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9화 (9/508)

9. 모욕 증명

“여기, 화주 한 병 추가!”

“우리는 고기만두 좀 더 가져다주게!”

“여기 동파육은 언제 나오나?”

용천관에서 가장 가까운 용천객잔.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주문에 점소이가 경신법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정신없이 오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주인장은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판이었다.

용천학관이 꽤 오랫동안 휴관하면서 벌이가 영 시원찮았는데, 오늘 하루 매출만으로도 그간의 손실을 메우고 남을 터였다.

‘개관하자마자 단체손님이라니. 모처럼 대박이구나!’

한편 창가에 앉은 남궁천은 객잔을 가득 채운 생도들의 면면을 물끄러미 보았다.

뭐? 초계국수와 고기만두?

막상 객잔에 도착한 생도들은 온갖 진귀한 요리는 물론 값비싼 술까지 서슴없이 시켰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남궁천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잘들 처먹네. 하긴 한창 처먹을 나이긴 하지.’

그래서인지 남궁천도 배가 고팠기에 앞에 놓인 철판우육을 맛있게 먹었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

세상 평온한 남궁천과 달리 마주 앉은 윤종승은 똥줄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 미친 것들아! 작작 처먹어!’

남궁천이 계산할 돈은 황산윤가 무인들에게서 빼앗은 돈이었다.

원래는 경비로 쓰고 남은 돈을 어떻게든 되찾아볼 생각이었지만, 이래서야 땡전 한 푼도 남지 않게 생겼다.

결국 이 자리는 윤종승이 계산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

그러다 보니 술과 요리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송원교와 백리향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왠지 자신들의 예상과 다른 분위기.

특히 평소 남궁천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백리향은 이 상황이 영 마뜩찮았다.

지금쯤 잔뜩 울상을 짓고 있어도 시원찮을 남궁천이 연신 술과 음식을 들이켜며 오히려 이 자리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추가 주문까지 하고 있다.

남궁천을 빤히 보던 백리향이 송원교에게 말했다.

“평소엔 제 아비라고 나름 감싸더니. 어찌 된 영문일까요?”

“그러게 말이오. 죽다 살아나더니 성격이 변한 건가?”

“똥개가 성격 바뀐다고 범이 되던가요?”

백리향이 차갑게 코웃음을 치자, 송원교가 술잔을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똥개 새끼가 범 흉내를 내면 어찌 되는지 가르쳐 줘야 하지 않겠소? 내게 맡겨두시오. 생각이 있소.”

“어쩌려고요?”

“똥개면 똥개답게 똥 마려운 강아지 표정을 지어야지.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번 감상해 봅시다.”

“하여튼 송 공자님은 짓궂다니까요.”

‘누가 할 소리를.’

송원교가 내심 웃었다.

누구보다도 남궁세가를 싫어하는 백리향이었다.

과거 백리세가는 강호 칠대세가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남궁세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물론 지금은 두 가문의 입지가 정반대로 됐지만, 정파 내에서도 대표적인 견원지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환심을 사려면 역시 남궁천을 괴롭히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지금처럼 백리향과 각별한 사이를 이어가 하남제일미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백리세가의 위세를 등에 업을 수만 있다면 정주문의 미래도 탄탄대로가 아니겠는가?

‘내 앞날을 위해서라도 네놈은 기꺼이 패륜 똥개가 되어주어야겠다.’

엉큼한 미소를 지은 송원교가 손을 마주쳤다.

짝짝짝…….

’객점의 생도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송원교를 보았다.

“개관하자마자 이처럼 성대한 잔치라니. 이 모든 것이 우리 동기인 남궁천 덕분 아니겠소? 남궁천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요. 고맙다, 천아.”

“맞아, 고맙다! 천아!”

“네 덕분에 잘 먹는다! 아니, 죽은 네 아빠 덕분인가? 낄낄!”

생도들이 조롱하듯 키득거렸다.

송원교가 남궁천에게 다가가더니 모두를 향해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남궁천을 서운하게 대한 건 사실이오. 하나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소. 바로 남궁천이 대살성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지.”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송원교가 남궁천의 어깨에 팔을 척 두르더니 말을 이었다.

“과거 남궁천은 그 쓰레기 같은 악마도 제 아비라고 감싸고 돌았소. 하나 오늘은 아닌 것 같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우리처럼 그 쓰레기의 죽음을 기념하고 있소. 이건 그도 우리와 같다는 뜻이 아니겠소? 하여 난 이제 남궁 공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요. 또한 누구도 남궁 공자를 함부로 대했다간 이 송 모가 용서하지 않을 거요.”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생도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송원교와 백리향은 그 누구보다도 남궁천을 괴롭히는 낙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던가?

한데 이젠 괴롭히는 자들을 오히려 혼내주겠다고?

하지만 남궁천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뭐? 날 함부로 대하면 용서하지 않아?

퍽이나.

송원교가 이렇게 나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평생을 무림공적으로 살다 보니 온갖 나쁜 놈들과 어울렸다.

그래서 나쁜 놈들 생각은 누구보다 빨리 읽을 수 있다.

애송아, 무슨 꿍꿍이냐?

아니나 다를까, 송원교가 악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 있는 모든 생도들이 납득할 수 있게 네가 입장을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다.”

“……?”

“네 뜻이 우리와 같다는 걸 증명하는 거지. 그럼 더 이상 우린 널 배척하지 않고 진정한 친구로 삼을 생각이야.”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쩝쩝거리며 오리고기를 뜯던 생도가 불쑥 나섰다.

“송 형, 그걸 무슨 수로 안단 말이오?”

“그야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은가?”

“그게 뭐요?”

“일명 ‘모욕 증명’.”

그제야 생도들의 표정에 예의 그 조롱 담긴 웃음기가 다시 떠올랐다.

남궁천 역시 피식 웃어버렸다.

모욕 증명이라.

확실히 어린놈들이 귀엽게 논다.

과거 마교의 세력이 왕성할 때, 강호 각지에서는 정파 무인 행세를 하는 마교도들이 제법 있었다.

해서 이들을 가려내는 방법으로 유행처럼 우스갯소리가 떠돈 적이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행동거지가 수상한 무인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한다.

“‘마교주 개새끼’라고 해봐.”

정말이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지만, 꽤나 효과가 있단 소문도 떠돌았다.

마교도들에게 교주는 그야말로 신성한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자, 남궁천. ‘진천랑 개새끼’ 해봐.”

술과 고기를 잔뜩 쏜 내가 이딴 시험을 받고 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송원교가 찢어지는 입매를 주체 못 하며 돌아섰다.

“여러분, 남궁천이 말한다면 진정한 친구로 인정해 줍시다!”

“송 형은 역시 똑똑합니다!”

“그래, 남궁천! 시원하게 내뱉고 우리 동료가 되어라!”

생도들이 연신 키득거리며 이 상황을 즐겼다.

백리향도 그제야 만족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제 아비를 모욕하게 됐으니 그 심정이 어떨까?

‘잔뜩 울상이 되어서 아비를 욕하는 꼬락서니도 볼만하겠네.’

송원교가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놈이라지만 아비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영 꺼림칙하다면 ‘우리 아빠 개새끼’라고 해도 된다네.”

“하하하! 그것도 좋네!”

몇몇 생도들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진천랑은 그런 생도들을 무감한 표정으로 훑었다.

이것들은 정말 이런 게 재미있는 걸까?

어지간히 삶이 무료한 놈들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딴 장난에 이죽대겠나?

자고로 사내가 웃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상대의 모가지에 검을 쑤셔 박…….

아,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하면 정말 대살성 같잖아?

아무튼 이게 다 엿 같았던 환경 탓이다.

암, 그렇고말고.

원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천지에서 제일 착한 녀석이었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이런 패륜 발설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나한테 욕하면 패륜이 아니긴 하지.’

여담이지만 나는 척박한 환경을 구른 탓에 욕을 매우 잘한다.

오죽하면 전생에 내가 욕만 뱉어서 일광검(一光劍) 사백준을 주화입마에 빠트렸을까?

어디 그뿐인가?

나는 죽어갈 때마저 하늘이며, 상제며, 신령 등 세상 모든 신 놈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개지랄을 떨었다.

내가 이렇게 욕을 잘한다.

그러니 이런 건 시험도 뭣도 아니다.

내가 나한테 욕하는 것?

우스울 뿐이지.

환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불을 걷어차며 했던 욕도 나한테 한 것이었다.

“아오! 왜 병신같이 맹주를 못 죽였지?”

뭐, 어쨌든.

생도들을 슬쩍 둘러보니 다들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이다.

특히 백리향은…….

‘아주 좋아서 눈알이 뒤집히기 직전이네.’

미안하지만 그 기대는 충족해 주지 못하겠다.

뭐, 욕을 하긴 할 거다.

정작 욕 처먹는 인간이 누군지 헷갈리긴 하겠지만 이참에 욕이란 이런 거다, 하고 보여줄 참이니까.

남궁천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송원교에게 바짝 다가섰다.

“진천랑의 욕이면 만족하나?”

“호오, 이름으로 부르다니. 그래, 그럼 돼.”

내 욕으로 만족한다니 사양할 필요 없지.

“그럼 잘 들어라.”

송원교를 비롯한 생도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남궁천이 송원교를 똑바로 응시하더니 차진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이, 개새끼야. 이제 보니 아주 그냥 병신 버러지 새끼였구나. 지렁이 똥구멍만도 못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서 거름으로도 쓰지 않을 썩은 똥 같은 새끼야. 그동안 사람 괴롭히는 게 재미있더냐? 이제 그 대가를 치르게 됐으니 향이라도 피우자. 성질 같아서는 살가죽을 홀라당 벗겨서 소금을 뿌린 다음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주물러대고 싶다만 내가 아비니까 참는다. 에라이, 진작 씨를 발라 버렸어야 할 천하의 모지리 새끼. 카아아악, 퉤!”

마지막에 뱉은 침이 송원교 발치에 뚝 떨어졌다.

“…….”

하아, 시원하다.

이렇게 혓바닥에 착착 감기는 욕을 뱉어본 게 얼마만인가?

뭔지 모를 이 해방감.

음? 그런데 분위기 왜 이래?

욕해 달래서 기꺼이 해줬더니.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몇몇 생도들은 세상 살벌한 욕설에 온몸이 굳은 듯 목에 걸린 음식을 겨우 꿀꺽 삼킨다.

입에 물었던 술을 주르륵 흘리는 녀석까지.

아주 가관이네.

면전에서 욕을 처먹은 송원교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너…… 지금 그 욕 누굴…….”

“아, 이상 진천랑의 욕이었다.”

암, 내가 한 욕이지.

“끄음……!”

송원교는 물론 백리향도 뭔가 개운치 않은 표정. 백리향의 표정은 오히려 점점 일그러진다.

분명 욕을 하게 만들고, 괴롭혔는데…… 왜 기분이 더러울까?

그때 생도 하나가 벌떡 일어나면서 의자가 쓰러졌다.

콰당!

등에 멘 오 척이 넘는 장도. 구릿빛 피부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생도였다.

“에이 썩을! 밥맛 떨어지는군! 난 이만 가겠다.”

생도가 씨근거리자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더 먹지 않고.”

생도가 멈칫거리고는 남궁천을 쏘아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멱살을 와락 쥐었다.

“이 새끼야, 무슨 생각이냐?”

뭐라는 거야? 이놈은?

여긴 왜 하나같이 멀쩡한 녀석이 없는 거야?

생도가 멱살을 더욱 세게 움켜쥐며 소리쳤다.

“이러나저러나 너는 대살성이 핏줄이고, 본 가 원수의 새끼다. 네놈이 뱉은 욕이 무슨 의미인지 관심도 없다만, 뭘 하든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알아들어?”

아니, 전혀 못 알아듣겠는데.

“쳇! 욕도 아까운 한심한 새끼.”

남궁천을 거칠게 부린 생도가 휙 돌아서서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궁천이 그 뒷모습을 멀뚱멀뚱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하북팽가 팽수혁인가?

하북팽가라.

전생에 대살성이라는 악명을 강호에 널리 떨치게 된 시발점.

그게 바로 하북팽가주의 죽음부터였다.

당시 팽양문이 자신을 죽이러 왔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가 죽었으니까.

‘그랬군. 저놈이 팽양문의 후손인 팽수혁이군.’

그래도 그렇지, 왜 잘 얻어 처먹고 지랄이야?

하여튼 요즘 것들은 감사할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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