게 지금 절정의 경지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다만 최근에는 그 벽을 넘지 못해 다소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조강민이 한숨을 얕게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송 형이 생각보다 멍청하니까 일일이 짚어줄게요. 첫째, 송 형이 주제넘게 백리 소저를 넘봤다는 겁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럼 날 과소평가한 겁니다. 그게 아니면 송 형이 존나 멍청한 거고. 둘째, 정주문 소가주가 용천관 공식 호구에게 얻어터지고 이렇게 선배를 찾아와 징징거리는 건…… 우리 하남의 수치죠. 안 그래요? 그래도 지명까지 내건 문파의 소문주 아닙니까? 이러다 현판 내리게 생겼어요.”

“……!”

자존심이 상한 송원교가 몸을 흠칫 떨었지만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자칫 또 곽철주에게 한 대 맞을 수도 있었기에.

조강민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아아, 뭐. 그렇다고 후배가 이렇게 얻어터지고 왔는데 선배로서 가만있을 순 없죠. 이런 일에 나까지 나서게 될 줄은 몰랐지만.”

“방, 방심하면 안 될 거요. 그 녀석…… 확실히 달라졌으니까.”

“방심은 송 형처럼 멍청한 새끼들이나 하는 거고. 나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합니다. 알겠어요?”

조강민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송원교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생, 생각해둔 거라도 있소?”

“조만간 대별산 토벌 원정에 본관 생도들이 실전 감각을 익히기 위해 투입될 거란 정보가 있어요. 그때 손을 쓰는 게 제일 자연스럽겠죠.”

조강민이 히죽 웃어 보이자 달빛에 유독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런 실전은 까딱하다간 죽을 만큼 위험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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