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천살성이 남궁세가로 환생했다
슈우우우.
전신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가던 기운이 체내로 흡수되듯 갈무리됐다.
남궁천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주 잠깐 그의 눈동자에 정광이 어렸다.
‘이제야 좀 쓸 만한 몸이 됐군.’
남궁천은 나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보름이 흘렀다.
그동안 남궁천은 닥치는 대로 먹고 운동을 거듭하며 체력을 쌓았다.
그리고 사흘 전부터 내공 수련에 들어갔다.
다행히 남궁천의 체질은 나쁘지 않았다.
하긴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천하제일룡이라는 칭호를 받은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오죽하랴?
다만 텃밭은 좋은데 환경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기름진 땅이라도 싹이 자랄 환경이 모질다면 성장해서 열매를 맺기 어려운 법.
천하대살성의 자식이라는 낙인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모진 환경이었으리라.
‘그렇다 해도 그런 멍청한 선택이라니. 쯧.’
한숨이 흘러나온다.
아들을 탓하지만, 사실 스스로를 탓하는 한숨이다.
무슨 자격으로 아들을 탓하고 나무라겠나?
아들을 나무랄 수 있으려면, 아비로서 역할을 다했을 때다.
하지만 자신은 아비였던 적이 없다.
아들은 평생 홀로 고독한 싸움을 해왔을 것이다.
한창 어리광을 부리며 재롱을 떨고 귀여움을 독차지했어야 할 시기에도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욕을 바가지로 들었으리라.
거기에 하나뿐인 어미는 궐음증(厥陰證)에 걸려 일찌감치 병사했으니 얼마나 고독했을까?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잘 보아라. 아비로서 해준 건 없지만, 이 개 같은 세상을 어찌 조져 버리면 되는지, 내게 등 돌린 것들을 가차 없이 짓밟고 올라서는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마!’
모종의 결의를 다진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내와 아들이 준 기회.
다시는 지난 삶처럼 실패하지 않으리라.
세상과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보다 악랄하고, 보다 비열해지리라.
전생에서 천하대살성으로 낙인찍혀 무림공적이 되어 쫓겼던 이유는 간단하다.
초견파공안.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그 재능 때문이었다.
세상은 이따금씩 뜬금없는 능력자를 배출하곤 한다.
가령 악사들 중에는 한 번만 들어도 고유의 음 높이를 단숨에 파악해내는 능력자들이 있다.
절대음감이라는 능력이다.
분명 보기 드문 재능이지만, 무인들이 선망하는 초견파공안에 비하면 흔하디흔한 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절대음감처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무공이든 파훼할 수 있는 능력!
초견파공안은 세 단계로 구분된다.
일행여초(一行如招).
이행각의(二行覺意).
삼행일체(三行一體).
즉, 한 번 보고 행하면 초식을 어지간히 똑같이 흉내 낼 수 있고, 두 번 행하면 진의를 깨우치며, 세 번째는 무공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과장이 보태진 것이지만, 범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축복받은 재능이 변변찮은 집안에서 태어날 경우에는 재앙이 될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세상 어느 무인이 초견에 무공을 파훼하는 자를 반기겠나?
자칫 자신들의 절기가 노출되어 약점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할 것이다.
이쯤 되면 이해될 거다.
어째서 무림이 진천랑을 공적으로 내몰고 천하대살성이라는 오명을 씌운 것인지.
모든 무인이 선망하는 능력이지만, 모든 무인의 표적이 되는 재능.
그러나 순진했던 아버지는 그 사실을 동네방네 자랑했고, 진천랑은 평생을 고독하게 싸우다 죽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진천랑은 죽었다.
그러고 보니 초견파공안이 여전히 유지되는지 모르겠다.
조만간 누구든 붙들고 시험해 볼 수밖에.
‘이번만큼은 확실히 짓밟아주는 거다. 이 개 같은 세상을 움직이는 비열한 놈들을!’
이제 남궁천의 몸에 적응한 진천랑이 다시 한번 내공을 일주천해 보았다.
아직은 충분하지 않지만, 제법 나이에 걸맞은 내공이 혈맥을 따라 시원하게 내달린다.
‘확실히 남궁가의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은 상당히 훌륭해.’
창궁대연신공에 대해서는 전생에 남궁선을 통해 자세히 들었다. 당시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기도 했다.
때문에 남궁천의 몸으로 내공을 수련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심법뿐만 아니라 남궁선은 남궁세가의 모든 무공을 자신에게 점검받았다.
그러다 보니 앞으로 남궁천으로서 살아가는 건 문제 될 게 없다.
운기행공을 마치고 나서 팔굽혀펴기를 하는데,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복성입니다요.”
“훅, 훅, 들어와.”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남궁천이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눈이 마주쳤던 자였다.
그는 그동안 남궁천이 어떻게 생활했으며, 성격은 어땠는지 설명해 주곤 했다.
물론 대체로 안 좋은 얘기였다.
천하대살성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고, 늘 따돌림만 당했다는.
심지어 복성을 제외하면 시종들조차도 남궁천을 피해 다녔다니 말 다한 셈 아닌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복성만큼은 남궁천을 진심으로 따르는 것 같았다.
“훅, 훅, 무슨 일이야?”
복성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그는 남궁천이 이렇게 무언가에 열심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한데 죽음에서 부활한 남궁천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모래주머니를 차고 뒷산을 달리는가 하면, 아침저녁으로 운기행공도 빼먹지 않았다.
그야말로 밥 먹고 자는 시간만 제외하면 하루 종일 몸을 단련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공자님. 그러다가 도로 앓아눕겠습니다요. 적당히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요?”
“‘적당히’가 ‘대충’이 되고, ‘대충’이 ‘때려치우자’가 되는 법이다.”
“그, 그래도…… 괜히 또 무리하시다가 탈나실까 봐 그러죠.”
“이 몸은 앞으로도 계속 바쁠 예정이다. 할 말 있으면 빨리 뱉고 가라.”
“아, 그게…… 저어…….”
“왜 말을 못 하고 있어?”
마침내 남궁천이 몸을 일으켰다.
탄탄한 상체 위로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죽다 살아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몸도 변하는 걸까?’
지금껏 남궁천의 몸이 오늘처럼 튼실해 보인 적이 없었다.
복성은 무심히 떠오른 생각을 떨쳐내고는 물었다.
“저녁 바람이 좋으니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심이 어떤지요?”
“됐어.”
“의식이 돌아오신 후로 도통 바깥 구경을 하지 않으셨잖아요.”
“뒷산을 한 삼백 번은 올라갔다가 내려온 것 같은데 안 보고 뭐 했냐?”
“그, 그건 산이고요. 사람 사는 구경도 좀 하셔야지요. 그러지 마시고 바람이라도 쐬는 게 어떠세요?”
“그보다 가주전으로 가자. 할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아, 그건 안 돼요!”
복성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복성도 그제야 과하게 반응했다는 걸 깨닫고는 낯빛을 붉혔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조심하셔야 할 때니까 함부로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저어, 그래서 아직은 밤공기가 차기도 하고 방 안에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너 왜 그러냐?”
“예? 뭐가요?”
“아까는 바깥 공기를 좀 쐬라더니. 이제는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말라 하고. 어느 장단에 춤춰주면 되냐?”
“아, 제가 그랬나요? 하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 그저 공자님이 걱정돼서 정신없이 말을 꺼내다 보니…….”
“복성.”
“예? 예, 공자님.”
“너도 내가 맘에 안 들어? 대살성의 자식이라서 거리를 두고 싶은 거야?”
“예? 그럴 리가요! 제가 왜 공자님을……!”
“그럼 말해. 지금 이러는 이유가 뭐냐?”
“그, 그것이…….”
복성이 난감한 표정으로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 없으면 가주전으로…….”
“알겠습니다요! 말씀드리겠습니다요!”
진작 그럴 것이지.
남궁천이 팔짱을 끼고는 복성을 보았다.
복성이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실은…… 지금 가주전에 손님이 와 있습니다요.”
“손님? 누구?”
“황산윤가입니다.”
황산윤가라.
남궁천은 지난 보름 동안 복성에게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황산윤가는 원래 남궁세가보다 그 세력이나 규모가 한참 뒤처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궁세가가 몰락함에 따라 황산윤가가 반사이익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황산 인근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가문으로 손꼽히게 되었다고 한다.
“손님이 왔으면 응당 인사를 가야 할 것이 아닌가?”
남궁천이 성큼 걸음을 내딛자 복성이 다시 막아섰다.
“안 됩니다요! 절대요!”
“왜?”
“그, 그것이…… 윤가에서 막내 공자도 같이 왔습니다.”
“막내 공자?”
“예, 공자님과 함께 용천학관을 다닌 그 막내 공자 말입니다.”
“하면 학관 동기란 말이냐?”
“그렇습지요.”
이제야 대략의 사정이 파악됐다.
그간 들었던 복성의 말에 의하면 남궁천은 학관에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해왔다.
물론 대살성의 혈연이라는 이유로.
한데 분위기로 보니 황산윤가의 막내 공자란 녀석도 남궁천을 괴롭힌 생도 중 한 명이리라.
“자세히 설명해봐.”
복성이 안절부절못하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들어서 좋을 게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기억을 잃은 주인이 또 실수할지도 모르기에 별수 없이 모든 걸 털어놓았다.
생각보다 복성은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생전 아들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낸 사람이었으리라.
이야기를 들을수록 남궁천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학관동기들은 아들을 거의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몇날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게 괴롭히는가 하면, 대련을 핑계삼아 일방적인 구타도 일삼았다.
뿐만 아니라 강제로 오물과 벌레를 먹이거나, 온몸에 퍼붓기도 했다. 여인들 앞에서 짐승 흉내를 시켜 수치를 주는 일도 예사였다.
심지어 물고문을 하거나 불에 달군 부지깽이로 살을 지지는 장난까지 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허벅지의 화상 자국은 아마 그때 생긴 것이리라.
특히 황산윤가의 막내인 윤종승은 동향인 남궁천을 옹호하기는커녕 앞장서서 괴롭힌 놈이었다.
정말이지 그 내용을 가만히 앉아서 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복성이 아는 게 이 정도인데, 남궁천이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더하면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을까?
한편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복성은 열심히 곁눈질로 남궁천을 힐끔거렸다.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아는 걸 사실대로 말해주었지만, 역시 그러지 말 걸 하고 후회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사실을 알려서 주의를 주어야 더 조심하지 않겠나?
굳이 남궁천을 데리고 장원 밖으로 나가려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괜히 그 악랄한 윤종승과 마주쳐서 좋을 게 없을 테니.
그런데 어째 남궁천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겁을 먹고 몸을 사리길 바랐는데, 저건 분노하는 표정이 아닌가?
그 짐작 그대로 남궁천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 개 같은 것들이 감히 내 아들을 괴롭혀?’
그의 얼굴이 불이라도 뿜어댈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 말대로 바람 좀 쐬고 와야겠다.”
복성의 얼굴이 대번 환해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요!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합니까요? 어디로 모실까요?”
“가주전으로.”
“알겠습니다요. 그럼 가주전으로…… 예에엑?”
복성이 기겁을 하며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남궁천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감히 내 아들…… 아니, 날 괴롭혔다는 그 새끼 낯짝이 어찌 생겨먹었는지나 확인해야겠다.”
“헉! 공, 공자님! 진정하시고…….”
“걱정 마라. 얼굴만 확인하려는 거니까. 사고는 안 칠 거야. 설마하니 내가 손님을 죽이겠어? 어쩌겠어?”
“아,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공자님이 죽을 수도 있으니 그렇죠!
물론 뒤이어진 생각은 가슴으로 꿀꺽 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장삼을 걸치고는 가주전으로 향할 채비를 마쳤다.
“가자.”
“공, 공자님,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더 생각을…….”
“내가 조부님을 뵈러 가는데 그딴 녀석 눈치까지 살펴야 하는 거냐?”
남궁천이 으르렁거리자 복성도 더는 반박 못 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남궁천이 광기에 물든 미소를 지었다.
“똥이 더러우면 피할 게 아니라 치워야지. 아님 똥 싼 새끼에게 던져주든가. 적어도 내 성격은 그쪽이야.”
아뇨. 전혀 그쪽이 아니었습니다.
복성은 또 한 번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고는 돌아섰다.
이미 남궁천의 눈이 뒤집혔다는 것을 느꼈기에 말려도 소용없다는 걸 직감한 탓이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고 막 나가려고 할 때였다.
“어?”
복성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열린 문을 통해서 덩치 큰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오는 게 아닌가?
복성의 다리가 달달 떨렸다.
사내가 남궁천을 보고는 입매를 비틀었다.
“오오, 소문대로 정말 부활했구나? 너.”
그가 바로 황산윤가의 막내, 윤종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