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0화 (10/508)

10. 관계 역전

짜악!

눈앞이 번쩍이고 세상이 빙글 돌았다.

맞은 뺨이 부풀어 오르면서 벌겋게 익어갔다.

아픔보다는 놀란 마음이 더 컸다.

윤종승이 화끈거리는 뺨을 어루만지면서 더듬거렸다.

“백, 백리 소저……?”

백리향이 팔짱을 낀 채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그, 그러니까 나는 그저…… 남궁천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오지도 않았고…… 오늘 돈도 많이 썼으니 이쯤에서 그만…….”

“그래서? 그 호구 사정을 봐주자는 거야? 누가 보면 우리가 네 돈을 탕진한 줄 알겠네.”

“그, 그건 아니지만…….”

윤종승이 입술을 꾹 씹었다.

아닌 게 아니다.

자기 돈을 탕진한 게 맞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용천관 공식 호구한테 경비를 모조리 빼앗겼다고?

그건 죽어도 말 못 하지.

다만 이대로 남궁천을 계속 괴롭히는 것도 부담된다.

확실히 남궁천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지난번 대련과 학관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무위는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본능이 말하고 있다.

남궁천을 계속 건드리다간 큰코다치게 될 거라고.

그래, 여기서 그만두어야 한다.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윤종승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나름 소신껏 말했다.

“남궁천이 뭐, 뭔가 달라진 것 같소. 그래도 남궁세가 아니겠소? 조심해서 나쁠 건…….”

짜악!

다시 날아든 손찌검에 윤종승이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젠장!

발끈하는 마음에 백리향을 쏘아보았지만 곧 눈을 내려 깔았다.

강호칠대세가의 자녀인 백리향이다.

성질대로 대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백리향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남궁세가? 하! 언제 적 남궁세가지? 아직도 남궁세가가 무림 한 귀퉁이에 머물러 있다는 것 자체가 강호의 수치야! 알아?”

“그, 그렇지만 남궁천이 또 자살 시도라도 하면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백리향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윤종승을 빤히 보았다.

“그러고 보니 황산윤가는 아직도 남궁세가 눈치를 보는 모양이군. 태생이 천하니 어쩔 수 없는 본능인가? 여전히 남궁세가 발바닥이나 핥아댈 줄이야.”

“소저! 말이 지나치오!”

욱한 윤종승이 벌떡 일어나자, 옆에 서 있던 송원교가 느닷없이 발을 내질렀다.

퍼억!

“커윽!”

쿠당탕!

송원교가 바닥에 나뒹구는 윤종승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지금 누구한테 큰소리냐? 미쳤어?”

“송 형……! 송 형까지 나한테 어찌 이럴 수 있소?”

“네가 뭔데? 아, 남궁천 시종?”

“송 형!”

“닥쳐, 이 새끼야.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학관에 올 때 아주 남궁천을 호화마차로 모셔다 줬다면서?”

“……!”

“어디 한 번 씨불여봐. 왜 갑자기 그 녀석한테 빌빌 기는 건지.”

“그, 그건…….”

“왜? 갑자기 같잖은 동정심이라도 생긴 거냐? 동정심 챙기다가 네 인생이 좆 되는 수가 있어. 새끼야.”

“그게 아니오! 다만…….”

“다만 뭐?”

잠시 망설이던 윤종승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대로는 이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

결국 사실대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

남궁세가를 찾아갔다가 대련에서 생긴 일을.

다만 학관으로 오는 길에 있었던 일은 말하지 않았다.

차마 가문의 무사들마저 남궁천에게 얻어터졌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대략의 상황을 전해 들은 송원교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완전 병신일세.”

“송 형! 말이 지나치……!”

퍼억!

“커억!”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지금 누구 앞에서 큰소리야? 엉?”

“그, 그렇다고……!”

“말대꾸할 기력이 있지?”

퍽! 퍽! 퍼억!

“끄으윽……!”

송원교가 눈에 광기까지 뿜으며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일방적으로 얻어맞던 윤종승이 결국 송원교의 다리를 붙잡으며 애걸복걸했다.

“잘, 잘못했소. 용서해 주시오!”

온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통증에 눈물까지 흘렀다.

“후우, 이제 네 위치를 알겠어? 넌 이제부터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니다. 어디 가서 아는 척하지 마라. 이 호구 새끼야.”

“송 형…….”

“시끄러워. 넌 앞으로 용천관 공식 호구다. 알겠냐?”

“그, 그런……!”

윤종승의 얼굴에 절망감이 서렸다.

송원교가 한쪽 입매를 치켜 올리며 이죽거렸다.

“남궁천은 오늘 시험에 통과했잖아? 어쩌겠나? 이미 생도들 앞에서 약속을 해버렸으니. 이젠 네놈이 그 호구 자리를 이어받을 수밖에.”

옆에 있던 백리향이 윤종승에게 한심한 눈빛을 던지며 코웃음 쳤다.

“유유상종이라더니. 호구는 호구끼리 통하나 봐요.”

“……!”

윤종승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백리향을 노려보자, 다시 송원교가 나섰다.

“뭘 꼬나봐?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퍽! 퍽! 빠악!

“끄아악!”

윤종승이 몸을 둥글게 말고 일방적인 구타를 당했다.

전신의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겨우 아문 다리뼈가 다시 퉁퉁 부어올랐다.

그렇게 한참이나 발길질을 퍼붓던 송원교가 연신 씨근거리며 말했다.

“병신 같은 놈. 엎드려.”

윤종승이 비실비실 신음을 흘려내며 엎드리자, 송원교가 히죽 웃으며 백리향을 돌아보았다.

“소저, 오늘 여러모로 피곤할 텐데 편히 앉으시오.”

“사양할게요. 제 몸을 더럽히고 싶지 않네요.”

“아, 내가 실례를. 소저가 앉기에는 너무 누추하지. 그럼 내가 사용하겠소.”

송원교가 엎드린 윤종승의 등에 털썩 앉았다.

“큭……!”

윤종승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분하고 치욕스럽지만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처럼 가문의 위세가 막강하지도 않고, 자신의 힘이 우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말 남궁천은 이대로 두고 볼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소? 확실히 손을 봐줘야지.”

송원교가 다리를 꼬며 대답하자, 백리향이 재차 물었다.

“어떻게요?”

“이번에야말로 다신 일어서지 못하게 짓밟아줄 작정이오. 오늘은 영 찜찜하게 끝났지만 아직 끝이 아니오.”

“무력을 사용하시려고요?”

“그렇소. 일단 죽도록 팰 생각이오. 그러다 기력을 잃으면 산 지렁이 열 마리쯤 주둥이에 쑤셔 넣고 처먹일 거요. 그럼 원기 회복도 되지 않겠소?”

“짓궂으시네요. 하지만 무력을 사용하는 건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할 거예요. 그리고 진정한 괴로움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죠.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여기를 괴롭히는 거니까요.”

백리향이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가리켰다.

송원교가 침음을 흘리고는 물었다.

“생각이 있소?”

“이번엔 제가 한 번 해보죠. 제 아비처럼 대살성까지는 아니더라도 현 강호에 발도 못 붙이도록 만들 자신은 있으니까요.”

“그놈을 무림에서 영영 추방하시게?”

“남궁천뿐만 아니라 남궁세가가 고개도 못 들게 만들 생각이에요.”

“호오, 기대되는구려.”

“두고 보세요.”

백리향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보는 이가 아찔해질 정도로 황홀한 미소였다.

하지만 송원교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웃음을 지을 때는 정말 못된 생각을 할 때라는 것을.

* * *

잠이 덜 깬 남궁천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면서 짜증스럽게 물었다.

“뭐 하는 짓이냐?”

발치에 무릎을 꿇은 윤종승이 어렵게 목소리를 꺼냈다.

“강해진 방법을 알고 싶다.”

“그거 물어보려고 오밤중에 찾아와서 이 난리를 치는 거냐?”

“그래. 나도 너처럼 강해지고 싶어.”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찌푸리더니 고개 숙인 윤종승의 턱을 잡고 들었다.

“너, 처맞았냐?”

“알, 알 거 없다.”

윤종승이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꼴에 자존심은.”

“그보다 알려줘. 어떻게 강해진 건지.”

“내가 왜?”

“부, 부탁이다! 이렇게 부탁한다!”

윤종승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남궁천은 냉랭했다.

“그냥 개고생하면 돼. 꺼져.”

뭐, 사실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윤종승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안 돼! 이대로는 못 가!”

“미친놈. 그럼 밤새 문 앞에서 그러고 있던가?”

남궁천이 돌아서자 윤종승이 바짓단을 와락 붙잡고 울부짖었다.

“안 돼! 이렇게 못 가! 알려줘! 강해진 방법을! 뭐냐? 기연이냐? 아니면 영약? 그런 것 아니지? 다른 뭔가가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수로 하루아침에 그렇게 강해진 거냐?”

“이거 안 놔?”

“못 놔! 이대로면…… 이대로면 난 지옥보다 더한 생활을 하게 된단 말이다!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알아? 네가 갑자기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니까 그 녀석들이 날…….”

남궁천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놈은 매를 버는 재주가 있다.

퍼억!

“커억!”

쿠당탕탕!

발길질에 튕겨 나간 윤종승이 아무렇게나 뒹군다.

남궁천이 무표정한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머리채를 잡고 일으켰다.

“지옥보다 더해? 그걸 아는 새끼가 그러고 다녔어? 나는 당해도 되고, 너는 안 돼? 이거 완전히 인성 문제 있네.”

“미, 미안해. 미안하다. 그러니까…… 알려줘. 부탁이다.”

“육갑 떨고 있네.”

“그러지 말고 제발…… 나도 너처럼 강해지고 싶어. 안 그럼 나도 너처럼 호구가 되어서…….”

하아, 이렇게 학습 효과가 없는 놈도 오랜만이다.

이쯤 되면 맞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퍽!

쿠당탕!

남궁천이 휘두른 주먹에 윤종승이 다시 튕겨 나갔다.

“끄으윽……!”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윤종승에게 남궁천이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렇게 원하니까 알려주지.”

“뭐, 뭔데?”

남궁천이 사신 같은 얼굴로 윤종승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밑바닥을 다지다 보면 인간관계도 선명해지는 법이지. 너도 그 지옥을 한 번 겪어봐. 그럼 확실히 더 강해질 테니.”

남궁천이 몸을 일으키고는 휙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콰당!

문이 거칠게 닫히고 나서도 윤종승은 한동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 * *

다음 날.

남궁천이 호연각으로 들어섰을 때, 누구도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생도들은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네 오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분위기가 이렇게 바뀔 수도 있는 걸까?

대신 생도들은 전혀 다른 곳을 힐끔거리며 키들거렸는데, 바로 윤종승이 앉은 자리였다.

장내 구석진 곳에 앉은 윤종승.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타를 당한 것인지 얼굴은 퉁퉁 부어서 멍이 들었고, 입술은 찢어져 피가 흘렀다.

게다가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인지 전신이 축축하게 젖어서 근방으로는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로운 호구 만들기가 벌써 시작된 거군.’

하여튼 요즘 것들은 빠르다.

특히 나쁜 짓은 더 적응이 빠르다.

생도들을 훑어보니 누구 하나 나서서 윤종승을 돕는 이가 없다.

물론 개중에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거나 관심 밖이라는 녀석들도 있지만, 다수의 생도들이 호구 만들기에 동참해서 힐난과 조롱을 퍼붓고 있었다.

가만 보면 정파 놈들이 더 지저분하게 논다니까.

지들 딴에는 매번 정의가 어쩌고저쩌고 잘도 씨불여대지만, 보다시피 하는 짓은 가관이다.

특히 이런 악랄함에는 피곤할 정도로 정성을 들인달까?

마침 송원교가 남궁천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남궁천, 어서 오게. 간밤엔 잘 잤나? 그나저나 동향인 친구가 아무래도 실금을 한 모양이야. 냄새가 이리 지독해서야. 자네가 좀 씻겨주는 게 어때?”

“내가 왜?”

“어? 뭐, 그야…… 동향이니까?”

송원교가 약간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

남궁천이 한쪽 옆에 서 있는 백리향을 힐끔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럼 너네는 동향이니까 서로 막 씻겨주고 그러나?”

“무, 무슨 소리를! 그럴 리가 없잖나!”

“아님 말고.”

남궁천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송원교가 벌겋게 익은 얼굴로 식식거렸다.

마침 보고만 있던 백리향이 상큼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남궁 공자, 재미있네요. 참, 어제는 덕분에 잘 먹었어요. 그나저나 꽤나 강해졌다죠?”

얘는 또 왜 갑자기 존댓말을?

게다가 말이 왜 이리 두서가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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