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2화 (12/508)

12. 관계 역전

남궁천의 전생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자면 무림공적으로 악명을 떨치며 강호를 혼란의 도가니탕으로 만든 천하대살성의 삶이 되겠다.

하지만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자면 죄도 없이 낙인찍혀 평생 강호인들에게 쫓겨 다닌 도망자의 삶이다.

그러다 보니 남궁천은 누구보다도 위기의식에 민감했다.

그래서 장인어른,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조부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하기도 했다.

바로 위기의식을 느끼면 경공술을 펼쳐 냅다 달아나는 것이다.

이 위기의식이라는 게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반응한다.

즉,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 벌어졌을 때.

그리고 지금.

이 정신 나간 여자가 발작을 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위기의식을 느꼈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단 생각을 떠올렸다.

응징이나 앙갚음은 이후에 차근차근 치르면 될 일이다.

한데 놀랍게도 이 미친 여자는 남궁천보다 한 발 앞서서 예측한 모양이었다.

그 말은 처음부터 이런 똘끼 충만한 계획을 세웠다는 뜻이리라.

남궁천이 경공을 펼치기도 전에 백리향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왔다.

이번만큼은 확실히 기의 흐름이 보였기에 제대로 된 공격이 분명했다.

‘점혈!’

하나 이 광녀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내가 전생에 별 희한한 무공을 다 익혔다는 사실이지!’

도망자의 삶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어느 순간 어디에서 어떤 놈이 뒤통수를 칠지 알 수가 없기에, 제 한 몸 지키기에 도움이 되겠다 싶은 무공은 닥치는 대로 익히게 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바로 이혈대법(移穴大法)이다.

말 그대로 혈도의 위치를 일시적으로 바꾸는 무공인데, 현 강호에서는 익히는 자가 극히 드물어 거의 실전되어가던 것 중 하나다.

수련 방식도 까다로울 뿐더러, 평생 한 번 써먹을까 말까 한 이 괴상한 대법에 굳이 시간과 공을 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 나처럼 무림공적으로 쫓기는 경우는 사정이 다르지.’

이혈대법을 알려준 혈광마(血狂魔) 갈천노도 나처럼 무림공적이 되어 쫓기던 녀석이었으니.

이처럼 주위 사람을 믿지 못하고, 언제 어느 때든 위기를 느껴 달아나야 할 운명들에겐 이혈대법이 꽤 괜찮은 비상수단이다.

아직 잘 살아 있으려나?

서로 죽인 무림맹원 숫자를 놓고 싸워댔는데, 지금쯤 내가 더 많이 죽인 걸 알고선 엄청 분해하겠군.

아, 잠시 옛 추억이 떠올라 상념에 잠겼다.

뭐, 잡념은 길었으나, 실제로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는 사이 백리향의 손은 남궁천의 마혈을 정확히 점했다.

탁탁탁.

물론 남궁천은 이미 이혈대법을 시전한 후였다.

때문에 오히려 백리향의 점혈은 기운이 왕성해지도록 북돋아주는 역할만 할뿐이었다.

하지만 남궁천은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이 광녀가 성공했다는 착각에 빠지도록 몸이 굳은 척 연기했다.

마혈까지 완벽하게 점했다고 생각한 백리향이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본색을 드러냈다.

“멍청한 새끼. 어디서 재주 좀 익혀왔다고 네 처지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

신랄하게 비웃은 백리향이 허리춤에 패용한 채찍을 꺼내더니 제 손목을 묶었다.

얼씨구?

교비신편(蛟飛神鞭)이라 불리는 그 채찍은 백리향의 보조무기였는데, 지금은 그녀를 속박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백리향이 입매를 비틀더니 속삭였다.

“너뿐만 아니라, 네 가문이 강호에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만들어줄게.”

이 정도 정성이면 지옥의 아수라마저 감동받을지도.

그러나 이 광녀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제정신이 아닌 걸로 따지자면 나 역시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점이지.

남궁천이 허리를 슬쩍 숙였다.

백리향의 눈동자가 커졌다.

‘움직여……?’

분명 마혈을 점했을 텐데?

남궁천은 지금 정확히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싸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건 결코점혈 당한 자의 반응이 아니다.

순간 남궁천이 소름 끼치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럴 각오라면 이 정도로 되겠어? 뭐든 확실히 해야지. 안 그래?”

“무, 무슨……? 아니, 그보다 너 어떻게 움직이는……!”

“지금 그게 중요한가? 뭣이 중한지 모르네.”

다음 순간 남궁천이 손을 뻗으니 백리향의 옷자락이 가차 없이 찢어져 나갔다.

촤촤아아악!

“헉!”

백리향이 얼른 팔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

“너 이게 무슨……!”

“새삼스레 뭘 가리고 그러나? 갑자기 멀쩡한 척하니까 헷갈리잖아.”

탁탁탁.

남궁천이 눈 깜빡할 사이에 백리향의 마혈을 점했다.

“큿!”

백리향은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본래 마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온몸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의 유연함은 유지되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다.

백리향은 후자에 당했다.

축 늘어진 몸에 일 푼의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

한데 남궁천의 미친 짓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미쳐 날뛰어 보자고.”

히죽 웃은 남궁천이 갑자기 자신의 옷마저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촤아악! 부우욱!

그뿐만 아니라 백리향이 쥐고 있던 교비신편을 빼앗더니 제 몸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짜아악! 짜아악!

남궁천의 탄탄한 신체에 붉은 줄이 마구 그어졌다.

“너, 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왜? 내가 이러니 너도 헷갈리냐?”

“이런 미친……!”

“벌써 놀라면 안 되지. 아직 미쳐 날뛰는 수준은 아니잖아.”

말을 마친 남궁천이 채찍을 다시 백리향의 손에 쥐어주더니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벌떡 일으켰다.

그 바람에 이젠 백리향이 쓰러진 남궁천의 몸에 올라탄 모습이 됐다.

마혈이 짚인 바람에 눈만 휘둥그레 뜬 백리향을 보며 남궁천이 웃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우아아아악! 살, 살려주시오! 백리 소저! 내가 잘못했소! 제발 용서해주시오!”

“이 미친놈! 너 뭐야? 이거 안 풀어?”

“흐이이익! 제발 바지만은! 바지는 풀 수 없소! 그만두시오, 백리 소저!”

“너 진짜 무슨 헛소리를……!”

탁탁탁.

순간 남궁천이 재빨리 손을 뻗어 백리향의 아혈까지 점했다.

이로써 백리향은 단 한마디도 말을 뱉지 못하게 됐다.

남궁천이 세상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대사는 거기까지. 이건 선물이야.”

탁탁탁!

후우우웅!

남궁천이 연이어 점혈하더니 일정량의 기운을 백리향의 단전으로 훅 불어넣었다.

“하읏!”

뭔가 뜨끈한 열기가 아랫배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걸 느낀 백리향이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당황해서 두 눈을 부릅떴다.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너무 놀라진 말고. 꽤 기분 좋을 테니 즐기라고.”

전생에 인연을 쌓은 무림공적 중에는 색정광사(色情狂師)라는 놈이 있었다.

땡중 주제에 방중술(房中術)에 빠져서 여염집 아낙들을 후리고 다니다가 파계승이 되었는데, 뭐 나름 심성은 착한 녀석이었다.

방금 백리향에게 사용한 점혈과 격체전공법이 바로 그에게서 배운 방중술 중 하나.

‘이제 곧 헐벗은 수치심과 제멋대로 활주하는 기운 때문에 정신을 놓아갈 터.’

회심의 미소를 지은 남궁천이 재빨리 견정혈과 곡지혈을 점하자 백리향의 팔이 저절로 휙 움직이면서 채찍을 후려쳤다.

짜아악!

“으헉! 백리 소저! 이러지 마시오! 나, 나는 이런 취향이 아니오!”

백리향은 정말이지 미치고 팔딱 뛸 심정이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움직일 수도 없는데, 남궁천이 피해자인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니 눈앞이 깜깜했다.

대체 이게 뭔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모든 계획은 나름 완벽했다.

그런데 한순간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이래서야 누군가 나타나면 영락없이 자신이 남궁천을 덮친 모양새가 아닌가?

게다가 채찍을 들고 후려치다니?

‘이런 모습은 절대 보여줄 수가 없어!’

그녀의 바람과 달리 호연각 정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는 보았다.

남궁천의 안면 가득 피어나는 광기어린 미소를.

‘이, 이놈은…… 미쳤어! 제정신이 아냐!’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한데 이 심장이 묘한 흥분을 동반한다.

곧 누군가에게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아슬아슬한 위기감이 더욱 몸을 달아오르게 한다.

남궁천이 시전한 방중술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내막까지 자세히 알 수 없는 백리향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으응!”

몸서리치도록 싫은 순간인데 입에서는 묘한 신음이 터져 나온다.

그 야릇한 음색에 스스로도 깜짝 놀랄 지경이다.

얄밉게도 남궁천은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또 소리친다.

“백리 소저! 제발 이제 그만하시오! 나는 이런 취향이 아니오! 부탁이오!”

‘이 미친……!’

약이 바짝바짝 오르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으니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때 호연각 후원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교관 계평량을 비롯한 생도 몇몇이었는데, 송원교와 윤종승도 있었다.

동시에 남궁천이 지풍을 날려 백리향의 몇 군데 혈도를 다시 점했다.

푹. 푸푹!

그 바람에 백리향이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둘렀다.

짜아아악!

“으아악! 제발 백리 소저! 정신 좀 차리시오!”

‘이익! 이 미친놈아! 그만해! 그만하라고!’

수치심이 폭발한 백리향은 당장에라도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

하지만 그럴수록 묘한 흥분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달콤한 신음을 흘려댔다.

“하아앙!”

누가 보더라도 낯 뜨거운 교성.

이제 막 도착한 교관과 생도들이 그 자리에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백, 백리 소저……!”

송원교가 얼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그에 맞춰 남궁천은 지풍으로 백리향의 마혈과 아혈을 풀어주었다.

“아아앗!”

그제야 백리향이 제 몸을 추스르며 후다닥 물러났고, 교관과 생도들을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는 순간, 남궁천은 스스로 마혈을 점해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 이게 무슨……!”

계평량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침 윤종승이 달려와 남궁천을 살펴보고는 소리쳤다.

“천이 점혈당해서 몸이 굳었습니다!”

옳지, 잘했다.

남궁천이 나름 기특한 마음으로 윤종승을 보았다.

계평량이 남궁천을 한 번 보고는 다시 헐벗은 백리향을 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커험, 험!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에요! 이건 전부 다……!”

“……?”

순간 백리향이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전부 다 저놈이 꾸민 짓이라고?

자신이 옷을 벗고 채찍을 휘두른 게? 왜?

말이 되나?

그렇다고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위험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백리향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려 버릴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방중술에 당한 그녀의 자태에서는 아찔한 요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보다 못한 계평량이 고개를 돌리고는 소리쳤다.

“무, 무슨 구경이 났다고 이리 몰려온 것이냐? 다들 돌아가라! 두 사람은 교관실에 들르도록!”

“교관님, 마혈을 당해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남궁천의 말에 계평량이 멈칫거리고는 백리향에게 물었다.

“자네가 마혈을 점했나?”

“그렇긴 한데…… 하윽……!”

미묘한 교성이 섞인 대답에 계평량이 얼른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는 남궁천에게 지풍을 날려 마혈을 풀어주었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남궁천이 백리향을 보며 남모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시죠. 백리 소저.”

“크읏……!”

백리향의 두 눈에 불길이 이글거렸다.

물론 욕정과 함께.

‘반드시 네놈을……! 죽여 버릴 거야! 하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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