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나한테 다시 올 수 있습니까?
(9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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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나한테 다시 올 수 있습니까?
2022.08.02.
[여보세요.]
전화기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시은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의 목소리였다.
눈은 커다래지고 심장은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전화번호 바꾸고 연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번호를 알았을지 궁금증도 잠시, 쿵쾅거리던 가슴의 통증이 아릿하게 전해졌다.
[하나만 묻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어머니 만난 얘기 왜 안 했습니까?]
가슴이 욱신거리고 목구멍으로 무언가 울컥 차올랐다.
[어머니가 한 얘기 설마 믿었습니까?]
이 목소리, 얼마나 그리웠던 목소리였던가.
[나한테 확인할 생각은 왜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비참해서 확인하기 싫었다.
어머니가 시은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설사 어머니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전 자신 없었어요. 절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게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더 만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나한테 마음이 식었다고 거짓말한 겁니까?]
“…….”
[그거 진심 아니었죠?]
“지금 와서 그게 중요한가요?”
준호는 숨을 크게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지금 와서 중요하지 않다는 건 자신과는 끝난 지 오래고 새로운 연인이 생긴 마당에 그 당시의 진심 따위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로 들렸다.
[어머니가 얘기한 건, 그냥 어머니의 바람일 뿐이었습니다. 전 시은 씨 말고 결혼 생각한 여자는 없었습니다. 시은 씨가 오해하는 게 싫어서 바로잡으려고 전화한 겁니다.]
시은은 손이 떨렸다.
결혼을 생각한 여자가 자신 말고는 없었다는 말에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시은은 준호가 지금쯤은 로스쿨 다닌다던 여자와 결혼 얘기가 오갈 것으로 생각했다.
이별 후 준호에게서 연락이 없었기에 나 같은 건 벌써 잊고 그 여자와 잘되어가는 줄 알았다.
“그, 그럼 지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혼자예요?”
[네.]
시은을 잊지 못해 준호는 아직 혼자인데 오늘 본 시은의 모습은 혼자가 아니었다.
[오늘 사실 커피숍 찾아갔었습니다.]
준호의 말에 시은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오늘 함께 식사하러 간 사람, 남자친굽니까?]
“……네?”
[시은 씨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우연히 봤어요.]
오늘 찾아왔다는 얘기에 시은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새로 사귀는 사람, 맞습니까?]
“아니에요.”
다소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가 오해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점장님이에요. 밥 사줄 일이 있어 그냥 밥을 사드리려고 간 것뿐이에요.”
점장이 사심을 가지긴 했으나 그걸 딱 잘라 거절했다는 얘기까지는 할 필요 없었다.
[사귀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네.”
전화기에서 들리는 준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어딥니까? 지금 좀 만나겠습니까?]
시은은 만나고 싶었다.
지금쯤 결혼 준비를 할 거로 생각했던 준호가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 강렬하게 느껴져 순식간에 마음이 흔들려버렸다.
그와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고 하루빨리 잊어야 한다는 생각들은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집이에요.”
[어딥니까? 집.]
*
지인 결혼식이 끝나고 은조는 차에 올라탔다.
곧바로 집으로 가려니 아쉬웠다.
결혼식 참석으로 아침부터 숍에 가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전문가에게 받은 게 아까웠다.
이렇게 화장이 잘된 날은 남편과 데이트라도 해야 하는데 민후는 지금 해외 출장 중이었다.
그룹의 총수가 된 후로 그는 휴일도 없이 일할 때가 많았고 출장도 잦아졌다.
출장을 가도 매일 전화는 물론이고 하루에 두세 번씩 영상통화를 하긴 했지만 만질 수도 없고 체취도 느낄 수 없는 영상통화로는 그리움을 달래기엔 부족했다.
그래도 내일 아침에는 그가 출장에서 돌아온다고 했다.
은조는 오늘 결혼식 참석보다 민후가 온다는 사실에 어제부터 설렜다.
생각난 김에 은조가 민후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다행히 시간에 여유가 있었던지 바로 전화를 받았다.
화면 가득 민후의 얼굴이 보이자 은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은조의 얼굴을 보고 반가워하는 건 민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전화하려고 했는데, 딱 전화가 왔네.]
“텔레파시가 통했네요.”
화면 속 은조를 보더니 민후가 물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어디 가?]
“지인 결혼식 왔어요. 끝나서 이제 가려고요.”
[그렇게 예쁘게 하고 가면 신부보다 더 예뻐서 민폐잖아.]
“치, 아무리 그래도 신부보다는 안 예쁘거든요?”
은조가 웃으며 대답했다.
[안 봐도 신부보다 예뻤을 것 같은데.]
은조가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전문가한테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았더니 저도 무척 마음에 들어요. 화장도 잘되었는데 그냥 집에 들어가려니 너무 아쉬워요.”
[그러게. 하루만 늦게 결혼식 했으면 나랑 데이트할 수 있었는데.]
민후도 예쁜 아내를 화면으로만 봐야 해서 무척 아쉬워했다.
[집에 그냥 들어가기 아쉬우면 친구 시은 씨 카페에라도 다녀와. 바람도 쐬고.]
다른 날 같았으면 시은의 카페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준호가 시은을 만나러 갔기 때문에 오늘은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은 안 가는 게 좋아요.”
[왜?]
“오늘 결혼식장에서 관장님 만났거든요. 시은이 있는 곳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어요.”
[그래?]
민후도 은조에게서 들어 시은의 연애 사연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잘되면 좋겠네.]
“오늘 언제 출발해요?”
[여기 시간으로 밤 9시 비행기야. 한국엔 내일 새벽 5시쯤 도착해.]
“오늘 잠 안 올 것 같아요. 너무 설레서.”
[나도 어제부터 설렜어. 당신 만날 생각에.]
부부는 마치 장거리 연애를 하는 연인처럼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했다.
조심해서 오라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은조는 그가 도착할 시간까지 몇 시간쯤 남았나, 셈을 해보았다.
15시간 정도 후면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상기된 얼굴로 차의 시동을 걸었다.
.
.
.
은조는 늦은 밤까지 침실로 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 누워도 오늘은 잠을 못 잘 것 같아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 예쁘다고 칭찬받은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았다.
예쁜 모습으로 그를 맞이하고 싶어서.
잠을 자지 않으려고 거실에서 IPTV로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3편 정도 보면 그가 도착할 것 같았다.
평소에 보려고 점찍어 두었던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 3시가 넘어가니 눈이 감기기 시작했지만, 눈을 부릅뜨고 참았다.
하지만 머리를 기대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거실 통창으로 불그스름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삐비비빅. 도어락 비번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출장 갔던 민후가 돌아왔다.
거실에 조명과 TV가 켜져 있어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민후가 거실 쪽을 쳐다보았다.
은조가 손에 리모컨을 쥔 채로 소파에 기대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를 발견한 민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거의 2주 만에 보는 아내라 반가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다가가 잠든 아내 옆에 살며시 앉았다. 가죽시트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TV에 영화가 계속 재생되고 있어 민후가 아내의 손에서 리모컨을 천천히 빼냈다.
그래도 아내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머리를 기대고 잠든 아내의 얼굴에 코와 입을 가까이 댔다.
그리웠던 아내의 체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입 맞추고 싶어 몸이 벌써 안달이 났다.
잠든 아내를 깨우기는 미안했지만 그래도 참을 수 없었다.
민후가 아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아내의 눈꺼풀이 스르르 들렸다.
은조가 눈을 떠 민후를 보았다.
은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민후의 목을 끌어안았다.
“……민후 씨.”
민후도 은조를 두 팔에 가두어 꼭 끌어안았다.
“하아, 여보.”
그녀의 허리와 등에 팔을 감고 어깨에 코를 박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미치게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
서로를 꼭 끌어안았던 부부는 몸을 떼어내고 곧바로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단숨에 서로의 입술을 삼키며 키스했다.
민후는 은조의 뒷머리를 손으로 감고 다급하게 입술을 물어 숨결을 파고들었다.
얽히는 서로의 숨결에 온몸의 세포가 그녀임을 알아채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몸에 열기가 퍼졌다.
서로의 입술 사이로 농도 짙은 숨이 흩어졌다.
“하아, 못 참겠어.”
민후가 입고 있던 슈트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몸이 달아오른 건 은조도 마찬가지였다.
은조도 붉게 상기된 얼굴로 민후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다급한 손길로 셔츠 단추를 하나씩 푸는 게 성에 안 찼던지 민후가 셔츠를 양옆으로 뜯어버리듯 벌렸다.
두두둑.
단추가 뜯겨나가며 셔츠가 벌어지고 그리웠던 남편의 완벽한 복근이 드러났다.
셔츠를 벗어 던지는 민후에게 은조가 달려들어 다시 그의 입술을 물었다.
“아…… 민후 씨.”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아내에 민후는 어느새 폭발할 듯 몸이 반응해 있었다.
민후가 은조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거실 TV에 영화는 혼자 재생되든 말든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부부는 곧바로 침대에 몸을 겹쳐 누웠다.
*
준호는 서울로 향하던 차를 다시 돌렸다.
시은의 집이 있는 곳으로 달리는 준호는 심장이 아까보다 터질 것처럼 쿵쾅댔다.
오늘 함께 있던 남자가 남자친구가 아니라는 말에 준호는 지옥에서 천국행 급행열차를 탄 기분이었다.
그녀가 알려준 아파트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전화했다.
[거기 놀이터 있어요. 그쪽으로 갈게요.]
늦은 밤이라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낮 동안 아이들의 에너지가 넘쳤을 놀이터는 적막 속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멈춰 있었다.
한쪽에 벤치와 정자도 있었지만, 준호는 앉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놀이터를 서성이며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오던 시은이 준호가 있는 곳 근처까지 오자 걸음이 느려졌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싶은 준호는 애가 탔다.
안 그래도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데 그녀가 느리게 오자 못 참고 준호가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간 준호가 시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그렇게 쳐다보았다.
“시은 씨. 하나만 묻겠습니다.”
“…….”
“나한테 마음이 변했다고 한 거 진심 아닌 거 맞습니까?”
시은이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바라만 보았다.
“내가 어머니 어떻게든 설득하겠다고 하면.”
준호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비장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부모님과 연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시은 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
“나한테 다시 올 수 있습니까?”
준호를 바라보는 시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시은은 이별 후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준호 생각으로 시작한 하루는 그의 생각으로 끝이 났다.
헤어진 후에 시은은 자신이 준호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시은도 이렇게 힘든 이별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시은이 떨리는 시선으로 준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시 가도 돼요?”
시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다시 준호 씨에게 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