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관계 역전
남궁천은 잠시 고민했다.
재미있다는 칭찬에 반응해야 할지, 잘 얻어먹었다는 말에 대답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강해졌다는 질문에?
혹시 이것도 호구를 괴롭히는 새로운 화법인가?
남궁천이 두서없는 말들을 정리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자, 백리향이 예의 그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비결이 뭔가요?”
“무슨 비결?”
남궁천이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그녀의 고운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 곧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물론 강해진 비결이죠. 혹시 영약?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남궁세가가 이젠 그만한 여유가 없을 테니.”
얘 봐라.
묘하게 비꼬네. 아니, 대놓고 비꼬는 건가?
어쩌면 정상적인 대화도 지금처럼 삐딱해지는 게 몸에 밴 건지도 모르겠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원래 강했는데.”
“네? 아…… 풋!”
노골적으로 비웃네.
기본적인 예의가 없구나.
백리향이 입을 살짝 가리며 말을 이었다.
“역시 남궁 공자는 재미있네요. 그럼 그동안 왜 실력을 감췄나요?”
“강호가 원래 그런 곳이야. 내가 가진 걸 다 드러내면 뒈지기 딱 좋거든.”
“하면 지금은?”
“한 번 뒈져봤더니 어느 정도는 드러내야겠더라고.”
거침없는 말투, 겁 없는 눈빛.
확실히 남궁천은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하지만 백리향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수록 그녀의 계획이 통할 가능성이 크니까.
“호구 공자가 힘을 숨김. 뭐 이런 건가요?”
“뭐, 그런 거지.”
이제 보니 얘도 확실히 또라이 기질이 있다.
백리향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혹시 저한테도 한 수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오늘 저녁, 호연각 후원에서 어때요?”
“대련 신청?”
“아,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예전처럼 짓궂은 장난을 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정말 무인으로서 공자가 강해진 비결을 조금이나마 알고 싶어서요.”
이렇게 말하니 또 정신 멀쩡한 여자 같다.
“부탁드려요, 남궁 공자.”
척!
아예 포권까지 취하며 정중히 부탁한다.
다른 생도들은 이게 웬일이냐는 듯 바라보고만 있다.
물론 그런다고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며 이 정신 나간 여자를 도울 생각은 없다.
보나마나 이상한 작당을 한 것일 터.
남궁천이 단칼에 거절하려는데, 마침 문이 벌컥 열리더니 중년의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백리향도 더는 말을 잇지 않고 한쪽 눈만 찡긋해 보이고는 돌아갔다.
중년 사내는 교관이었다.
자신을 계평량(桂平亮)이라고 짤막하게 소개했는데, 이미 생도들은 그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계평량은 서책을 펼치다가 멈칫거리고는 꼬질꼬질한 윤종승을 보았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윤종승 대신 송원교가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측간에서 발을 헛디뎌 똥통에 빠졌답니다.”
“프하하하하!”
“낄낄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생도들이 배를 쥐고 웃어댔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윤종승이 어금니만 꾹 깨물었다.
물론 송원교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교관이 그대로…… 믿네?
“쯧쯧. 조심할 것이지. 가서 씻고 와라.”
그제야 윤종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교관이 보기 전엔 자리를 뜨지도 못하게 협박했을 거다.
그나저나 교관이 저런 헛소리를 믿다니.
아니지. 교관의 저 표정은 분명 다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거다.
생도들의 소속 가문이나 문파가 부담되거나, 귀찮은 일을 모른 척하려거나.
에혀, 저런 것들이 교관이라고.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남궁천 자신이 당한 일도 아니니 두고만 봤다.
“자자, 다들 학관 분위기가 어수선하니까 경거망동하지 마라. 다행히 대살성이 죽었지만, 너희들도 알다시피 본관의 교관님들 중에도 몇 분이 아까운 목숨을 잃으셨다. 그러니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 지내도록.”
교관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할 때, 계평량은 정확히 남궁천을 탐탁찮은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남궁천은 내심 발끈했다.
‘뭘 봐? 내가 죽였냐? 아…… 내가 죽이긴 했지.’
그래도 저 교관의 눈에는 대살성의 자식인 남궁천으로만 보일 터.
마치 연좌제를 적용하겠다는 듯 살벌한 눈빛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계평량이 서책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은 무림맹 정청당의 구조와 주된 업무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다.”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전생에 앙숙이었던 무림맹의 내부 구조를 이렇게 훤히 알게 되니 묘한 쾌감마저 느껴진달까?
수업이 끝난 후 잠깐씩 쉬는 시간에는 윤종승을 괴롭히는 유치한 놀이가 계속됐다.
과녁으로 세워두고 활을 쏜다거나, 발을 걸어 넘어뜨린 다음 피풍의로 덮어씌워 집단구타를 한다거나. 지네 같은 독충을 목덜미 안으로 집어넣기까지.
유치하면서도 악랄한 괴롭힘이었다.
그럼에도 윤종승은 어금니를 악다물고 버텼다.
‘오밤중에 찾아와 징징거리던 걸 생각하면 진작 뛰쳐나갈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뚝심이 있군.’
가만, 설마 어젯밤에 내가 한 말 때문에 버티는 건가?
지옥을 견디다 보면 강해질 거라는 말 때문에?
에이, 윤종승이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그런데…….
어딜 봐도 지금 딱 그 정도로 멍청해 보이잖아?
어쨌거나 저런 모습은 좀 새로운 면모다.
* * *
저녁 식사를 끝낸 남궁천은 방에서 운기행공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산책을 하다 보니 저만치 만신창이가 된 윤종승이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생도들의 괴롭힘에 시달린 모양이었다.
윤종승이 남궁천을 힐끗 보더니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너…… 백리향 만나러 가는 거냐?”
“응?”
그러고 보니 그런 약속을 했던가?
거절한다는 걸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지금쯤 호연각 후원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나?
“딱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생각 난 김에 가봐야겠군.”
“관둬라.”
남궁천이 빤히 바라보자 윤종승이 터진 입술이 아픈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어째서인지 강해졌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그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무모한 짓이야. 네가 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그 녀석들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온갖 방법으로 널 곤란하게 만들 거다. 너는 다르니까. 그래, 넌 대살성의 자식이니까!”
확실하다.
이놈은 맞는 걸 즐기는 거다.
따악!
남궁천이 뒤통수를 후려치자, 두 눈이 벌겋게 익은 윤종승이 매섭게 노려봤다.
“이 썅!”
“어쭈? 맞을수록 단단해지는 강철 같은 마음. 뭐 그런 거냐? 어디까지 단단해지나 볼까?”
“제길, 널 생각해서 한 말이다!”
“아서라.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지랄이야? 평소처럼 굴어. 갑자기 공식 호구가 되니 이심전심 뭐 그런 거야?”
“기껏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시끄럽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공식 호구 새끼한테 조언 같은 거 듣고 싶지 않거든.”
“…….”
남궁천이 대충 손을 흔들고 걸어가자,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 있던 윤종승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옛정을 생각해서 말해준 거란 말이다. 병신아. 철없을 때 네놈이랑 친하게 지내던 그 엿 같은 시절이 떠올라서 말해준 거라고.”
“뭐라고 씨불이는 거냐? 크게 얘기해.”
“아무것도 아냐.”
윤종승이 땅을 보고 한숨짓더니 걸음을 옮겼다.
한심한 새끼.
그래도 소싯적 친했던 사이였는데 내가 공식 호구가 되는 바람에 등을 돌렸던 건가?
저놈은 나중에 좀 더 패줘야겠다.
* * *
호연각 후원에 선 백리향이 교교히 내려앉는 달빛을 받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나와주셨군요. 남궁 공자.”
“네가 오라며.”
남궁천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백리향이 달빛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심 짜증이 솟구쳤다.
지금껏 자신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을 보면 누구라도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온갖 아첨과 아부를 떨었다.
또는 너무 긴장한 탓에 벌벌 떨거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남자들도 많았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남들보다 우월한 미모는 그 자체로 무기가 되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선천 능력.
그러다 보니 백리향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어쩌면 남들보다 더 고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다.
한데 남궁천은 뭔가?
마치 자신을 길바닥에 널린 돌을 보듯 하지 않은가?
남궁천은 처음부터 그랬다.
한데 이번에 죽다 살아나더니 그 무감한 시선이 더 심해졌다.
감히 용천관 공식 호구 주제에.
“윤 공자가 극찬을 하더군요. 남궁 공자의 무위가 일취월장했다고요.”
“그래서? 왜 불렀어?”
“의외로 급한 성격이시네요.”
“넌 의외로 머리가 이상한 것 같아. 반말을 하다가 존대를 하다가.”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잖아요?”
“강호에 연놈이 어딨나? 칼자루 든 놈과 아닌 놈만 있을 뿐이지. 용건이나 말해.”
“말씀드렸듯이 공자의 무공을 견식하고 한 수 배우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그러니까 대련하자는 거지?”
“네. 정당한 대련. 위험하니까 무기는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권각술만 사용하는 걸로.”
결국 이것도 호구를 괴롭히려는 수단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만약 그런 거라면 제대로 혼내주면 될 일.
‘한데 어지간히 자신 있나 보네. 혼자 날 상대하려고 하다니. 아니면 정말 견식을 위한 건가?’
뭐, 백리세가가 강호칠대세가에 들 정도로 세력이 커졌으니 그 무위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리라.
남궁천이 손을 까딱거렸다.
“덤벼. 선공은 양보하지.”
“그럼, 기꺼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리향이 보법을 밟으며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다.
파밧!
일순 남궁천의 시야에 붉은빛이 백리향의 단전에서 피어올랐다.
‘역시 보인다.’
경맥을 타고 흐르는 기의 흐름과 앞으로 이어질 경로가 고스란히 나타났다.
팟!
희고 고운 주먹이 붉은 경로를 그대로 따라와 곧게 뻗어온다.
‘생각보다 제법인데?’
간발의 차이로 주먹을 피한 남궁천이 내심 감탄했다.
괜히 강호칠대세가가 아닌 모양이다.
이 정도면 일류 초입 수준이려나?
이제 열여덟이란 어린 나이에 일류에 도달할 정도의 경지라면 확실히 재능은 있다.
‘뭐, 나처럼 천재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남궁천은 적당히 어울리는 척하면서 상대의 무공을 파악했다.
반면 백리향은 내심 놀랐다.
‘남궁천의 무공이 이 정도였다고?’
청룡반에서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생도는 팽수혁을 비롯해 두어 명밖에 없을 거라고 자부했다.
물론 거기에는 남궁천이 고개도 내밀지 못했다.
한데 이건?
파밧! 파바바밧!
연신 현란한 보법을 밟으며 어지럽게 권각을 뻗어내지만, 계속 아슬아슬하게 빗나간다.
애초에 진짜 대련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의 실력이 거슬리다 보니 어느새 진지하게 임하는 중이었다.
‘아니지. 휘말릴 필요 없어. 이 녀석이 얼마나 성장했든, 내가 제대로 한다면 얼마든지 꺾을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끓어오른 호승심을 억누른 그녀가 계획한 바를 떠올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잘됐어. 이 호구 새끼가 이 정도 무위라면 더 말이 되지!’
찰나지간 백리향이 손을 뻗다 말고 금나술을 펼치듯 방향을 휙 꺾었다.
‘음?’
이번에는 남궁천도 이해할 수 없어서 얼른 물러났다.
갑자기 기의 흐름이 사라지면서 경로가 끊어진 탓이다.
‘숨겨둔 한 수인가?’
곧이어 백리향의 손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휘어져 들어왔다.
타닷, 파밧!
‘이건 대체 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격.
금나술을 펼치긴 했지만, 무엇을 위한 동작인지 가늠조차 안 된다.
때문에 남궁천은 백리향이 소매를 낚아챌 때까지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우선은 백리향의 속셈을 지켜볼 심산으로.
그 직후 백리향이 그대로 다리를 걸며 뒤로 넘어졌다.
‘이건 실수……?’
그도 그럴 것이 도저히 공격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더 위태롭게 만드는 행위가 아닌가?
콰당! 털썩!
졸지에 두 사람이 엎어지듯 쓰러지자 바닥에는 백리향이, 그 위에는 남궁천이 올라탄 격이 되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순간 백리향의 얼굴에 아름답지만 사악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뒤이어,
촤아아악!
놀랍게도 백리향이 제 옷을 거칠게 찢어내는 것이 아닌가?
‘허얼?’
남궁천이 눈을 부릅떴다.
속곳마저 고스란히 드러난 백리향이 하늘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악!”
뭐야? 이건…….
어리둥절한 남궁천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백리향이 마구 소리쳤다.
“남궁 공자!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정신 차리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흑흑! 그냥 대련만 하기로 했잖아요! 네?”
남궁천이 얼이 나간 표정으로 백리향을 내려다보았다.
와, 살다 살다 이런 또라이는 진심 처음이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나는 더 또라이거든.
순간 남궁천의 입매가 묘하게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