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세상과 싸우겠느냐?
윤첨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차마 이해하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져서 끙끙 앓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막내아들 윤종승이 아닌가?
만신창이가 된 윤종승이 퉁퉁 부은 눈을 힘겹게 뜨고 시선을 마주하자 윤첨산은 머리꼭지가 돌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타닷!
“노오오옴!”
순간 눈이 뒤집힌 그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바닥을 박차고는 남궁천에게 날아갔다.
후우우웅!
느닷없이 노성과 함께 파공음이 일어나자 남궁천이 얼른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장법(掌法)?’
이번에도 윤첨산의 단전 부위에서 붉은빛이 일어나더니 가슴께를 거쳐 오른 팔을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황산윤가의 무공은 대체로 수태양소장경의 경맥을 따라 운기되는 모양이군.’
확실히 조금 전 윤종승이 펼쳤던 검초와 운기 방식이 거의 흡사하다.
다만 윤종승에 비하면 훨씬 정교하고 완성도가 높은 공격이었다.
‘그래도 아들보단 낫다는 건가?’
남궁천은 반사적으로 보법을 밟으며 물러났다.
섣불리 막으려다가는 뼈마디가 남아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슈우우우욱, 파앙!
날카롭게 뻗어나간 일장이 남궁천의 어깨를 스치면서 허공을 때렸다.
‘피해……?’
윤첨산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이게 한낱 따돌림이나 당하던 아이가 보일 반응이란 말인가?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허공을 때리면서 일어난 기파가 그대로 날아가 윤종승을 덮친 것이다.
파파앙!
“크아아악!”
졸지에 아버지가 날린 혁련장(赫蓮掌) 여파에 휩쓸린 윤종승이 피까지 토해내며 데굴데굴 굴렀다.
“헉! 승, 승아!”
윤첨산의 표정이 핼쑥해지면서 거의 울어버릴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필 혁련장이 아들에게 날아가다니!
남궁천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우야, 진짜 아프겠다.”
이쯤 되자 윤첨산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 이익……!”
순간 윤첨산이 홱 돌아서서는 진심을 다해 혁련장을 펼쳐왔다.
“이 미꾸라지 같은……!”
손속에 사정을 두었던 처음과는 확연히 다른 공격!
‘이건 좀 위험하겠는데……!’
남궁천도 얼른 보법을 밟아 피하면서 어금니를 꾹 씹었다.
전생의 전성기에 비하면 지금 몸 상태는 겨우 이 할 정도에 이른 수준.
생각 없이 대응했다가는 자칫 큰 화를 당할 터다.
‘그나마 피해를 줄이려면……!’
남궁천이 몸을 빙글 회전하면서 신묘한 보법을 밟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켜보던 남궁검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침내 윤첨산의 일장이 남궁천의 갈비뼈를 때리기 직전.
쉬이익!
한 줄기 섬광이 끼어들더니 폭음 같은 소리가 코앞에서 터져 나왔다.
파아아앙!
기풍이 터지면서 남궁천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렸고, 윤첨산은 휘청거리면서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반면 남궁천 앞으로 목검을 뻗은 남궁검은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선 자세로 미동조차 없었다.
대신 그가 전신에서 한기를 풀풀 풍기며 칼바람 같은 음성을 뱉어냈다.
“무슨 짓인가?”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얼음조각처럼 시리다.
순간 이성을 잃고 설쳤던 윤첨산조차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주춤거렸다.
“끄음.”
잠시 노기를 억누른 윤첨산이 뺨을 부르르 떨었다.
“가주께서는 내 아들 녀석이 보이지 않습니까?”
윤첨산의 손가락이 한쪽 구석에 구겨지듯 쓰러진 윤종승을 가리켰다.
싸늘한 눈길로 윤종승을 응시한 남궁검이 코웃음을 치고는 물었다.
“해서?”
“뭐요?”
“대련 중에 부상을 입은 것 같군. 해서?”
“아무리 대련이라지만 도가 지나치지 않소이까!”
“그래서 지금 책임이라도 따지려는가?”
남궁검의 입에서 다시 무감한 목소리가 건조하게 흘러나왔다.
윤첨산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씨근거렸다.
이미 스스로 뱉은 말이 있다.
그 사실을 상기시키겠다는 듯 남궁화도 한 걸음 나서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따졌다.
“말씀하신 대로 정당한 대련이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서 책임을 운운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
윤첨산이 불같이 이글거리는 눈길로 남궁검과 남궁화를 번갈아 보았다.
스스로 판 무덤에 빠진 꼴이 되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셈.
남궁검이 윤첨산을 향해 딱딱한 음성을 뱉어냈다.
“오늘 자리는 여기까지 하지.”
“오늘 일은…… 기억해두겠습니다.”
“그래야 할 걸세.”
“……?”
“자네 스스로 뱉은 말도 지키지 못해 본 가장에서 무력을 행사했잖은가? 나는 오늘 많이 참고 있네.”
그야말로 서슬 퍼런 음성에 윤첨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상 축객령을 내린 남궁검이 몸을 돌리고는 남궁천에게 다가갔다.
“너는 가주전으로 오너라.”
“알겠습니다. 그렇잖아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남궁천이 당당하게 대꾸하자 남궁검이 눈살을 슬며시 구겼다.
확실히 손자는 성격이 바뀌었다.
이래서야 마치 다른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남궁검은 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 찬바람을 휘날리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남궁천이 쓰러진 윤종승을 부축해 일으키면서 귓속말을 했다.
순간 윤종승이 흠칫거리고는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남궁천은 그저 태연할 뿐이었다.
* * *
‘이 영감 까칠한 건 영 적응이 안 되네.’
남궁천은 내심 불편한 마음을 숨기면서 남궁검을 마주 응시했다.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할 것이지, 아까부터 입은 한일자로 굳게 다문 채 눈싸움만 줄곧 하는 중이다.
분위기가 이러니 동석한 남궁화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뭐, 아무리 대련이라지만 상대를 너덜너덜한 걸레조각으로 만들어놨으니 따끔한 질책 한마디쯤은 떨어지리라.
그 정도는 각오하고 저지른 짓이기도 하고.
‘마지막에 직접 나서서 윤첨산을 막아준 것은 의외였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갈비뼈가 부러져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있었으리라.
실전 아닌 실전을 겪어보니 몸을 제대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마침내 남궁검의 입이 열렸다.
“어떻게 한 것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윤첨산의 일장을 피한 것은 우연이라 쳐도, 그의 막내아들을 그리 만든 것은 어찌한 것이냐?”
“그놈이 절 두고 방심한 탓이지요. 천하제일의 고수도 한순간에 병신이 되는 건 바로 자만 때문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그런 어중이떠중이야.”
다시 남궁천을 빤히 쳐다보던 남궁검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혼날 차례인가?’
그런데 남궁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할 말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음? 이걸로 대련 이야기는 끝인가?
“나무라지 않으시는 겁니까?”
남궁천의 질문에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엇을?”
“대련 중에 상대를 자근자근 밟아놨으니 한마디쯤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대련 중에 일어난 일이다. 후에 일어날 일은 스스로 책임질 나이가 아니더냐?”
으음, 확실히 예상 밖이다.
뭐, 이래서야 편을 들어주는 건지, 어디 한 번 좆 돼보라는 건지 구분이 안 되긴 하지만.
‘뭐, 나로서는 나쁠 게 없는 전개지.’
생각을 갈무리한 남궁천이 망설임 없이 용건을 꺼냈다.
“여름 휴관기가 끝나면 학관에 나가겠습니다.”
이번만큼은 남궁검도 표정의 변화가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매우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먼저 반응한 사람은 남궁화였다.
“학관이라니? 지금 네 몸 상태가 온전치 않은데…….”
“학관에 다시 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전장에 나가는 게 아닙니다.”
이쯤 되자 남궁검도 입을 열었다.
“네 처지를 알고 하는 소리더냐?”
“잘 알지요. 대살성의 피를 이은 자식. 누구도 반기지 않겠지요.”
“하면 그리 가벼운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 텐데.”
“그렇다고 언제까지 숨죽인 채 눈치만 보며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남궁검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확실히 손자는 변했다.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남궁검이 남궁천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세상을 이기려고 드느냐?”
“그럼 안 됩니까?”
남궁화가 불쑥 나섰다.
“무모한 짓이다, 천아. 갑자기 왜…….”
“이모님, 세상은 누가 만드는 겁니까?”
“그야 개개인이 모여 만드는 것…….”
“그럼 결국 그 개개인과 싸워 이기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강호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야.”
“마찬가집니다. 무인 하나하나와 싸워 이기면 그만입니다.”
남궁천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조카의 이런 반응이 낯설기만 한 남궁화는 입을 살짝 벌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어쩌다가 그 유약한 아이가 이리도 변했을까?
마치 그간의 한과 울분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 같지 않은가?
나약한 모습은 좋지 않지만, 이토록 저돌적인 건 더욱 안 좋다.
순식간에 실내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았다.
이 아슬아슬한 균형이 어떻게 깨질지 몰라 남궁화도 말을 아꼈다.
숨결이 그대로 얼어붙을 것만 같은 분위기.
그 냉랭한 공기를 찢으며 남궁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너는…… 네 아비를 꼭 닮았구나. 그러나 네 아비도 지고 말았다. 그 세상에. 그 강호에.”
“……!”
니미럴, 영감이 아픈 곳을 때리네.
확실히 나는 세상에 지고 말았다.
끝까지 싸웠지만 이 비열한 강호에 무릎을 꿇었더랬다.
남궁천이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남궁검을 보았다.
“그러니 저는…… 이겨야지요. 반드시 저만은.”
찻잔을 들어 올리던 남궁검이 멈칫하더니 차를 마저 들이켰다.
남궁화는 호흡도 멈춘 채 남궁검과 남궁천을 번갈아 보았다.
마침내 남궁검의 입이 열렸다.
“필요한 게 무엇이더냐?”
“아버지!”
남궁화가 불쑥 소리치자, 남궁검이 손을 들어 올려 제지했다.
대신 그는 남궁천의 두 눈을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남궁천의 한쪽 입매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어머니의 검이 필요합니다.”
‘저 아이가 도대체……!’
남궁화는 이제 돌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언니 남궁선이 생전 사용하던 벽라검(碧羅劍).
남궁가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검이자 죽은 언니가 남긴 유품.
아버지 남궁검이 가장 아끼는 검이기도 했다.
당연히 허락하실 리가 없…….
“검은 가벼이 여기되 검에 실은 뜻마저 가벼이 여겨선 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남궁검이 남궁화를 돌아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에게 벽라검을 내어주어라.”
“……!”
남궁화는 한참이나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 * *
“공자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주시고요. 모쪼록 끼니는 거르지 마시고…….”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다. 그만해라. 귀에 딱지 앉겠다.”
“너무 걱정이 되어서 그러죠. 혹시 누가 시비를 걸면 그냥 모른 척하시고…….”
“한 번만 더 떠들면 입 찢어버린다.”
“헉.”
복성이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마을 어귀까지 배웅 나온 복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한까지 쫓아올 작정이냐? 그만 돌아가라. 이제 혼자 갈 테니.”
남궁천이 손을 흔들며 멀어질 때까지도 복성은 거듭 몸을 챙기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언덕 하나를 넘어서야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정말이지 옆에서 조잘대는 사람이 복성이 아니었다면 칼자루부터 휘둘렀으리라.
이만하면 정말 성질 많이 죽었다.
그나저나 어디 보자.
윤종승이 다녀가고도 한 달이 흘렀으니 지금쯤 부러진 뼈마디가 붙었으려나?
‘명색이 무가의 자식이라면 그 정도 회복력은 될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막 두 번째 언덕을 올라설 때였다.
마침 저만치 나무 그늘 아래에 누군가가 보였다.
바로 윤종승이었다.
윤종승은 남궁천의 눈을 차마 마주치지 못한 채 바닥을 보며 말했다.
“와, 왔어?”
남궁천이 대답 대신 짊어지고 있던 행낭을 툭 던졌다.
발치에 떨어진 행낭을 바라보자 남궁천이 턱짓을 했다.
“들어.”
“내가……?”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윤종승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윤종승이 기겁을 하며 행낭을 얼른 주워 들었다.
“들, 들면 되잖아! 자, 자! 들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어깨에 벌레가 앉아서 털어주려는 건데.”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윤종승의 어깨 위로 손짓을 하자 풍뎅이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윤종승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지만, 남궁천은 개의치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볼까?”
“그, 그래.”
남궁천의 행낭까지 짊어진 윤종승이 뒤뚱거리며 따랐다.
하지만 남궁천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그의 표정은 더 없이 살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