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신기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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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신기한 인연
2022.08.13.
준호는 진지한 얼굴로 부모님과 마주 앉았다.
아버지 우식이 물었다.
“무슨 얘기이길래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미영도 우식 옆에 앉았다.
“중요한 할 얘기가 뭔데? 해 봐.”
준호가 굳은 얼굴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보고 입을 열었다.
“저 결혼합니다.”
우식도 미영도 놀라 눈이 커졌다.
“결혼?”
미영이 불안한 얼굴로 상체를 내밀며 물었다.
“누구랑?”
준호가 미영을 보며 대답했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그분 맞습니다.”
미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그 애와는 헤어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선을 보라고 몇 번을 설득해도 준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잊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할 때부터 불안하긴 했는데 기어이 다시 만나나 보다.
“안 돼.”
미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지금 허락받는 거 아닙니다. 제 결정을 통보하는 겁니다.”
준호의 목소리 또한 단호했다.
“뭐?”
미영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듣고 있던 우식이 궁금한 듯 물었다.
“대체 누구 얘기하는 거야? 알아듣게 얘기 좀 해 봐라.”
미영이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말했다.
“여보, 그 애는 안 돼요. 더 좋은 곳에서 사위 삼자고 난리인데 왜 그런 곳에 장가를 가겠어요?”
“당신도 만났어?”
“만났어요. 그냥 평범……. 아니, 당신도 별로 마음에 안 들 거예요.”
“어떤 아가씨인데 그래? 나도 한번 만나 봐야지.”
미영이 일어나 방으로 가더니 서류를 들고 왔다.
“자, 이거 좀 봐요. 집안도 그렇고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미영이 들고 온 건 시은에 관해 따로 뒷조사한 서류였다.
“그게 뭡니까? 설마 뒷조사했습니까?”
준호가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물었다.
“그래. 네가 얘기를 안 해 주니 내가 궁금해서 먼저 알아봤어, 왜!”
준호는 뒷조사까지 한 어머니에게 치가 떨렸다.
“갈수록 어머니한테 실망스럽습니다. 저 부모님께 결혼 허락받는 거 아니라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저 서른셋입니다. 혼자 결혼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구청 가서 혼인신고 하면 그만입니다.”
“뭐?”
미영이 눈을 부릅뜨고 준호를 노려보았고 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그만들 해!”
우식이 언짢은 듯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는 서류를 보더니 준호에게 물었다.
“그 아가씨 아버지가 군인이셨다고? 어느 부대에서 근무하셨는지 알아?”
우식은 서류에 적힌 이름 석 자가 눈에 익었다.
“내가 아는 그분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식의 말에 준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시는 분입니까?”
“아버지 존함, 민정훈. 89년도에 ○○사단 XX 부대에서 근무했던 민정훈 중사, 그분인지 궁금하다.”
미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여보. 혹시 당신 목숨 구해 주었다던 그 중사분 말하는 거예요?”
“그래. 당신도 기억나지? 내가 일병 때 지뢰 밟았을 때 날 구해 주었던 그분.”
미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군대에 늦게 간 우식은 그때 신혼이었고 미영은 당시 준호를 임신한 상태였다.
미영도 그분이 아니라면 당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거란 생각에 무척 고마워했던 기억이 있다.
우식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준호야. 너한테도 내가 얘기했었지? 내가 밟은 지뢰를 그 중사님이 본인 몸을 던져 대신 막아줬다고.”
준호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그 얘기를 해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넌 유복자가 되었을 거란 얘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다행히 불발탄이어서 터지지 않았지만 터졌다면 그분은 그때 나 대신 돌아가셨을 거다.”
미영도 잘 알고 있던 이야기라 시은의 아버지가 그분일 수 있다는 얘기에 혼란스러웠다.
기를 쓰고 반대하던 조금 전과는 확연히 표정이 달라졌다.
우식이 준호에게 말했다.
“한번 물어봐. 89년도 ○○사단 XX 부대. 그분이 맞는지.”
준호는 일어나 조용한 곳으로 가서 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것 같다고 정확한 부대를 물었다.
[○○사단은 맞아요. 아빠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게요.]
잠시 후 시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맞대요. 89년까지 거기서 근무하시고 다른 부대로 가셨대요.]
“진짜 맞습니까?”
준호는 신기해하며 웃었다.
[아버님께서 우리 아빠랑 같이 근무하셨대요? 이런 인연이 다 있네요. 신기하다.]
“시은 씨. 저 시은 씨 아버님 얘기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어요.”
[준호 씨도 우리 아빠 알아요?]
“저한테는 아주 친숙하고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저희 아버지의 생명의 은인이시거든요.”
[예? 우리 아빠가요?]
*
얼마 후 시은과 준호는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준호가 아버지를 모시고 상견례 장소로 향하던 길, 우식은 가슴이 설레고 긴장되어서 청심환까지 먹었다.
시은의 아버지가 생명의 은인이었던 그 중사가 맞다는 얘기를 듣고 미영도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상견례 장소인 한식당에 도착하자 시은의 부모님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우식이 들어서자마자 시은의 아버지인 정훈을 보았다.
머리엔 흰머리가 늘고 주름도 깊게 파였지만 한눈에 그때 그 민정훈 중사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우식은 정훈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주, 중사님. 저 기억하십니까?”
정훈도 우식을 기억했다.
“기억하고 말고요. 이게 얼마 만입니까?”
“중사님! 크흐흡!”
우식이 정훈에게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우식은 그때 이후로 정훈이 다른 곳으로 근무지를 옮기는 바람에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제대 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도 찾지 못했었다.
우식은 감격해 한참 눈물을 흘렸다.
준호도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태어나 처음 보고는 마음이 울컥했다.
어떻게 시은을 이런 인연으로 만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준호가 시은의 손을 꼭 잡았다.
시은의 아버지가 미영을 보더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그렇게 독한 얼굴로 반대하던 미영도 정훈 앞에서 순한 양처럼 변해 있었다.
“그럼 준호 군이 그때 배 속에 있던 아이였습니까?”
“네.”
미영이 순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걸 본 준호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준호와 시은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우식이 설명했다.
“나 대신 몸을 던져 날 구했을 때 내가 여쭈어본 적이 있었다. 본인이 죽을 수 있는데 왜 그랬느냐고. 그때 이분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느냐?”
우식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본인은 결혼도 안 한 혼자 몸이니 죽어도 괜찮지만 나는 죽으면 아내와 아내 배 속에 아기를 누가 보호해 주냐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준호가 감격한 표정으로 예비 장인을 바라보았다.
시은과 자신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 같았다.
좋은 분위기 속에 상견례가 이어졌고 술 한 잔씩을 나누어 마신 우식과 정훈은 그때 그 사건을 또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내가 지뢰를 밟고 벌벌 떨고 있는데 중사님이 날 세게 밀쳐내며 자신의 몸으로 지뢰를 덮어버린 거야. 죽을 각오로 뛰어드신 거지. 그게 불발탄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불발탄이었으니 이렇게 훌륭한 며느리가 세상에 태어나고 우리한테 온 게 아닙니까? 하하.”
*
민후가 자정이 넘은 시각을 확인하고는 은조의 공부방으로 갔다.
첫 중간고사 시험이라 며칠 전부터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었다.
똑똑.
노크하고 들어가니 은조는 책에 파묻혀 공부하고 있었다.
“들어가도 돼?”
민후의 목소리에 은조가 그나마 등을 폈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 1등 하겠어.”
“잘하고 싶어서 그래요. 늦게 공부 시작했는데 동생들보다 잘해야 면이 설 것 같아서.”
“못해도 돼. 난 당신이 하고 싶었던 공부, 즐기면서 했으면 좋겠어. 그만 자자. 12시 넘었어.”
은조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조금만 더 보고요. 잘 안 외워지는 부분이 있어서 이것만 보고 잘게요. 먼저 자요.”
민후가 은조가 공부하던 책을 덮으며 말했다.
“잘 안 외워지면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다시 봐. 뇌도 쉬게 해야지 잘 돌아간다고. 당신 이러다 코피 나겠어. 지금 몇 시간째 공부만 하는 줄 알아?”
은조가 피로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럴까요?”
“내일 아침에 내 차로 데려다줄 테니까 차에서 봐. 난 그날 회의 자료 아침에 차에서 매일 보는데 그때가 제일 머릿속으로 잘 들어오더라고.”
은조는 민후 말대로 뇌를 쉬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만 자고 내일 다시 봐야겠다.”
몇 시간째 앉아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했던 은조가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민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은조의 허리를 팔로 안았다.
“방에 가서 안마해 줄게. 어깨가 많이 뭉쳤을 거야.”
은조가 웃으며 눈을 흘겼다.
“그 안마 좀 의심스러워서 못 받겠는데요?”
안마나 마사지를 하면 항상 같은 결론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은조의 합리적 의심이었다.
“의심스럽다니. 난 순수한 의도야. 당신 열심히 공부하는 거 안쓰러워 안마해 주고 싶은 거라고.”
침실로 걸어가며 은조가 말했다.
“그럼 진짜 안마만 한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그거 안 한다고 약속할 수 있냐고요?”
은조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자신의 몸을 만지면서 민후가 그 생각을 안 할 리가 없다고 판단해서다.
“당연하지. 대체 날 뭐로 보고. 내가 그 생각만 하는 짐승인 줄 알아?”
은조가 못 미덥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대신 당신이 원하면 할 수 있어. 그건 예외야.”
침실로 가 은조를 침대에 엎드리게 하고 민후가 안마를 시작했다.
처음엔 뭉친 어깨를 살살 풀어 주었다.
“아, 시원해. 아아. 거기 완전 시원해.”
은조는 엎드려 옆으로 얼굴을 돌리고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뭉친 어깨와 뻣뻣한 목을 풀어주고 척추를 따라 내려가며 안마를 했다.
“안마 어디서 배웠어요? 왜 이렇게 잘해요?”
은조는 나른해지는 목소리로 만족감을 드러냈다.
“사랑하는 마음과 정성이 있으면 안 배워도 잘할 수 있어.”
민후의 손길에는 점점 사심이 담겼다.
허리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압력의 강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간지러워요.”
은조가 간지럽다며 웃기 시작했다.
“여기가 간지럽다고?”
민후의 손길은 더 짓궂어졌다.
아내의 약점을 정확히 아는 민후가 안마를 가장해 약점을 공략했다.
은조가 눈을 감고 웃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진짜 안마만 한다 싶더라니. 아…….”
은조의 입술 사이로 야릇한 소리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은조는 알면서 당한다는 듯 그의 음흉한 손길을 느꼈다.
시원하게 풀어지던 몸이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은조의 입술이 더 벌어지고 더운 숨이 흩어졌다.
은조가 민후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이렇게 해놓으면 내가 못 참겠잖아요.”
은조가 민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은조에게 입술이 물린 민후가 큭큭, 소리 내 웃었다.
“안 하기로 약속했지만, 당신이 원하면 예외라고 했었지?”
“응. 어서 빨리.”
은조가 다급한 표정으로 민후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