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어차피 뒈지기 직전이니까 어디 한번 따져나 보자.
도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
천하대살성(天下大殺性).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무림맹은 나를 그렇게 낙인찍었다.
천살성을 타고났단다.
내가 너무 어려서 아직 날붙이를 손에 들기도 전부터 말이다.
이건 아주 그냥 날 무림공적으로 내몰아 밟아 죽이기로 작정했다는 뜻이지.
결국 나는 평생을 도망치면서 놈들과 싸웠다.
하지만 이젠 그 지긋지긋한 싸움도 끝이다.
장창 하나가 내 옆구리를 관통했고, 화살 다섯 자루가 전신 곳곳에 틀어박혔으며, 등짝은 사선으로 길게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른다.
휘이이잉.
마주쳐 오는 바람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시산혈해.
주변에 멀쩡한 놈이 없다.
사지가 갈가리 찢어져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시체들뿐.
그래, 전부 내가 죽였다.
그런 시체들 사이로 발을 디디며 다가오는 노인.
허연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무림맹주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하나 나는 알고 있다.
저 인자한 탈을 쓴 영감탱이의 뱃속에는 능구렁이가 백 마리쯤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을.
“어찌 손속이 이리도 잔인한고. 이래서야 망자가 편히 쉴 수 있겠는가?”
“쿨럭, 쿨럭! 개뿔……! 시체에서도 품위를 찾냐? 어차피 뒈지면 다 똑같은 것. 대가리에 구멍이 뚫려 뒈지나, 사지가 찢어져 뒈지나 매한가지지. 아, 영감은 둘 다 만들어줄까? 무림맹주니까 좀 더 특별한 느낌으로.”
내가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이죽거리자 맹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내둘렀다.
“자네의 초견파공안(初見破功眼)만 아니라면 진작 끝났을 것을. 무고한 희생이 컸구나.”
“뭐? 쿡, 크하하하하!”
내가 앙천광소를 터뜨리자 무림맹주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한참 만에야 웃음을 멈추고는 일갈했다.
“영감탱이가 지랄도 풍년이구나. 애초에 초견파공안이 아니었다면 네놈들이 날 무림공적으로 내몰았을까?”
“이런,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오늘 자네가 단죄를 받는 것은 그간 저지른 살생 때문일세. 그 오래전 하북팽가주를 시작으로 숱한 강호명숙들을 살해한 죄, 악인들을 선동하여 강호 질서를 어지럽힌 죄, 협의를 저 버리고…….”
“크큭. 염병하고 자빠졌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 맹주. 선후가 완전히 바뀌었어.”
“역시 뉘우칠 생각이 없나? 하나 오늘로 자네의 살행도 끝일세. 그간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설쳤겠으나, 이제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테지.”
“나 하나 죽이겠다고 수천 명을 끌어모아 놓고 하늘 위에 하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거친 호흡을 잠시 고른 내가 말을 마저 이었다.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무인은…… 남궁선(南宮鮮),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자네와 정분이 나서 본분을 망각했던 그 계집 말인가?”
“이 비열한 새끼들아. 그래도 한때는 여인임에도 천하제일룡(天下第一龍)이라며 떠받들더니 처세가 손바닥 뒤집듯 하는구나. 카악, 퉤!”
맹주가 짐짓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세가도 통탄할 일이지. 타고난 무재를 그리 허망하게 잃었으니.”
“개소리도 이젠 질린다. 그녀가 병에 걸려 죽은 것도 네놈들이 악의적으로 매도해서 화가 도진 것일 테지.”
나는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맹주를 노려보았다.
곧 죽을지언정 저 영감탱이만큼은 저승 동무로 삼으리라.
그런데 맹주가 뭔가를 떠올린 듯 빙그레 웃는다.
“그러고 보니 운명이란 게 참 얄궂어. 그 계집이 낳은 아이가 사흘 전에 죽었다지? 오늘 급보를 받았다네.”
용천혈에 모든 공력을 집중하던 내가 흠칫거렸다.
“그건 또 뭔 개소리냐?”
“호오, 모르고 있었나? 자네의 피를 이은 아들이 남궁선에게 있었다는 걸.”
이게 뭔 소린가?
그녀에게 자식이? 그것도 내 아들?
그럴 리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맹주가 예의 그 역겨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곧 저승에서 만날 사이가 아니던가? 자세한 건 직접 물어보게. 모처럼 일가족 상봉이 이루어질 테니.”
“무슨 개 같은 소리를……!”
내가 일갈을 내지르는 순간, 맹주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수신호(手信號).
쏴아아아아.
찰나 죽음의 그림자가 새카맣게 하늘을 덮는다.
쒸쒸에엑, 푹! 푸푸푹……!
“커억!”
단단한 철시들이 내 심장을 비롯해 전신에 틀어박혔다.
빌어먹을……!
상제(上帝)야. 막판에 이건 아니지!
내 아들이라니?
내게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들이 있었다니!
게다가 그 아들이 벌써 죽었다고?
다시 따져보자.
내가 도대체 뭘 그리 잘못했냐?
내가 정말 이 정도로 천벌을 받아야 하냐?
적어도 내 아들 얼굴은 한 번 보게 해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
니미럴, 상제야! 하늘아! 신령아!
너도 양심이 있으면 내게 제대로 살 기회 한 번은 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제길…….
’몸이 천천히 기운다.
쿠웅!
단단한 바닥이 얼굴을 때린다.
저벅저벅……!
쓰러진 내게 다가오는 맹주의 발이 보인다.
이내 탈을 벗은 놈의 야비한 미소가 눈앞에 흐릿하게 펼쳐진다.
“다음 생에는 부디 평범하게 태어나 선행만 베푸시게. 진천랑(眞天浪).”
1. 남궁세가라고?
춥다.
너무 춥다.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춥다.
지옥에 떨어진 걸까?
하긴 살아생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니 죽어서 좋은 곳에 가긴 글렀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춥잖아.”
진천랑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헉, 헉, 헉……!”
거친 숨과 함께 입에서 뭔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퉤! 퉤!”
뭐야, 이건? 쌀인가?
주변이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입안에 감도는 감촉으로 보면 쌀알 같다.
몸은 삼베로 친친 감겨 있었다.
다행히 이리저리 움직이니 삼베가 천천히 풀어진다.
그러고 보니 귓구멍과 콧구멍에도 솜뭉치가 틀어박혀 있다.
솜을 빼낸 진천랑이 이맛살을 와락 구겼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투덜거림도 잠시, 진천랑은 온몸이 얼어버릴 것만 같은 추위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혹시 여기가 불가에서 말하는 팔한지옥(八寒地獄)일까?
시간이 지나니 시야가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져 간다.
어디 보자.
그리 넓지 않은 방.
구석구석마다 각진 얼음덩어리가 가득하다.
문설주와 창호, 천장도 보인다.
중원에서 흔히 보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저승에도 방이라는 게 있구나.
아, 여기가 저승이라면 아들도 만날 수 있을까?
아니다.
아들이 지옥에 떨어졌을 리가 없지.
그래, 아들만큼은 이따위 지옥에 있어선 안 된다.
다시 살펴보자.
향도 피워 놨다.
침상 아래쪽을 보니 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어째 저승이라기엔 좀 이상한데.’
바로 앞에 놓인 관, 몸을 꽁꽁 싸매고 있던 삼베, 코와 입을 막아놓은 솜뭉치, 입안에 가득 들어 있던 쌀.
진천랑이 조금 전에 뱉어낸 쌀을 매만졌다.
“혹시 그럼 이게 반함(飯含: 시신 입에 넣는 쌀)?”
이제야 대충 상황 짐작이 된다.
‘뭐야? 지금 내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던 거야?’
염습(殮襲)을 해두고 관까지 준비했다는 말은 죽은 지 최소 사흘이 지났단 말이다.
그럼 입관하기 직전이란 말인데…….
날 장례까지 치러줄 사람이 있었나?
그 맹주 새끼 성깔이면 내 모가지가 무림맹 정문에 자랑스럽게 효시되어 있어야 할 텐데.
아니, 그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지?
그때 문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사내 두 명이 삼베를 한아름 들고 들어왔다.
“관도 옮겼으니 서두르세. 곧 날이 밝을 테니 어서 끝내자고.”
“후유, 우리 공자님 참 안됐습니다. 사흘이 지나도록 조문도 거의 없고. 예전엔 남궁세가라면 천하가 고개를 조아렸는뎁쇼.”
“거, 쓸데없는 소리. 대살성의 피를 이었잖은가? 솔직히 나는 장례를 치렀다는 이유로 해코지라도 당할까 겁나는구먼.”
“에이, 설마. 그래도 망자에 대한 예의는 지켜……! 허으아악!”
말을 뱉던 사내가 기겁을 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찌 놀라지 않으랴.
시체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사내가 이맛살을 찡그렸다.
“음? 갑자기 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러무우아악! 귀, 귀, 귀시니으허으응…….”
사내는 진천랑과 눈이 마주치더니 아예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진천랑이 이맛살을 찡그리고는 걸어왔다.
“어이, 이봐.”
“흐이이익! 이 잡, 잡귀야! 물, 물럿거라! 써, 썩 물럿거라아!”
용케도 기절하지 않은 사내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난 잡귀도 원혼도 아냐. 여긴 어디냐?”
“뭐, 뭣?”
“글쎄, 아무래도 내가 아직 죽진 않은 모양인데. 여긴 어디냐고 물었다.”
그제야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천랑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형체를 가진 사람이다.
다만 그것이 분명 죽었던 자의 몸이라는 게 기이할 뿐.
사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 정말…… 공자님이십니까요?”
“공자……?”
“잠, 잠시 실례를……!”
사내가 덜덜 떠는 손으로 진천랑의 발을 더듬었다.
분명히 만져진다.
더듬더듬.
무릎을 지나 허벅지를 지나서…….
잠깐. 그 손, 어디까지 올라올 거냐?
진천랑이 손을 탁 쳐내니, 사내가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헉! 정, 정말로…… 살, 살, 살아나신 겁니까?”
“뭐, 일단은 그런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냐니까? 한 대 맞고 말할래?”
진천랑의 짜증에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돌연 달려 나가며 비명처럼 외쳤다.
“맙소사! 공, 공자님이 부활하셨다! 공자님이 되살아나셨습니다앗!”
방안에 덩그러니 남은 진천랑이 멍하니 서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들이 진짜……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할 것이지!’
그나저나 사람이 죽으면 원래 이렇게 깡말라 버리는 걸까?
팔다리를 내려다보니 피골이 상접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마침 한쪽 벽에 걸린 동경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날이 밝아오는지 열린 문틈으로 환한 빛이 스며들었다.
무심히 동경을 본 진천랑은 깜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헉! 뭐, 뭐야? 이게 누구야?”
동경에 비친 낯선 얼굴.
하지만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드는 앳된 외모.
반듯하고 잘생긴 얼굴이지만, 어딘지 유약해 보이는 모습이다.
뭐지? 이건 내가 아닌데?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 정도 됐을까?
그때였다.
마침 기척이 들리더니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상복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격정이 서린 얼굴로 진천랑을 보고 있었다.
순간 진천랑이 돌처럼 굳었다.
‘남궁선……?’
아니다.
정말 많이 닮았지만 그녀가 아니다.
“넌 뭐……?”
짜악!
순간, 뺨이 휙 돌아가면서 눈앞이 번쩍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아니, 이 미친년은 왜 보자마자 귀싸대기부터 날리는 거야!
머리끝까지 화가 난 진천랑이 휙 돌아서는데,
와락!
이건 또 뭐야?
갑자기 여인이 뜨겁게 끌어안는 것이 아닌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귓가에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 울린다.
격동하는 여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온기를 느껴서인지 불같이 일던 마음도 조금 가라앉았다.
마침내 여인이 잔뜩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천만다행이다.”
그녀의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