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참교육의 시간
달그락!
황산윤가주 윤첨산은 찻잔을 소리 나도록 내려두었다.
조심성이 없는 행동에 남궁검이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첨산은 신경도 쓰지 않고 툭 던지듯 말했다.
“남궁 가주님. 이제 결정하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내 대답은 여전하네.”
정말이지 삭막하다 못해 한기가 드는 목소리.
윤첨산은 저 냉랭한 목소리를 아무리 들어도 적응되지 않았다.
괜히 듣는 이가 위축되게 만드는 칼바람 같은 음성.
하지만 언제 적 남궁세가인가?
아니, 세가라는 말이 필요하긴 한가?
이젠 그냥 남궁가라고 불러도 충분하리라.
천하제일룡이라 칭송받던 장녀는 천하대살성과 정분이 나서 가문을 말아먹었고, 더러운 피를 이어받은 손자는 모욕을 참지 못해 자살시도까지 했으니.
‘하루아침에 집안 하나가 풍비박산 나는 건 일도 아니지.’
제왕의 가문이라 칭송받던 남궁세가는 이제 없다.
그 많던 재산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남궁세가의 거대했던 장원은 팔린 지 오래됐고, 따로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별원을 본원으로 쓰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남궁세가가 근근이 버틸 수 있는 건 아직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황산표국과 관련한 사업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쉽게 포기하긴 힘들겠지. 그러나…….’
“계속 고집을 부리다간 후회하십니다. 황산표국 입장도 헤아려 주셔야지요. 그만 사업장을 저희에게 넘기시지요. 본 가가 황산표국을 잘 관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방문했으니 차나 마시고 돌아가게.”
“허참, 고집 부릴 때가 아니실 텐데…… 남궁 가주님. 대가는 섭섭지 않게 드릴 테니 다시 한번…….”
말을 뱉던 윤첨산은 딸꾹질을 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남궁검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을 던졌기에.
삭막한 목소리만큼이나 그의 눈빛은 시리고 무정했다.
사람의 눈이 저렇게 한기를 품는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쳇! 곧 죽어도 자존심이라는 건가!’
답답할 노릇이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봐야 남궁세가는 황산표국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황산표국이 스스로 남궁세가를 박차고 나올 마당이다.
한데도 끝까지 손에 쥐겠다니!
뭐, 처음부터 쉽게 설득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면 차선책을 쓸 수밖에.
윤첨산이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눈길을 슬쩍 돌려 한쪽에 앉은 남궁화를 보았다.
나이가 서른다섯이라고 했던가?
이십 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풋풋하고 아름다운 미모다.
자신의 첫째 아들이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여인.
달그락!
이번에도 찻잔을 다소 거칠게 내려놓은 윤첨산이 입을 열었다.
“뭐, 황산표국을 계속해서 남궁세가에서 관리하려면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헛소리를 할 생각이면 그만 돌아가시게. 노부는 인내심이 과하지 않네.”
“들어보십시오. 어디 보자…… 네가 남궁화였던가?”
“예, 가주님. 남궁화입니다.”
남궁화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을 감히 ‘너’라고 칭할 수도 없었으리라.
분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
당장은 예를 갖춘다.
윤첨산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참한 아이구나.”
서른다섯이나 된 여인에게 ‘참한 아이’라니.
기분이 나쁠 만도 하지만 남궁화는 여전히 내색하지 않았다.
윤첨산이 말을 이었다.
“저 아이가 본 가의 소가주와 혼인하는 건 어떻습니까?”
“……!”
“보아하니 혼기도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이 기회에 연을 맺게 된다면 두 가문의 겹경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리 되면 황산표국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의 관리도 일부분 귀 가에 넘겨 드릴 수 있습니다만.”
말을 마친 윤첨산은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예상대로 남궁검의 표정은 사신처럼 무섭게 굳어버렸고, 남궁화는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일단 내지르긴 했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군.’
윤첨산은 긴장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는 하지만, 호랑이는 호랑이다.
이빨이 빠졌다고 호랑이가 강아지에게 잡아먹히진 않으니까.
이 자리에서 남궁검이 분을 이기지 못해 칼바람이라도 일으킨다면 자신의 목이 간당간당하리라.
하지만 모든 도박은 위험 요소를 품는 법 아니겠나?
지금은 위험을 떠안고 다소 비열해져야 할 때다. 그래야 남궁세가를 밟고 올라설 수 있다. 그동안 황산윤가가 덩치를 키워온 방식이기도 했다.
혹자들은 황산윤가를 졸부 취급하지만 윤첨산은 상관없었다. 결국 졸부조차 되지 못한 자들의 시기 어린 질투일 뿐이니까.
마침내 남궁검의 입에서 노기가 절제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만 돌아가게.”
“아직 대답을 듣지…….”
“눈치가 없군. 이게 내 대답일세.”
“축객령이라…… 하나, 제 질문에 대한 답은 남궁화가 직접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남궁검의 눈살이 슬쩍 일그러졌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지간하면 표정 변화가 없는 자였으니까.
혼례를 올리지도 않은 여인을 마치 며느리 대하듯 묻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남궁화는 침착했다.
사실 그녀는 가세가 기우는 걸 막을 수만 있다면 윤첨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남궁화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저는 말씀하신 제안을…….”
그때였다.
콰앙!
남궁검이 다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남궁화도 말을 잇지 못했고, 윤첨산도 움찔거리고는 돌아보았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여미고는 윤첨산을 노려보았다.
윤첨산은 숨을 멈추고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마치 전신이 얼음덩어리 안에 갇혀 버린 것만 같다.
‘무, 무슨 사람 눈빛이……!’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는데, 실내로 복성이 불쑥 들어왔다.
“가주님! 갑자기 죄송합니다! 급히 고할 일이 있어서 무례를 무릅썼습니다.”
그제야 남궁검이 윤첨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남궁화와 윤첨산도 고개를 돌려 복성을 보았다.
남궁화가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복성이 윤첨산의 눈치를 슬쩍 살피자, 남궁화가 다시 차분한 어조로 타일렀다.
“우선 침착하고. 사정을 말해보아라.”
“그, 그게…… 우리 공자님이 지금 윤 공자님과 대련을 하고 있습니다요.”
“뭐?”
남궁화가 벌떡 일어나서 고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대련이라니? 그 아이가 기운을 차린 지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았는데 대련이라니?”
“제, 제가 필사적으로 말렸습니다만 공자님이 듣지 않았습니다요. 그래서 지금 급히 고하기 위해 달려온…….”
그러자 듣고만 있던 윤첨산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물었다.
“말렸는데도 듣지 않았다는 건 남궁 공자가 스스로 대련을 받아들였다는 뜻인가?”
“그, 그렇습니다요.”
“허허, 그럼 문제 될 것도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서 무공 수련이라도 할 생각인가 본데…….”
하지만 남궁화는 딱딱한 표정으로 윤첨산을 돌아보았다.
“안 됩니다! 그 아이는 지금 기억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갑자기 그리 격하게 움직였다간…….”
“어지간히도 감싸는구나. 하긴, 대살성의 자식이라도 조카라는 건가?”
“윤 가주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나? 그나저나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나 스스로 대련을 받아들였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너무하시군요. 그러다가 몸이 성치 못해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어쩌시려고요?”
이쯤 되자 윤첨산도 웃음기를 거두고 남궁화를 빤히 보았다.
“어쩌라니? 그게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인가?”
“그건…….”
“두 아이가 합의해서 대련에 임했네. 자네도 들었지만, 시종이 말려도 고집까지 부리며 임한 대련일세. 그 과정에서 부상이 나오더라도 누군가 책임을 질 일은 아니지. 그렇지 않습니까? 남궁 가주님.”
윤첨산의 시선이 남궁검에게 향했다.
자연히 남궁화와 복성의 시선도 그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간절한 심정으로 남궁검을 보았다.
하지만 시종 싸늘한 표정인 남궁검의 입에서는 기대 밖의 대답이 나왔다.
“그의 말이 맞다.”
“아버지!”
“그 아이 스스로 받아들였다는 말을 너도 듣지 않았느냐?”
“하지만 의식이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상태예요!”
“스스로 몸을 돌보지도 못할 정도면 자각을 했어야 할 일이지.”
남궁검의 칼 같은 대답에 윤첨산은 내심 웃었다.
‘이래서 꽉 막힌 인간은 피곤하다니까. 뭐, 이번엔 내게 잘된 일이지만.’
저 대쪽같은 성격이 도움이 될 줄이야.
윤첨산이 비린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 걱정되면 함께 가보지 않겠나?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군.”
윤첨산과 남궁화가 다시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남궁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이에 윤첨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못을 박았다.
“다시 말하지만 두 아이가 합의해서 치른 대련일세. 누군가 부상을 당했다고 해서 책임을 운운하는 어리석은 소리는 나오지 않길 바라네.”
말은 남궁화에게 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남궁검이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내뱉은 이 말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 * *
“끄으으윽……!”
너무 고통스러워서 신음도 나오지 않는다.
신음을 흘릴 기력이라도 있다면, 고통을 견디는데 모두 쏟아붓고 싶은 심정이다.
오장육부가 끊어질 것만 같고, 왼쪽 팔목과 발목은 기형적으로 꺾여서 완전히 돌아갔다.
지팡이를 짚어도 일어서기 힘들 수준이다.
온몸은 피투성이에다가 피멍이 들었다.
윤종승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어째서 이렇게나?
그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길로 고개를 들었다.
‘헉!’
바로 앞에 우뚝 선 남궁천이 세상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한 마리의 벌레를 가지고 장난치는 아이처럼.
남궁천이 목검을 슬쩍 들어 올리자 윤종승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져, 졌다! 제발 이제 그만! 미,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응? 뭐가?”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그 모습조차 왠지 소름이 돋는다.
도대체 저 광기 서린 눈빛은 뭔가?
자신을 순식간에 한참 아래의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내, 내가 잘못했다! 난, 난 그저 장난을 치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장난?”
“그, 그래. 장난이었다. 네가 기억을 하는 건지,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용서해줘. 정, 정말 죽을 것 같아.”
“좀 더 참아봐. 나도 장난이니까.”
“어엇?”
퍼억!
“크아아악!”
그대로 목검에 뺨을 얻어맞은 윤종승이 한참이나 튕겨 나가서 나뒹굴었다.
“끄으으으……!”
윤종승이 부들부들 떨며 몸을 꿈틀거리는 동안 남궁천이 다가오더니 웃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속삭였다.
“너도 재미있지? 그치?”
“제, 제발 이제 그만…….”
“에이, 왜 그래? 내가 부탁할 때 너는 어떻게 했을까?”
“미, 미안하다. 천아, 다 지나간 일이잖아. 잊자. 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 이, 이제 그만 지나간 일은 지우자. 응? 괜히 원한 같은 거 가져봐야 너도 힘들잖아?”
이것 봐라.
내 아들을 그렇게 괴롭히고도 이제 와서 잊자고? 원한을 지우자고?
그건 안 될 말이지.
예전 같았으면 그 말을 따랐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강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지금은 결코 이따위 말에 넘어가지 않는다.
죄를 덮고 흐르는 시간에 감정을 내던지자는 놈들.
그 순간에는 반드시 기억하고 절대 잊지 않겠다지만, 결국 지난 후에는 언제 적 일을 또 꺼내냐며 지겹다고 소리칠 쓰레기들.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 섬뜩해서 윤종승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 잊자. 그런데 오늘까진 좀 더 처맞자. 대신 너도 오늘 처맞은 건 싹 잊고 원한 같은 건 깔끔하게 지우자. 응?”
“어어? 잠, 잠깐…… 으아아!”
퍼억!
“크악!”
다시 날아든 목검에 윤종승이 한참 튕겨 나가서 땅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거의 의식이 끊어질 때쯤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승아!”
아버지 윤첨산이 경악해 내지른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