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가진 것 다 내놔라
해가 저물 무렵 청양현(靑陽县).
남궁천은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서서 이제 막 등불이 밝혀지는 저잣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윤종승이 헐레벌떡 달려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헉, 허억, 조, 조금만 쉬었다 가자…… 헉, 헉!”
“쯧쯧. 무가의 자식이라는 놈이 겨우 이 정도로 할딱거려서야 어디에 쓰나? 하여튼 요즘 것들은 뚝심이 없다니까.”
“그, 그러는 너도 요즘 것…… 사람이잖아.”
따악!
남궁천이 윤종승의 뒤통수를 차지게 후려치며 한마디 했다.
“말대꾸할 여력이 있는 걸 보니 충분히 쉬었구나.”
“에이씨! 왜 머리를……!”
“왜? 이참에 네가 좋아하는 대련이라도 한판 더 할까?”
“끄응. 그게 아니라…… 나는 네 짐까지 들고 왔잖아.”
윤종승이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옳은 선택이다.
만약 발끈해서 대들었다간 뒤통수에 불이 나는 것만으로 끝나진 않았을 테니.
“엄살 부리지 마라. 본 가가 가난해져서 챙긴 것도 별로 없다.”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내가 네 짐을 들었으니 불만은 없을 텐데?”
윤종승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었다.
그간 윤종승은 쌍두마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남궁천에게 자신의 짐까지 짊어지게 했다.
경공 수련을 도와준다는 핑계였지만 실상 재미삼아 괴롭힌 것일 뿐이었다.
남궁천이 윤종승의 어깨에 팔을 척 둘렀다.
“덕분에 내 경공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이 좋은 걸 나만 누릴 수는 없잖냐? 좋은 건 친구끼리 나눠야지.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엔 마차를 안 타고 왔구나? 좀 얻어 탈까 했더니.”
“아, 아버지가 걸어가라고 하셔서…….”
대충 얼버무리는 윤종승을 보며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거짓말이라는 게 마빡에 떡하니 써 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못된 버릇은 곧 고쳐질 테니까.
“하긴. 경공 수련은 모든 무공의 기본이지.”
두 사람은 언덕을 내려가 청양현 저잣거리에서 가장 화려한 객잔으로 들어갔다.
윤종승이 학관을 갈 때마다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어서 오십쇼!”
점소이가 환한 미소로 달려오자, 윤종승이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일 좋은 방으로.”
“알겠습니다요. 곧장 안내해드립죠. 손님은……?”
점소이가 남궁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방이 내 방이다.”
“아……?”
점소이가 당황해서 다시 돌아보자, 윤종승이 똥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휙 돌아보았다.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방값을 삥 뜯어……?’
눈치 없는 점소이가 윤종승을 재촉했다.
“손님? 방은 하나면 될깝쇼?”
“……그다음 좋은 방으로 안내해라!”
결국 윤종승이 뺨을 부들부들 떨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점소이는 기분 좋게 앞장섰다.
“예이, 두 분은 절 따라오시지요.”
남궁천이 윤종승을 보며 씨익 웃었다.
“역시 친구가 좋구나. 뭐, 지금까진 내가 숙식비를 대줬으니 이번에 갚는 셈 칠게.”
이 역시 복성을 통해서 들은 사실이었다.
그동안 노잣돈을 윤종승에게 매번 빼앗겼다는 것을.
객실을 안내받은 남궁천이 돌아서는 점소이를 향해 말했다.
“배가 고프니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라. 최대한 고오오급진 음식으로.”
“예, 예! 맡겨만 주십시오! 신속하게 대령하겠습니다요!”
모처럼 대박 손님을 받은 점소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달려 내려갔다.
남궁천이 윤종승의 어깨를 탁 쳤다.
“사양 말고 실컷 먹어라. 네가 갚는 돈으로 내가 쏘는 거다. 고맙지?”
“그, 그래.”
윤종승이 노잣돈이 든 주머니를 꾸욱 쥐고는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아침.
“감사합니다, 손님! 또 오십쇼!”
객잔 점소이가 지붕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남궁천이 이를 쑤시며 손을 대충 흔들었다.
“그래, 잘 쉬었다 간다.”
하지만 그 곁에서 행낭을 짊어지고 걷는 윤종승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백 냥이라니……! 이 미친놈!’
술도 여자도 없이 오로지 먹고 자는 것만으로 하룻밤에 백 냥을 쓰는 게 가능하다니!
남궁천이 윤종승의 등을 툭 두드렸다.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친구 좋다는 게 다 뭐냐?”
‘아니, 내 돈 쓰고 왜 내가 고마워해야 되냐고!’
윤종승은 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그래, 어느 정도 각오하지 않았던가?
어디서 어떤 기연을 얻은 건지 모르겠으나, 남궁천은 분명 달라졌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 녀석과 정면승부는 위험하다.
꼼수를 부려서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바보처럼 당하지만은 않을 거다.
상대는 남궁천.
천하가 지탄하는 대살성의 자식이며, 몰락해가는 가문의 사후양자.
그리고 용천학관의 공식 호구!
그런 찌질한 새끼의 수발이나 들면서 기 죽을 윤종승이 아니란 말씀이다.
‘남궁천…… 지금 실컷 웃어 둬라. 조만간…… 어어? 그러지 마. 이 새끼야…….’
남궁천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윤종승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마을 어귀에 도착한 남궁천이 이리저리 팔다리를 늘리며 몸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남궁천의 입에서 우려하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배도 부르겠다. 슬슬 달려볼까?”
‘야야, 하지 말라고. 밥 처먹고 뛰면 배 아파, 이 새끼야…….’
“달리는 것만큼 수련에 좋은 것도 없지. 자, 가자!”
타닷!
윤종승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남궁천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남궁천은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결국 행낭 두 개를 짊어진 윤종승이 목청껏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뒤쫓았다.
“야이, 개새끼야아아!”
* * *
남궁천은 대략 오십 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렸다.
경사가 꽤 급한 곳을 완전히 올라선 다음에야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내공을 가볍게 일주천시켜 보니 흐름이 나쁘지 않다.
‘제법 몸 상태가 올라왔군.’
물론 그래 봐야 아직도 전성기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이만하면 어지간한 일류 고수는 거뜬히 상대하고도 남으리라.
운기를 마치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좌우로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관도(官道)라고는 하지만 인적이 드물어 뭔가 벌어지기에 딱 좋아 보인다.
그 말은 곧 어느 비열한 인간이 뭔가를 꾸미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라는 뜻이다.
그리고 남궁천은 조금 전 그 비열한 음모의 냄새를 맡고 걸음을 멈춘 것이고.
평생 무림공적으로 쫓기던 몸이었기에 이런 눈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마침 윤종승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쓰러졌다.
“헉, 헉, 헉……! 제발…… 조금만 쉬자…… 헉, 헉……!”
“쯧쯧. 너는 경공 수련 좀 해야겠다.”
윤종승이 발끈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남궁천이 냅다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새끼는 학습효과가 떨어지네. 친구가 조언을 해주는데 그딴 눈깔로 째려보면 내 기분이 개 같을까? 좆같을까?”
“미, 미안.”
“그리고 너.”
“어, 응?”
“내가 뛰기 시작할 때 뒤에서 욕했지?”
“아, 아냐.”
“멍멍이 새끼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걸 들었는데.”
“아, 아냐! 잘, 잘못 들었겠지. 내가 너한테 잘 얻어먹고 왜 욕을 하겠어?”
“역시 그렇지? 내가 백 냥이나 써서 네 배를 불려줬는데 그럼 안 되지.”
‘그건 내 돈이라고, 이 새끼야!’
윤종승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 당연하지.”
“그래. 그런데 누구 기다리냐? 눈알이 바쁘다?”
“무, 무슨 소리야? 너무 힘들어서 그래. 내가 여기서 기다릴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하긴 그렇지? 이딴 산길에서 산적이나 안 나타나면 다행인데…… 나타났네?”
남궁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좌우 수풀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나더니 복면을 쓴 일곱 명이 불쑥 나타났다.
어느 모로 보나 도적 행세를 하고 있지만,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가 사뭇 이질감이 든다.
‘일류가 하나, 나머지는 이류인가? 저 대머리가 수장이군.’
남궁천이 상대를 빠르게 파악하는 사이 역시나 대머리 사내가 대도를 어깨에 척 걸치고는 걸어왔다.
“우리 솜털 뽀송뽀송한 공자님들,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학관에 가는 길이다.”
남궁천이 의외로 딱 부러지게 대답하자, 대머리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대머리의 시선이 윤종승에게 슬쩍 향한다.
남궁천이 내심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다.
애초에 이들은 윤종승이 매복시켜놓은 자들이리라.
증거는 세 가지.
첫째, 도적이라기에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너무 정갈하다. 정공을 익혔다는 증거다.
둘째, 도적이라는 것들이 정작 행낭을 짊어진 윤종승에게는 별 관심도 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향해서만 적대감을 풀풀 드러낸다.
셋째, 진짜 산적이라면 복면 따위는 쓸 이유가 없다. 일면식이 있거나,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된다는 뜻.
이래서 옛말 하나 틀리지 않다고 하는 거다.
밟을 때는 확실히 밟아야 한다.
다신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대머리가 코웃음을 쳤다.
“어린 새끼가 제법 당돌하구나. 하나 겁대가리를 상실하면 몸이 개고생하는 법이지.”
“도적이냐?”
“그럼 네 눈깔에는 우리가 도적이 아니라 도사로 보이냐? 가진 걸 다 내놔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마.”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서 가진 게 별로 없다. 대신 저 녀석에겐 아주 많다.”
남궁천이 윤종승을 가리키자 놈들이 순간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이 윤종승에게 관심을 둘 리가 만무했다.
역시나 대머리 사내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며 버럭 외쳤다.
“어린 새끼가 친구를 팔아먹어? 어디서 못돼 처먹은 것만 배웠구나. 네놈이 가진 것부터 내놔라! 안 그러면 죽여 버릴 테니까.”
“그 전에 하나만 묻자.”
“뭐냐?”
“정말 도적이냐?”
“그야 당연히…….”
“잘 생각해서 대답해. 아주 중요한 순간이니까.”
남궁천의 눈빛이 새삼 서늘해지자 대머리가 움찔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뭔 애새끼 눈빛이……!’
하지만 곧 자존심이 상한 그가 칼자루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 건방진 새끼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네놈은 칼 맛 좀 봐야겠다!”
“진짜 도적 맞네? 무고한 사람에게 칼까지 휘두르고?”
이렇게 나오면 오히려 편하다.
뻣뻣한 정도 놈들이라도 이 정도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명분으로 충분할 테니까.
즉, 이놈들이 내게 매우 처맞아도 할 말이 없다는 뜻.
거기에 대머리가 결정적인 말을 뱉었다.
“음? 그러고 보니 네놈이 가진 검이 꽤 쓸 만해 보이는군. 그 정도면 네놈 명줄을 조금 늘려줄 것도 같은데?”
“아…… 이거?”
스르르릉.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아 들자 일곱 무인들이 흠칫거리며 칼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남궁천이 검첨으로 대머리 사내를 겨눴다.
“종승아, 괜히 휩쓸려서 처맞기 싫으면 물러나 있어라.”
그러자 윤종승이 짊어지고 있던 행낭을 휙 던졌다.
남궁천의 등에 부딪힌 행낭이 바닥에 툭 떨어지자, 윤종승이 검을 뽑아 들고는 이죽거렸다.
“싫은데?”
하여튼 매를 버는 놈이다.
마침 대머리가 기합성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와락 달려들었다.
“겁대가리를 상실하면 몸이 개고생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이 애송이 새끼야!”
찰나지간 초견파공안이 발동되면서 대머리 사내의 기로(氣路)가 남궁천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아니나 다를까, 수태양소장경을 따라 붉은빛이 뻗어간다.
‘이것들은 무공도 인성도 한결같네.’
파밧!
남궁천이 재빨리 보법을 밟아 대머리 옆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벽라검을 올려쳤다.
까앙!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면서 한동안 잊었던 짜릿한 감각이 손끝을 스친다.
그래, 이 느낌이다.
모처럼 진검을 쥐고 휘두르니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하다.
늘 그렇듯 비열한 놈들을 짓밟아대는 건 즐겁다.
대머리는 느닷없는 반격을 견디지 못하고 손에서 칼을 놓치고 말았다.
휘리릭, 푹!
대도가 저만치 날아가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이후로는 남궁천의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쉬이잇, 퍼억!
남궁천이 대머리에게 검집을 마구 휘둘렀다.
퍽! 퍽! 빠악! 뻑!
“악! 크악! 아악!”
“맞는 말이야. 겁대가리를 상실하면 몸이 이렇게 개고생하는 법이지.”
대머리는 팔딱거리면서 연신 비명을 터뜨렸다.
남궁천이 휘두르는 검집에는 초식 따위가 없었다.
동네 파락호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듯 마구잡이식 구타.
그 모습이 너무나 거칠고 패도적이었기에 주변 무인들은 그저 입만 쩍 벌리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마침내 남궁천이 검집으로 대머리의 뒤통수를 정확히 후려쳤다.
빠악!
“커억……!”
대머리가 그대로 멈칫하더니 눈을 허옇게 뒤집으면서 쿵 쓰러졌다.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던 대머리가 곧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입에 거품까지 문 것인지 복면이 축축하게 젖었다.
주변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뎅그렁……!
검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윤종승의 검이다.
“죽, 죽였어……?”
윤종승이 바짝 메마른 목소리를 비실비실 흘려내자, 여섯 무인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아앙!
“이, 이 새끼! 뭐야? 갑자기!”
“저 미친놈이 조, 조장님을 죽였……!”
“호들갑 떨지 마라. 기절한 것일 뿐이니까.”
남궁천이 히죽 웃더니 혀로 검신을…….
‘어우씨, 핥을 뻔했다! 정신 차려야지. 이러면 진짜 대살성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