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3화 (13/508)

13. 삼인삼색(三人三色)

송원교는 열린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어딘지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칫!’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하남제일미 백리향이 헐벗은 차림으로 당혹스러워하던 모습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점혈 당해서 반 나신이 된 채로 누워 있던 남궁천의 모습도 떠오른다.

‘어째서……!’

어제부터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다.

어딘지 달라진 남궁천의 모습이 시종 신경 쓰인다.

“젠장!”

주먹을 콱 말아 쥐자 단전에서 솟구친 공력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다.

후우웅!

“헛……!”

마침 송원교 엉덩이에 깔린 채로 바짝 엎드려 있던 윤종승이 놀라서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잠시 중심을 잃었던 송원교가 윤종승의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쳤다.

따악!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버티냐? 이 호구 새끼야. 내가 너한테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라고 했어? 아니면 불경을 줄줄 읊으라고 했어? 그냥 단순히 도구가 되라는 건데 그것도 어려워?”

“송, 송 형…… 이제 그만…….”

따악!

“크윽!”

“어디 건방지게 호구 새끼가 이 몸을 함부로 불러? 오늘 내 심기가 몹시 불편하니 주둥이 잠가라.”

“…….”

송원교는 차갑게 코웃음 치고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하여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음에 안 든다.

특히…….

‘남궁천 그 새끼는……!’

송원교의 두 눈에 불길이 이글거렸다.

‘어째서 그놈이! 하필이면 어째서 그놈이!’

이를 뿌득 간 송원교가 마침내 벌떡 일어났다.

그래, 이렇게 두고만 볼 수는 없다.

지금 가장 곤혹스러워할 사람은 백리향이 아닌가?

그녀에게 가야 한다.

“그래, 결심했다.”

송원교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무거운 목소리를 꺼냈다.

이번 결심이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중대한 방점이 되리라.

그로서는 정말 큰 결단이었다.

그가 휙 돌아서서는 성큼성큼 걸었다.

‘기다리시오, 백리 소저! 내가 가겠소!’

* * *

슈우우우……!

운기행공 수련을 마친 남궁천은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어깨를 이리저리 돌렸다.

확실히 몸은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다.

남궁선의 체질을 이어받아 타고난 신체 조건이 좋기 때문이다.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각각 오백 개씩 한 데다 기마자세를 반시진 동안 유지했더니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느낌이다.

남궁천은 잠시 눈을 감고 근육을 이완시킨 후 천천히 눈을 떴다.

‘일단 교관실에서는 잘 넘어갔는데…….’

계평량은 자신과 백리향을 교관실로 불렀지만 딱히 별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주의만 주었다.

이야기를 길게 해봐야 백리향이 곤혹스러워할 거라는 걸 눈치챈 탓이리라.

제아무리 교관이어도 강호칠대세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

흥, 썩어빠진 것들.

어쨌거나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남궁천은 지금까지 심신수련에 집중했다.

문제는…….

“그 광녀가 방중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려나?”

그거 빨리 안 풀면 위험할 텐데.

지금쯤이면 흥분이 가라앉고 차분한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할 터.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이미 방중술로 한 번 주입된 기운은 만 하루 정도 체내에 머물기 때문에 그 색기를 완전히 제거해줘야만 일상생활이 가능해진다.

색기를 제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평소 익힌 내공심법을 적당히 운기해 주기만 하면 된다.

다만 제때 운기조식을 하지 못하고 섣불리 공력을 끌어 올리거나, 지나친 감정 동요가 일어나면 자칫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

색정광사의 방중술이 고약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평범한 아낙들이야 방중술에 당하면 하루 즐기고 땡이다.

그러나 무공을 익힌 여인들은 애초에 기질이 강해 주화입마의 부작용이 있으니, 그 방중술만으로도 색정광사가 무림공적이 된 거다.

만약 백리향이 색기를 걷어내기 전에 감정 조절을 못해서 주화입마에 빠져 버린다면?

아마 평생 색에 미쳐 사는 여자가 될 수도 있으리라.

‘뭐, 그것도 볼만하겠네.’

더구나 정신적 충격으로 작용한 것이 교비신편. 즉 채찍이다.

까딱하다간 변태적인 성향이 뇌리에 자극으로 남아 평생 이해하기 어려운 성벽이 생길 수 있다.

평소 그 광녀가 한 짓을 떠올린다면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어야겠지만, 혹시나 부작용이 심해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멀쩡하던 백리향이 갑자기 죽으면 용의자 일 순위는 자신이 되리라.

그러잖아도 대살성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건수만 잡으면 무조건 얽어매려고 할 텐데, 이번 일에 얽힌 사람은 자신뿐이 아니던가?

설사 송원교가 한 짓이라도 자신에게 덮어씌우고도 남을 놈들이다.

정말이지 누명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아, 이번엔 누명이 아닌가?

아무튼. 아들의 몸으로 또 무림공적으로 쫓길 수야 없지.

그래, 그건 좀 위험하지.

‘가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지.’

알고 보면 내가 이렇게 마음이 여리다.

자세히 보면 참 괜찮은 사람이기도 하고.

남궁천은 문을 열고 백리향의 방으로 향했다.

* * *

살면서 이렇게 치욕스럽고 화난 경우가 있었을까?

지금까지 모든 삶이 순조로웠다.

가지고 싶은 건 뭐든 취했고, 밉고 싫은 사람은 철저히 응징했으며, 모든 이가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는 삶을 영위했다.

당연히 학관의 교관들조차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 인생에서 최악의 하루였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헐벗은 몸으로 채찍을 휘두르다니!

‘아아악! 생각도 하기 싫어!’

잠을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날 일이 아닌가?

게다가 교관 계평량에게는 아무런 변명조차 못했다.

이 모든 게 남궁천의 역공에 당해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면?

그 말을 믿을까?

남궁천이 용천관 공식 호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백번 양보해서 믿는다고 해도 문제다.

애초에 자신이 남궁천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스스로 옷을 찢었다는 점.

한데 오히려 호구보다 무공이 약해 당했다는 점.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에도 악영향이 미친다.

어쩌면 믿음도 주지 못하고 구차한 변명만 하는 변태가 될 수도 있고!

결국 백리향은 단순 변태가 되기로 했다.

“남궁천! 이 빌어먹을 자식!”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뱉으며 이를 갈자, 단전에서 뜨끈한 공력이 훅 솟아올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순간 백리향은 저도 모르게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흐읏!”

뭐, 뭐야? 아직도 색욕이……?

당황한 백리향이 잔뜩 굳어버린 표정으로 얼른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분기탱천할수록 뒤틀린 색욕도 거침없이 솟는 게 느껴진다.

‘남궁천, 이 호구 새끼가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간질간질한 기운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대로 된 운기조식만 해도 충분히 이 기분 나쁜 기운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두고 보자. 남궁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흡!’

운기조식을 하던 백리향이 다시 남궁천의 사악한 미소를 떠올리자 시원하게 일주천하던 기운이 요동친다.

동시에 아랫배에서 또 한 번 뜨끈한 기운이 솟구쳐 오른다.

‘안 돼! 그만! 싫어!’

“하아!”

저도 모르게 입술이 열리면서 뜨거운 숨결이 토해진다.

이래서는 안 돼!

정신 차려야 한다.

이대로면 주화입마가 올 수도 있다.

색기를 억누르다가 주화입마라니.

어디 가서 말도 못 할 사연이다.

‘집중해야 해. 집중!’

백리향은 어렵사리 머릿속을 비웠다.

최대한 남궁천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기운을 일주천시키다 보니 조금씩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한데 그녀의 공력이 소주천을 마치고 대주천에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무시하려고 했지만 방문자는 생각보다 집요했다.

똑똑똑.

“누구야!”

백리향이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기혈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래도 소주천을 마쳤기 때문인지 위기는 넘긴 상태.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리 소저, 나 송원교요.”

“송 공자……? 무슨 일이죠?”

“긴히 전할 말이 있소. 잠시 들어가도 되겠소?”

잠깐 생각하던 백리향이 운기를 멈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누구라도 만나서 기분 전환할 필요가 있었기에.

“잠시라면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겠소.”

문이 열리고 송원교가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백리향이 그를 탁자로 안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소저. 그러니까 나는…… 오늘 본 걸 전혀 개의치 않소.”

“그 얘기라면 별로 하고 싶지 않군요.”

“아니, 해야만 하오.”

백리향이 고운 미간을 찡그리고 바라보자, 송원교가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는 말을 이었다.

“소저, 앞으론 남궁천에게 그러지 마시오.”

“확실히 윤종승 말대로 남궁천은 뭔가 변했더군요. 어쩌면 우리가 아는 남궁천이 아닐…….”

“아니, 그 녀석에 관해서는 더 생각하지도 마시오.”

“설마 송 공자도 그가 두려운가요?”

“솔직히 말하면…… 두렵기보단 좀 신경 쓰이오.”

“역시 그 정도로 대단한…….”

“그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모르오. 다만…….”

“……?”

“나는 더 대단해지도록 노력하겠소. 그러니 그 녀석은 더 이상 상대하지 마시오.”

“뭐…… 네…….”

“게다가 그 녀석은 그쪽 취향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네? 무슨……?”

“나는 다양한 취향을 존중하오. 예로부터 우리 정주문은 깨어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소. 해서 소저의 취향도 완벽히 존중할 수 있소. 뿐만 아니라 함께 즐길 준비도 되어 있소.”

“지금 무슨 소리를……?”

“부디 사양치 마시오, 소저! 난 정말 괜찮으니 이제 그 녀석은 잊으시오! 내 당장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겠소!”

송원교가 갑자기 제 옷을 거칠게 찢어냈다.

한번 결심하기가 망설여졌을 뿐, 내친걸음으로 행동하니 별것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우우욱!

“앗! 송 공자,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내 모든 걸 이해하리다! 소저, 그 채찍으로 나를 매우 치시오! 이걸로 소저의 욕구가 풀린다면 난 얼마든지 즐길 수 있소!”

백리향이 아연한 표정으로 눈앞에 엎드린 송원교를 보았다.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끓어오르는 분노가 한참이나 늦었다.

이 미친놈은 뭐야? 도대체!

이 인간도 날 그런 변태로 본 거야?

노기가 치솟자 체내에 잔류한 색기가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흐윽!”

아찔한 신음이 터져 나오자, 송원교는 또 오해했다.

‘아, 이 정도만으로도 저렇게 만족하는……!’

그래, 이해하자.

저 완벽해 보이는 여인의 반전 매력이라고 생각하자.

그런데 어째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간다.

“크읍! 제발 좀 눈앞에서 꺼져……!”

백리향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더니 비틀거리며 털썩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백, 백리 소저?”

송원교가 화들짝 놀라서 부축하자, 백리향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흐읍!”

“백리 소저! 정신 차리시오!”

송원교가 다급하게 진맥하자 내기가 제멋대로 폭주하고 있었다.

“이, 이건……?”

주화입마의 징조다!

백리향의 몸이 점차 불덩이처럼 뜨거워져갔다.

“이, 이걸 어찌……!”

송원교가 안절부절못하는데 마침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여기서 뭐 하나?”

“헉! 남, 남궁천……! 네놈이 왜 여기에?”

“비켜, 병신아.”

남궁천이 한심하게 쳐다보자 송원교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뭐라? 이 미친놈이 백리 소저의 노리개가 되니 눈에 뵈는 게…….”

“뭔 개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퍽!

“커윽!”

졸지에 복부를 발로 걷어차인 송원교가 그대로 방구석까지 나가떨어졌다.

그러는 사이 남궁천이 백리향을 바로 앉혔다.

백리향이 가물가물 꺼져가는 의식을 겨우 붙들며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너, 넌……!”

“시끄러워. 공력이 폭주하고 있으니 주화입마에 빠지기 직전이다. 뒈지거나 천하의 색녀가 되기 싫으면 집중해.”

이래놓고 일 터지면 대살성의 자식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다 뒤집어씌우고도 남을 놈들이. 쯧.

남궁천이 백리향 뒤에 털썩 앉아서는 격체전공을 시작했다.

잔뜩 성이 난 송원교는 그대로 남궁천을 덮치려다가 멈칫했다.

지금 남궁천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백리향도 위험할 걸 알았기에.

우우웅.

일정량의 공력이 주입되자 백리향의 입에서 다시 뜨거운 숨결이 토해졌다.

“흐으윽!”

원래 색정광사의 방중술로 만들어진 색기는 몰아내기가 어렵지 않다.

다만 당사자나 주변 사람들이 그 민망한 상황에 당황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뿐.

격체전공이 시작된 지 반각도 지나지 않아서 백리향의 숨결이 차츰 고르게 변했다.

이윽고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덤벼! 이 새끼야!”

송원교가 후다닥 경계 태세를 취하자, 남궁천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고는 돌아섰다.

“늦었다. 발 닦고 잠이나 자라.”

남궁천은 송원교의 멍한 시선을 뒤통수로 받아내며 미련 없이 방을 나왔다.

보아라, 내가 이렇게 뒤끝이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