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살성이 남궁세가로 환생했다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윤종승을 응시했다.
전생에 워낙 많은 인간들과 부딪쳐봤기 때문인지, 이젠 얼굴만 봐도 관상이 대충 보인다.
하면 윤종승은?
전형적인 악질이다.
오만하게 치켜든 턱, 상대를 무시하듯 아래로 내려깐 눈, 오른쪽만 살짝 비틀려 올라간 입매.
대놓고 무시하는 표정이 역력하니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가 없다.
“네가 윤종승이냐?”
남궁천이 불쑥 던진 말에 윤종승이 송충이 같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의외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럴 수밖에.
예전 같았으면 윤종승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남궁천이었다.
한데 뭐?
네가 윤종승이냐고?
“하하! 너 기억을 잃었다더니 진짜구나?”
“그렇게 됐다.”
딱딱한 말투.
정말이지 남궁천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윤종승의 오른쪽 입매가 더욱 말려 올라갔다.
자기만 보면 꼬리를 말고 몸을 사리기에 여념이 없던 녀석이 저리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말대꾸를 하다니.
‘이거…… 재미있군. 정말 기억을 잃은 모양인데.’
그렇잖아도 남궁천을 괴롭히는 게 시들해지던 참이었다.
한데 온갖 낙서로 닳고 닳았던 그 종이가 새하얀 백지가 된 셈이다.
이거야말로 괴롭히는 자의 초심을 되찾아주는 계기가 아닌가?
한편 복성은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윤종승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얼마나 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처 다 숨기지 못한 악의가 표정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만 같다.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윤종승이 입을 열었다.
“죽었다가 되살아났다기에 문병을 왔더니 아주 팔팔하구나. 그런데 땀은 왜 그리 흘려?”
“운동 좀 했다.”
“이야, 운동까지. 정말 멀쩡한 모양이네. 그럼 우리 오랜만에 그거나 좀 할까?”
“그거?”
윤종승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그게 뭐지?”
“왜 있잖아. 너, 나하고 자주 했잖아. 학관에서도. 우리 서로 잘 어울렸으니까.”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윤종승의 말이 개소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잘 어울려?
일방적으로 괴롭히고 철저하게 이용해먹었겠지.
한편 윤종승은 남궁천이 웃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웃어?’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자신에 대한 공포 본능쯤은 남아 있을 법도 한데.
아무래도 너무 물렁하게 대한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감히 내말에 웃어?
손이 마구 근질거린다.
남궁천이 윤종승을 빤히 보며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뭐긴. 대련이지.”
이럴 줄 알았다.
하여튼 어린 새끼들이란.
대련을 빌미로 또 죽도록 팰 생각을 하는 거겠지.
하긴. 대련이라는 명목이 있으면 어른들에게 핑계를 대기에는 좋을 테니.
남궁천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냐, 네놈들이 이런 식으로 내 아들을 괴롭혔단 말이렷다. 오히려 정당한 자리를 만들어주니 감사의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구나.’
남궁천이 목을 우두둑 꺾고 나서려는 순간,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남궁천과 윤종승이 동시에 시선을 옮겼다.
복성이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로 말을 이었다.
“저어…… 그러니까 우리 공자님이 지금 기운을 차리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요. 그런데 대련이라니요? 그건 절대로 안……!”
퍼억!
“악!”
순식간에 날아든 주먹에 복성이 코를 움켜쥐고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윤종승이 피 묻은 주먹을 털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이 미친 돼지 새끼가 위아래도 없어. 너는 내가 우습냐? 어디 시종 따위가 버릇없이 끼어들어? 끼어들길.”
“공, 공자님…… 그게 아니라, 대련은 위험…….”
“돼지 새끼라서 사람 말은 못 알아들어 처먹지?”
퍽! 퍽!
윤종승이 작정한 듯 복성을 발로 걷어찼다.
“시종 따위가 감히 내 말을! 두 번씩이나……!”
탁.
찰나 윤종승은 남궁천이 자신의 어깨를 잡는 걸 눈치채고는 홱 돌아섰다.
일부러 팔을 크게 휘둘렀는데, 남궁천이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피했어?’
윤종승이 눈을 휘둥그레 뜨는데, 남궁천이 턱짓으로 복성을 가리켰다.
“그만하지? 대련을 하기도 전에 힘 뺄 필요 있어?”
“그 말은…… 대련을 하겠다는 거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자며? 오랜만에 벗이 청하는 대련이니 기꺼이 응해야지.”
“벗? 푸훗. 하하하!”
윤종승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벗이라니.
감히 눈도 못 마주치던 녀석이 벗이라고?
오냐, 기억 잃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윤종승이 속내를 감추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본의 아니게 내가 좀 흥분했네. 미안하다.”
“괜찮다. 나도 미안해질 것 같으니까.”
“뭐?”
남궁천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다시 복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공자님! 안 됩니다요!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실 텐데 대련이라니요! 절대 안 됩니다!”
복성은 눈물까지 흘렸다.
남궁천은 그런 복성을 힐끔 보았다.
그래도 저 녀석만큼은 내 아들을 진심으로 걱정해주었군.
남궁천이 복성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두드렸다.
“뭘 찌질하게 울고 자빠졌어?”
“공자님……?”
“걱정 마라. 모처럼 찾아온 벗과 대련이지 않느냐? 꽤 즐거울 거다.”
순간 복성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남궁천이 한참이나 어른처럼 보였다.
남궁천이 윤종승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너 괜찮겠냐? 내가 좀 변했는데.”
“변했다는 건?”
“내가 좀 강해졌거든.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가 돌아왔더니 깨달음을 얻었다고나 할까?”
이제 복성은 턱이 바닥에 닿을 것처럼 벌어졌다.
윤종승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하, 이 미친 새끼 좀 보소.
너무 긴장해서 돌아 버린 건가?
아니면 기억과 함께 겁대가리도 상실한 걸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자고로 지렁이도 꿈틀거려야 밟는 맛이 나는 것 아니겠나?
그래, 꿈틀거려라.
그럴수록 더욱 처절하게 짓밟아 줄 테니.
윤종승이 입매를 비틀었다.
“친구가 강해졌다는 것만큼 반가운 소식이 또 있겠어? 내가 너에게 한 수 배울 날이 오다니. 감개무량이다. 부디 한 수 가르쳐 주길 바란다.”
“그래, 네가 그토록 원한다면.”
“좋아, 그럼 목검으로 해야겠지?”
“좋을 대로.”
원한다면 진검도 상관없다는 뜻.
윤종승은 기가 차면서도 방 한쪽에 마련된 검좌대에서 목검을 골랐다.
결코 배려가 아니다.
목검이라야 신나게 두드려 팰 수 있기 때문이다.
진검으로 싸우다가 괜히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이라도 입혀 버리면, 아무리 대련이라도 어른들에게 핑계 대기가 만만치 않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목검을 한 자루씩 들고 안마당으로 나왔다.
복성은 연신 발을 동동 굴렀다.
‘공자님, 도대체 어쩌자고 대련을 받아들이신 겁니까요?’
필시 기억을 잃은 게 문제리라.
‘이러고 지켜만 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최대한 빨리 가주전으로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나?
누구라도 나타나서 이 말도 안 되는 대련을 당장 멈추게 해야만 한다.
복성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가주전을 향해 냅다 달렸다.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해!’
한편 윤종승은 마주 서 있는 남궁천을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고즈넉한 달빛이 내려앉는 안마당.
자신을 마주 보는 남궁천의 눈빛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번들거린다.
하! 저 미친놈이……!
묘하게 흐르는 긴장감.
가만, 긴장이라고?
그럴 리가.
저딴 호구를 앞에 두고 긴장할 리가!
확실히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지만,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할 수는 없다.
윤종승은 괜히 짜증이 일어나는 걸 억누르며 말을 툭 내뱉었다.
“그럼 어디 한 수 배우도록 하마.”
“그래, 그래. 얼른 배워라.”
남궁천이 히죽 웃는다.
저 미친 새끼! 그 웃음이 울음으로 바뀔 거다!
타앗!
순간, 윤종승이 바닥을 차며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선공을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당장에라도 저 건방진 얼굴을 짓밟고 싶다.
‘훗! 어정쩡하군!’
예상대로 남궁천은 기수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상태.
윤종승은 이번 일격으로 남궁천의 왼쪽 어깨를 완전히 부러뜨릴 작정이었다.
감히 뭐?
죽다 살아났더니 깨달음을 얻어?
얼빠진 새끼, 그 깨달음 또 얻게 해주마!
쉬이익!
남궁천의 가슴 앞까지 다다른 윤종승이 목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그 순간 남궁천의 눈빛이 반짝였다.
동시에 윤종승의 단전 부위에서 붉은빛이 일어나더니 가슴께에서 크기가 증폭되며 빠르게 뻗어가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은 체내에서 일어나는 기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듯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經)을 따라 순식간에 이동한다.
마침내 목검까지 다다른 붉은빛이 그대로 이어질 경로를 밝히듯 허공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물론, 이는 초견파공안이라는 능력을 가진 남궁천에게만 보이는 현상.
짧은 순간 남궁천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견파공안은 유지되고 있군!’
그렇다는 건 초견파공안이 신체적 재능이 아닌, 영(靈)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이능이란 뜻.
어쨌거나 나쁘지 않다.
마침내 목검이 붉은빛의 경로를 따라 떨어지며 남궁천의 어깨를 때리는 순간!
스스슥.
남궁천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면서 목검을 흘려냈다.
순간 윤종승의 눈동자가 커졌다.
따악!
목검이 바닥을 내리치자 그 충격이 손바닥을 타고 찌르르 울려왔다.
“큿!”
어금니를 빠득 간 윤종승이 목검을 대각선으로 올려 베었다.
휘이익!
하지만 이번에도 목검은 허공만 베고 말았다.
휙! 휙! 쉬이잇! 휙!
그러고도 연거푸 검격을 펼쳤지만, 목검은 번번이 허공만 때렸다.
처음에는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한데 계속해서 검격이 빗나가기만 하니 윤종승의 눈동자가 점점 흔들렸다.
‘어째서지? 어째서 안 맞는 거야!’
정말이지 한 끗 차이가 아닌가?
아예 얼토당토않게 허공을 때린다면 상대의 실력을 인정이라도 하겠는데, 계속해서 남궁천은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었다.
‘이놈, 언제까지 운이 따라줄 것 같으냐!’
이를 악다문 윤종승이 온힘을 다해서 검을 사선으로 베어갔다.
‘이번엔 절대 피할 수 없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다.
황산윤가에서 자랑하는 검초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궁천도 이번만큼은 피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목검을 들어 올려 그대로 맞부딪쳐 왔다.
따아악!
목검끼리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가 허공을 때렸다.
윤종승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막았다고?’
말도 안 된다.
도대체 남궁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세상 찌질하던 놈이 어째서?
“크익!”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데, 목검을 맞댄 남궁천이 광기 서린 미소를 히죽 짓는 게 아닌가?
“왜 그렇게 심각해?”
“뭐, 뭣?”
“즐겨야지.”
“이, 이 미친……!”
쉬이이잇, 따악!
다시 목검과 목검이 부딪쳤다.
그 충격이 어찌나 센지 윤종승은 손바닥이 찢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크읏!”
하지만 남궁천의 표정은 희열에 차 있었다.
광기가 느껴지는 그 얼굴에 윤종승은 질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다고 이런 호구에게 밀릴 수야!
자칫 소문이라도 나면 학관에서 고개 들고 다니기도 부끄럽다.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화가 날 일이다.
약이 바짝 오른 윤종승이 목검을 맞댄 채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너 솔직히 말해라. 자결했던 거 아니지? 그냥 한바탕 거짓부렁으로 난리 친 거지? 학관에 나오기 싫어서.”
“그건 또 신선한 해석이네.”
“자살한 새끼가 왜 이렇게 멀쩡하냐고. 죽은 놈이 되살아나는 게 말이 돼? 하긴, 너 같은 새끼는 자살할 용기도 없는 놈이지. 안 그래?”
순간 남궁천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갑자기 급변한 표정을 보자니, 윤종승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침내 남궁천이 입을 열었다.
“어이, 병신.”
“뭐, 뭣?”
윤종승이 황당한 표정으로 두 눈을 치떴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한데 남궁천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 눈동자가 어찌나 깊고 어두운지 절로 위축이 들었다.
“자살할 때 용기가 필요한 줄 아냐?”
“…….”
“자살에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포기다. 진짜 용기는 살아가는 데만 필요한 거다.”
“……!”
“그리고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너 같은 쓰레기들이야말로 손 안 대고 사람 죽이는 악질 살인마들이지.”
퍼억!
“컥!”
순간 목검에 어깨를 얻어맞은 윤종승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곧이어 남궁천이 벼락처럼 목검을 휘둘렀다.
따악!
“악!”
윤종승의 손바닥이 찢어지며 목검이 튕겨 날아가 버렸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은 윤종승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놈이 어째서 이렇게……?’
남궁천이 윤종승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 참교육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