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8화 (8/508)

8. 가진 것 다 내놔라

“끄으윽……!”

“아으으……!”

만신창이가 된 복면인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서 연신 신음을 흘렸다.

남궁천이 복면인들을 한차례 훑어보고는 윤종승을 향해 돌아섰다.

“헉!”

마침 눈이 딱 마주친 윤종승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 못 해 비틀거렸다.

‘그래도 지리진 않았네.’

남궁천이 나름 대견하게 여기며 물었다.

“너, 아까 뭐라고 했지?”

“응? 어, 언제?”

“내가 물러나라고 했을 때.”

“아, 그, 그건…… 나도 돕고 싶어서…….”

“그래?”

“그, 그럼! 우, 우린 친구잖아! 이제 이놈들이 가진 걸 우리가 빼, 뺏자!”

“너 이 새끼…….”

윤종승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남궁천이 활짝 웃었다.

“모처럼 훌륭한 생각이다.”

“그, 그렇지? 헤헤.”

윤종승이 냅다 달려가 복면인들의 품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몇몇 복면인들이 어이없는 눈빛으로 윤종승을 보았다.

하지만 어쩌랴.

당장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궁천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데.

복면인들의 품에서 제법 묵직한 전낭이 나왔다.

남궁천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쌍두마차를 구할 수도 있겠는데?”

“그, 그러게.”

윤종승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제길! 네놈을 위해 준비한 돈이 아니건만!’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지만 어쩔 수 없다.

남궁천이 복면인들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어디 낯짝이나 한 번 보자.”

순간 윤종승이 흠칫거렸다.

만약 이들이 황산윤가 사람들이라는 게 밝혀지면 여러모로 낭패였다.

윤종승이 얼른 가로막았다.

“잠, 잠깐만!”

“뭐야?”

“아, 아니, 그러니까…… 괜히 이놈들 얼굴을 봤다간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이놈들이 우릴 끝까지 쫓아와서 죽이려고 하면…….”

“그럼 지금 콱 다 죽여 버리지, 뭐.”

“헛……! 그, 그건 더 위험할지도…… 이놈들 패거리가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르잖아? 산채에서 복수하려고 우릴 추격하면…….”

윤종승이 되는 대로 떠들어댔다.

남궁천이 잠시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이놈들 얼굴은 덮어두고 시종으로 부리자.”

“어엉?”

“학관에 도착할 때까지 말을 몰거나 잡심부름을 시키는 거지.”

“이, 이놈들이…… 고분고분 따를까?”

“그야 네 소관이지. 네가 이놈들을 관리해라. 만에 하나 한 놈이라도 도망가면 네가 책임지는 거고.”

“책임이라니…… 어, 어떻게?”

“그야 어떻게든.”

남궁천이 어딘지 살벌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윤종승은 머리끝이 쭈뼛 섰다.

졸지에 가신들을 시종으로 부리게 된 윤종승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알,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역시 넌 좋은 친구야.”

남궁천이 윤종승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 * *

무림맹이 위치한 무한.

쌍두마차 한 대가 번잡한 대로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한데 마부를 비롯한 시종들이 하나같이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두건 따위로 얼굴을 가린 것이 조금 기이한 풍경이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던 남궁천이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무한에 학관이 세 군데란 말이지?”

“응. 무림맹 산하인 무맹관(武猛館), 세가들이 재력을 모아 만든 정협관(正俠館), 그리고 우리가 다니는 용천관(龍天館). 무맹관에는 구대문파 제자들이 제일 많고, 정협관에는 모용세가나 사천당가 쪽 후기지수들이 있어서 기세가 등등하지. 그런데 너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

“안 난다.”

남궁천이 시선을 밖에 둔 채 대충 대꾸했다.

뭐, 들어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자신의 전생은 눈 감으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를 피곤한 삶이었다. 그러다 보니 애새끼들이 다니는 학관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물론 아들의 존재를 진작 알았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한마디로 그 셋 중에서 용천관이 제일 밑바닥 수준이란 거군.”

“그, 그렇지만 강호 전체로 보면 세 손가락에는 드는 훌륭한 학관이야. 역사와 전통도 제일 깊고!”

“꼴에 자존심은. 그래서 학관에서는 뭘 배우는 거냐?”

예전부터 궁금했다.

도대체 각 문파나 세가의 후기지수들이 학관에 왜 가는지.

무공이라면 사문을 두고 굳이 학관에 갈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무인이 학문을 익히겠다고 일부러 학관에 다니는 것도 웃긴 일이지 않나?

이러나저러나 강호인은 결국 칼밥을 먹는다. 학문을 익힐 시간이 있으면 칼자루라도 한 번 더 휘둘러보는 게 약육강식의 강호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윤종승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야…… 강호의 대소사에 대해서 배우지. 특히 무림맹의 조직 체계나 업무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표국이나 전장의 업무도 배워. 종종 토벌대에 참여해서 실전 감각도 익히고.”

“한마디로 무공보다는 무림맹 뒤치다꺼리를 배운단 말이군.”

“그, 그래도 실전 감각을 익힐 좋은 기회가 많아. 무림맹에서 사용하는 진법도 익힐 수 있고.”

“뭐, 대충 알겠다. 이제 거의 도착한 모양이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확실히 느려졌다.

그만큼 거리에 오가는 사람도 많아졌다.

몇몇 이들은 단정하게 차려입은 무복과 앳된 외모로 보아 자신들처럼 학관으로 가는 생도들 같았다.

그들은 호화마차에 잠시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가 곧 시선을 거두었다.

윤종승이 남궁천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어…….”

“……?”

“비밀로 해주면 안 될까?”

“뭘?”

“그러니까 내가…… 대련에서 졌, 졌다는 거…….”

남궁천이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곧 이해했다.

하긴.

이전까지만 해도 용천관 공식 호구였던 남궁천이 아닌가?

그런 호구에게 뒈지도록 얻어터졌다는 게 알려지면 인생이 피곤해진다는 것 정도는 아는 걸 테지.

너도 참 피곤하게 산다.

“알았다. 일단 비밀로 해주마.”

“정, 정말이지? 고맙다! 정말 고마워!”

윤종승이 연신 고개까지 숙이자, 남궁천이 세상 넓은 아량을 베풀었다는 듯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앞으로 보게 될 녀석들 신상이나 대충 털어놔 봐.”

* * *

용천관에서 보낸 첫날밤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평소 복성에게 들었던 것처럼 오밤중에 창문이 깨진다거나 집단 구타를 당하는 일도 없었고, 물벼락을 맞거나 보쌈을 당하지도 않았다.

다만 대살성의 자식이라는 걸 의식해서인지 모두가 남궁천을 보고도 모른 척했다.

말을 걸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공기 같은 존재.

뭐, 나쁠 건 없었다.

귀찮은 일은 남궁천으로서도 사양이었으니까.

다만 평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남궁천이 수업을 듣기 위해 호연각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들었나? 천하의 대살성이 뒈졌다는 소식?”

남궁천이 고개를 돌려 보니 저만치 반반한 외모의 청년이 윤종승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청년은 잠깐 남궁천을 힐끔거리더니 오히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쓰레기 같은 놈이 뒈졌으니 무림의 경사가 아니겠나?”

“송, 송 형의 말이 맞소.”

윤종승이 남궁천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나직이 대꾸했다.

송 형이라.

그럼 저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이 하남성의 정주문 소문주 송원교인가?

나이는 한 살 많지만 입관 동기라고 들었다.

‘하면 그 옆은 하남제일미(河南第一美)라는 백리향이겠군.’

요즘 세력을 급격히 키워가는 백리세가의 외동딸, 백리향.

확실히 그녀의 미모는 출중했다.

조각 같은 얼굴에 백옥 같은 피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완숙한 몸매.

오죽하면 소림승조차도 그녀를 보면 목탁에 침을 흘린다는 말이 떠돌까?

아름다운 꽃에 벌이 꼬이듯 그녀 주변으로는 송원교뿐만 아니라 몇몇 남자들이 있었다.

‘요즘 것들은 내공을 외모 치장에 퍼붓는 모양이네.’

남궁천이 피식 냉소를 짓자 잠깐 눈이 마주쳤던 백리향의 안색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가 아예 남궁천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 악랄한 마두 때문에 이번 휴관기는 유난히 길었는데.”

“그러게 말이오. 다만 그자에게 당해서 돌아가신 교관님도 계시니 가슴이 아플 뿐이오. 이왕이면 내 손으로 그 작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건만.”

송원교가 짐짓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자식이 듣는 앞에서 일부러 아비를 찢어 죽이겠다는 말을 하는 거다.

그런데 그보다…….

‘응? 내 손에 뒈진 교관이 있었나?’

남궁천도 처음 알았다.

하긴.

무림맹에서 동원한 인간이 워낙 많았으니 칼질로 썰어버린 놈 중에 이곳 교관도 한둘 섞였을 수 있겠다.

남궁천은 일단 그들을 무시한 채 자리에 앉았다.

송원교는 그제야 남궁천을 발견한 것처럼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다가왔다.

“아아, 이게 누군가? 대남궁세가의 남궁 공자가 아니신가?”

유난히 과장된 말투와 몸짓에 몇몇 생도들이 키들거린다.

남궁천은 가만히 송원교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갑네. 들리는 소문으론 자살을 시도했다던데? 지금은 좀 괜찮나?”

“보다시피.”

남궁천이 냉랭하게 대꾸하자 송원교와 백리향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뭔가 다르다.

자신들과 눈만 마주쳐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남궁천이었는데, 지금은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치 다른 사람 같다.

건방진 말투는 둘째 치고, 눈빛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하지만 백리향이 곧 이해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참, 기억을 잃었다죠? 기분은 좀 어떤가요?”

“아직까지는 괜찮아.”

명백한 하대.

백리향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린다.

이쯤 되자 다른 생도들도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백리향이 생긋 웃으며 다가오더니 남궁천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는 속삭였다.

“아니, 지금 네 기분 말고 병신아. 이 손모가지 그었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

“지옥에서 네 아빠 얼굴은 보고 왔니? 아, 그때쯤엔 그 살인귀가 살아 있었나? 그럼 먼저 뒈진 네 어미는? 지옥에서 너랑 네 아빠 자리 잘 맡아놓고 있대?”

남궁천은 잠시 말을 잃었다.

얼굴 반반한 계집이 주둥이에 걸레를 물었나 보다.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화도 나지 않는다.

남궁천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백리향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탄성을 터뜨렸다.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왜 이래? 이 미친년이.

남궁천이 미간을 구기는 사이, 백리향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의 대마두가 죽었으니 남궁 공자가 오늘 한 턱 쏘겠다고요?”

“호오, 그게 정말이오, 소저?”

얼씨구?

송원교가 입을 맞춘 것처럼 묻자, 백리향이 그를 돌아보며 답했다.

“네, 악랄한 대마두가 죽은 기념으로 남궁 공자가 우리 이년생 청룡반 전원에게 초계국수와 고기만두를 사겠대요.”

“이야, 남궁 아우가 죽다 살아나더니 사람이 다 됐군. 난 또 혹시나 그런 쓰레기도 아비라고 감쌀까 봐 걱정했더니.”

이것들 봐라.

요즘 것들은 확실히 약아빠졌다.

반의 생도들을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가담하게 만들면서 괴롭힐 대상은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수법.

하나를 확실히 짓밟는 대신 이득은 모두가 고루 취한다.

전생에 자신이 당한 상황과 똑같지 않은가?

그야말로 비정한 강호의 축소판이다.

게다가 아비가 죽은 걸 축하하기 위해서 그 자식에게 먹거리를 쏘게 해?

명백한 협박이다.

여기서 거부하면 무림공적인 대살성을 편드는 혈육으로 낙인찍어 버리겠다는.

아들아, 넌 이런 환경에서 하루하루 버틴 것이더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