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 데리러 왔어 (98/100)


98. 데리러 왔어
2022.08.09.



 
민후의 불안함 속에도 은조는 다음날 엠티를 갔다.


“출발 장소가 강남 어디라고? 출근하는 길에 데려다줄게.”

민후는 단체 버스가 출발하는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저 여기서 내려줘요.”

“왜? 바로 앞까지 데려다줄게.”

“이렇게 고급 리무진 타고 저기 갔다가 시선 집중되라고요?”

은조가 한주 그룹 회장 사모님이란 사실은 알음알음 알고 있었지만, 은조는 학생들 사이에서 튀지 않으려고 등교도 경차를 이용했었다.


“여기서 걸어갈 테니까 내려줘요.”

은조가 고집을 피워 민후는 할 수 없이 기사에게 눈짓으로 세우라고 했다.


“잘 다녀와. 도착해서 전화하고.”

“알았어요.”

은조가 차 문을 열려고 하자 민후가 어깨를 잡았다.


“그냥 내리려고?”

은조가 운전기사 눈치를 보더니 민후의 입술에 가볍게 촉, 입을 맞추었다.

민후는 짧게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이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운전기사만 없었더라면 좀 더 진한 키스를 나누었을 것이다.

은조가 차에서 내려 배낭을 등에 메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민후가 말했다.


“출발해.”

짧은 지시에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민후는 단체 버스가 있는 곳을 지나며 모인 학생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여학생 비율이 많은 학과이지만 남학생들도 생각보다는 많았다.

민후는 남학생들 모습을 언짢은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민후의 차가 지나갈 때 학생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국내에 몇 대 없는 최고급 리무진을 보고는 학생들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
.
.

민후는 회사로 출근해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룹 회장의 업무는 회의와 미팅의 연속이었다.

오전 내내 각종 보고와 기획안을 듣고 점심에는 약속된 오찬을 하고 오후에도 회의는 이어졌다.

점심과 저녁 약속 신청이 쇄도하고 석 달 치의 식사 약속이 이미 예약되어 있었다.

오늘은 아내가 엠티 가서 저녁을 함께 먹지 못하니 저녁 약속도 잡았다.

저녁 식사와 함께 간단하게 와인도 마신 민후가 열 시쯤 귀가했다.

집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보통은 아내가 태풍이를 안고 나와 ‘아빠, 오셨네.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인사해야지.’ 하면서 어린 아기의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시키고는 했었다.

인사를 받은 민후가 태풍이를 안아 들고 위로 번쩍번쩍 들면 태풍이가 까르르 웃었고, 아내는 애 다친다며 민후의 등을 찰싹 때리고는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와 아내와 아기를 보면 피로가 싹 가셨는데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아내가 태풍이를 장모님 댁에 데려다주어서 아기 소리가 안 나니 집이 적막했다.

민후는 넥타이를 당겨 풀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밤낮없이 바쁜 일정 속 혼자 여유 있게 쉬는 시간도 좋을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다.

아내가 없는 집에 들어오는 것이 생각보다 쓸쓸했다.

민후가 핸드폰을 들어서 보았다.

아내는 도착하고 한 번 전화를 한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자주 전화하라고 했는데…….”

민후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신호음이 한참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메시지가 나오자 민후가 화면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논다고 정신 팔렸지?”

다시 전화를 걸어도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계를 보자 지금쯤 한창 술 파티가 열렸을 것 같았다.


“술 한잔 먹고 벌써 취해서 어디 쓰러져 있는 거 아니야?”

민후는 술에 약한 은조가 걱정되었다.

엠티에서 술 먹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면 챙겨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잠들어 있다고 해도 누구 하나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민후는 불안해졌다.

통화만 되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통화가 안 되니 점점 초조해졌다.

일곱 번째 통화를 시도했을 때였다.

그녀가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후 씨?]

목소리를 듣자 민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녹아내린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전화 많이 했어요? 진동으로 해 놓아서 몰랐어요.]

목소리를 들으니 다행히 술에 취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대신 숨이 찬 목소리였다.


“달리기라도 했어? 왜 이렇게 숨차해?”

[하, 방금 폐가 체험해서. 너무 무서웠어요. 막 도망 나오느라 얼마나 뛰었던지.]

“폐가 체험?”

[네. 귀신 나올 것 같아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선배들이 장난치느라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어떤 그림인지 머릿속에 그려지자 민후는 못마땅했다.

겁많은 아내가 얼마나 벌벌 떨면서 그런 곳에 들어갔을지 눈에 보였다.


“많이 놀랐겠네. 안 그래도 겁도 많은데.”

[주저앉아 울었다니까요.]

“심약한 사람한테는 위험할 수도 있는 놀이를 하고 그래?”

민후는 엠티 프로그램이 몹시도 마음에 안 들었다.


[아, 발이야.]

“왜? 발 다쳤어?”

[아까 놀라 뛰어오면서 발목을 약간 접질렸거든요. 밤이라 안 보이는 데서 막 뛰었더니.]

발까지 접질렸다니 민후는 더 화가 났다.


“아니, 무슨 엠티 프로그램을 그따위로 짰어? 위험요소가 이렇게 많은데? 기획한 사람이 누구야? 그게 단합이 잘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민후가 언성을 높이자 은조가 그를 달랬다.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봐요?]

“발목 얼마나 다쳤는데? 걸을 수는 있어?”

[걸을 수는 있는데 시큰거리기는 해요.]

민후가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놔두면 더 심해질 텐데. 밤에 아플지도 몰라.”

[파스 있던데 파스 붙이고 자죠, 뭐.]

“아프면 냉찜질을 먼저 해 주는 게 좋아. 냉찜질 팩 같은 거 있어?”

[찜질팩요? 여기에 그런 게 있겠어요? 수건 찬물에 적셔서 두르고 있을게요.]

“얼음을 대야지, 수건으로는 안 돼.”

곁에 있었더라면 민후가 응급처치를 해 주었을 텐데, 애가 탔다.


“발을 가능한 안 쓰는 게 좋아. 몸을 움직이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절대 하지 마. 발 다쳤다고 빠져. 가능한 한 움직이지 말라고.”

[민후 씨, 내가 알아서 할게요.]

민후는 여전히 걱정되어서 한숨만 나왔다.


[단체생활하는 곳에서 다쳤다고 열외로 하고 싶지 않아요.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

“그게 왜 민폐야? 다쳤는데. 당신 몸은 당신이 보호해야지.”

[어? 지금 모이래요. 그만 끊을게요.]

은조는 가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발을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는 민후는 속상하고 애가 타 죽을 것 같았다.

저렇게 아픈 몸으로 내일까지 저곳에 있도록 놔둬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자신이 곁에 있으면 움직이지도 못하게 업어서 이동시켰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발을 다친 아내가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정이 다 되어 다시 통화했다.


“발은 좀 어때?”

[좀 부었어요.]

“부었어? 아픈 건?”

[밤 되니까 아까보다 더 아프긴 해요. 내일 서울 가면 바로 병원에 가야겠어요.]

민후가 얼마나 부었냐며 발목 사진을 찍어서 보내라고 해서 은조가 사진을 보냈다.

퉁퉁 부어오른 발목을 본 민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되겠어. 병원 가자.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

[내일 아침 먹고 바로 나간대요. 내일 서울 가서 병원에 가면 돼요.]

“밤새도록 고통 참으면서 어떻게 자겠어? 그리고 올 때는 누가 업어주기라도 한대? 또 걸어야 할 것 아니야?”

[민후 씨. 여기 섬이에요. 배도 끊겼어요. 민후 씨 못 와요.]

“헬기로 가면 돼.”

[네?]

“헬기로 가면 20분이면 가. 짐 챙기고 있어.”

[자, 잠깐만요.]

은조는 진심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로 헬기를 타고 오겠다고요?]

“응급상황이니까.”

민후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드레스룸으로 가 아무 옷이나 집어 들었다.

재킷에 팔을 끼워 넣으며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다 일어난 목소리로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예.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문 실장. 지금 당장 헬기 준비해. 남해 섬으로 간다.”

[예?]

“당장. 시간이 없어.”

[지금이요?]

“그래.”

[지금 시간은 헬기 띄우기가 힘…….]

“응급상황이야! 무조건 준비해.”

전화를 끊고 민후는 회사 전용 헬기 격납고로 향했다.

*

은조는 헬기로 여기까지 오겠다는 민후의 말이 반신반의했다.


‘진짜로 오겠다는 건가?’

혹시 모르니 가방을 챙겼다.

펜션 거실에서는 아직 술자리가 끝나지 않았다.

몇몇은 쓰러져 잠이 들었고 남학생 몇몇은 벌겋게 술에 취한 얼굴로 무기에 관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2017년에 이미 아파치헬기 76대를 들여왔어. 아파치가 공격 헬기란 거 다 알지? 아파치헬기 1대로 1개 전차대대를 파괴할 수 있다, 이거야. 이런 헬기가 76대가 있어! 야, 죽이지 않냐?”

술에 취한 이가 공격헬기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데 어디선가 헬기 소리가 났다.

두두두두.

술에 취한 이들은 환청인가 생각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창문을 통해 환한 빛이 들어오며 프로펠러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렸다.

3학년 과대표 남학생이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펜션 앞 공터에 헬기가 바람을 일으키며 착륙하고 있었다.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이 창문 안으로 휘몰아쳤다.

얼굴에 환한 빛을 받은 채 바람을 맞는 과대표는 마치 환상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헬기가 착륙하고 민후가 내려서 걸어왔다.

재킷을 입은 민후가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보였다.


 


“……대박.”

넋이 나간 표정의 과대표에게 은조가 다가가 말했다.


“선배님, 죄송한데 저 발목 다쳐서 남편이 데리러 왔거든요. 죄송합니다. 먼저 갈게요.”

헬기에서 내려 걸어오는 민후를 환영처럼 보고 있던 과대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예? 남편이 데리러 오셨다고요?”

“네. 아까 발 접질린 게 밤 되니까 많이 부어올라서요.”

은조는 미안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폐 끼치는 것 같아 정말 죄송합니다.”

과대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다치셨는데 가셔야죠.”

과대표가 헬기를 다시 보며 말했다.


“헬기로 데리러 오다니, 완전 지리네요.”

민후가 다가와 은조를 부축하며 과대표에게 말했다.


“밤늦게 요란스럽게 나타나서 죄송합니다. 아내가 다쳐서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아서요.”

“아, 예. 괜찮습니다. 형님. 누님 얼른 모시고 가세요.”

넉살 좋은 과대표가 민후에게 형님이라 부르자 민후가 쳐다보았다.


“누님의 남편분이시니 형님이시죠.”

과대표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민후 씨, 우리 과 과대표 선배예요.”

은조가 소개하자 민후가 지갑을 꺼내 지폐 다발을 꺼냈다.


“엠티 찬조금을 미리 못 드려 죄송합니다.”

과대표가 오만 원 다발을 들고 놀라 입이 벌어졌다.


“아침에 이거로 해장들 하시고 제가 용돈 드리는 거니까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민후는 은조의 발목을 보더니 번쩍 안아서 들었다.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을 가르고 은조를 안고 헬기로 걸어갔다.

과대표 눈에는 빛 속으로 걸어가는 그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듯 황홀했다.


“형님. 형님은 저의 롤모델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