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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아직 열애 중 (95/100)


95. 아직 열애 중
2022.07.30.


시은이 일하는 커피숍은 경기도 외곽의 경치 좋은 곳에 있었다.

통창으로 호수가 펼쳐져 ‘뷰가 예쁜 카페’로 SNS에 소문도 났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데이트하는 연인들로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루프탑 야외 테이블이 인기가 좋았다.

어제 토요일도 손님이 많았고 오늘 일요일도 점심 이후에는 손님이 몰려들 것이다.

시은은 그곳에서 부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냉동실 얼음 수량 얼마나 있어요?”

“여섯 팩 있습니다.”

“오늘 낮 기온이 26도까지 올라간대요. 얼음 더 필요할 것 같으니 세 팩 더 준비해 주세요.”

“네.”

시은이 직원들에게 영업 준비사항을 체크하고 지시했다.

오전이라 아직은 한산해 매장 곳곳을 둘러보고 청결 상태를 확인했다.

시은이 루프탑에 올라가 야외 테이블의 상태와 햇빛을 가리는 파라솔도 점검했다.

눈 앞에 펼쳐진 호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돌렸다.


“오늘 날씨 진짜 좋다.”

푸른 녹음이 호수에 잔잔하게 비친 모습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시은이 일할 곳으로 여기를 택한 이유도 마음이 치유되는 듯한 이 풍경 때문이었다.

평일에는 대체로 한산한 편이라 루프탑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할 때가 많았다.

생각보다 준호를 잊기가 힘들었다.

3개월 남짓 짧은 연애라 뭐 그리 힘들겠나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좋은 기억만 남아 있던 연애 초기라 그랬는지 그리움은 더욱 짙어졌다.

잔잔한 바람에 일렁이는 호수의 잔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김없이 준호가 떠올랐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눈 부신 햇살에 눈을 감으니 시은의 얼굴 위로 햇빛이 드리웠다.

코로 자연의 냄새가 들어찼다.

호수에서 나는 물 냄새, 바람에 실려 온 풀과 들꽃들 냄새. 햇빛 냄새.
 

 


‘준호 씨,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네요. 준호 씨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나요? 날이 좋아서 준호 씨 좋아하는 사이클을 타러 갔을까요?’

시은은 언젠가부터 루프탑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며 준호에게 마음의 편지를 썼다.

시은이 준호를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있을 때 루프탑으로 누군가 올라왔다.

점장이 음료를 들고 다가와 옆에 앉았다.


“이번 여름 시즌 신메뉴래요. 테이스트해 봐요.”

망고 생과일이 올라간 음료였다.

시은이 빨대로 음료를 맛보고 토핑으로 올라간 망고도 맛보는 것을 지켜보던 점장이 물었다.


“어때요?”

“음료가 좀 달아요. 망고가 단맛이 많이 나니 음료는 덜 달아도 될 것 같아요. 망고는 살짝 얼린 상태로 나오면 더 좋을 것 같고요.”

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은이 평가한 것을 종이에 체크했다.

평가지에 글씨를 끄적이며 점장이 물었다.


“부점장님은 나 밥 언제 사줄 거예요?”

“네?”

“전에 고맙다고 밥 한번 산다면서요?”

“아.”

시은은 예전에 점장에게 도움을 받고 상투적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밥 한번 사는 게 뭐 대수인가 싶어 말했다.


“그럼 오늘 끝나고 직원들하고 같이 요 앞에 누룽지 백숙 먹으러 갈까요? 제가 쏠게요.”

“직원들은 왜 끼워줍니까? 나 밥 사준다고 해놓고는.”

점장의 말에 시은은 농담인지 헷갈려 빤히 쳐다보았다.


“나만 사 줘요. 나한테 밥 사준다고 했으니까.”

“…….”

“그럼 오늘 끝나고 누룽지 백숙 먹으러 가는 겁니다.”

점장이 웃으며 말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언젠가부터 점장이 조금씩 시은에게 관심을 표했다.

시은은 점장의 관심이 부담되었다.

분명히 좋은 사람이지만 시은의 마음에는 아직 다른 남자가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시은의 마음속에는 아직 준호가 그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

준호의 차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 외곽을 향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은 일요일이라 차가 많았다.

마음은 이미 그녀가 일한다는 커피숍을 향해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는데 차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두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둘 다 스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겨울에는 스키 타러 가자고 했었는데 그녀가 없는 겨울을 보냈다.


<목적지 부근입니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기계 음성에 준호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시은을 못 본 지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많이 변했을지 궁금했다.

준호가 커피숍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한창 피크타임이었다.

준호가 매장으로 들어가자 테이블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자리가 없대. 지금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대. 다른 데로 가자.”

누군가 전화 통화를 하면서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루프탑 뷰가 유명하다고 해서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쉬움을 토로하며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준호는 바쁜 매장을 쭉 둘러보며 시은의 모습을 찾았다.

그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준호가 주문대로 가자 직원이 말했다.


“지금은 테이크아웃만 가능하십니다.”

“네.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부탁합니다.”

커피를 주문하면서 주방 안쪽을 보니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를 발견한 준호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두근댔다.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준호가 쭉 응시하고 있었지만 바쁜 그녀는 준호를 발견하지 못하고 일에 열중했다.

준호는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들고 커피숍을 나왔다.

지금은 시은을 만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조용히 그녀와 얘기하려면 한가한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준호는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영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
.

커피숍의 영업이 끝나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했다.

준호는 차 안에서 시은이 모습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고 긴장되어 손에 땀이 찼다.

불이 완전히 꺼지고 시은이 밖으로 나왔다.

준호는 긴장한 얼굴로 차 문을 열려고 레버를 당겼다.

그러나 문을 열지는 못했다.

시은의 뒤로 남자가 나오더니 두 사람이 같은 차로 걸어갔다.

남자가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니 시은이 조수석에 탔다.

그리고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준호는 숨이 멎을 것 같이 가슴이 갑갑했다.

불안감과 서운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저 남자와 어떤 관계일까?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생각을 하니 여기까지 달려온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니 만약 시은에게 새 연인이 생겼다면 오늘 만났던 은조가 시은이 일하는 곳을 알려줬을 리가 없을 것이다.

준호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

시은은 점장과 누룽지 백숙집에 들어와 나란히 앉았다.

주인은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주문을 받고 갔다.

시은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세팅해 주는 점장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언제 얘기를 하는 게 좋을까, 생각했다.

시은이 점장과 단둘이 밥을 먹으러 온 이유는 점장에게 확실하게 선을 긋기 위해서였다.

밥을 사 주겠다고 공수표를 날렸으니 식사를 하면서 확실하게 얘기해야겠다 생각했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백숙이 나오고 식사를 했다.


“부점장님이 왼쪽 닭 다리 드세요. 닭 다리 중에 왼쪽 닭 다리가 더 쫄깃하고 맛있는 거 알죠?”

점장이 다리 한쪽을 뜯어 시은의 접시에 놓아주며 말했다.


“누가 그러던데, 닭 다리 양보하는 건 찐 사랑이라고.”

예상대로 점장은 시은에게 노골적으로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단둘이 밥을 먹으러 온 것 자체가 좋은 신호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났을 때 시은이 말했다.


“점장님.”

점장이 시선을 들어 시은을 보았다.


“점장님 저 좋아하세요?”

점장이 멈칫하더니 멋쩍게 웃었다.


“눈치가 빠르시네. 너무 티 났습니까?”

점장이 휘젓던 국자를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눈치가 빠르신 건 아닙니다. 부점장님 처음 오셨을 때부터 좋아했거든요.”

시은이 약간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렇다면 3개월이 지났다는 얘기다.


“혼자 짝사랑했었는데……. 이제 짝사랑 그만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됩니까?”

“…….”

시은이 점장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박물관 시설에서 일할 때 몇 개월 동안 준호를 짝사랑하며 바라만 보았던 시간을 떠올렸다.

점장은 참 좋은 사람이지만 이어지지 않을 인연인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점장의 얼굴에 웃음기가 점차 사라졌다.


“아…….”

금세 굳어진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랬습니까? 전에 듣기로는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들어서.”

“네. 사귀는 건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서요.”

점장이 시선을 들어 시은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부점장님도 짝사랑 중입니까? 누군지 모르지만 참 부러운 사람이네요.”

점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헤어졌지만 잊지 못해 아직 열애 중이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시은도 그 노랫말처럼 헤어져도 헤어진 적 없고 여전히 열애 중이었다.


“그래서 점장님 마음 받아줄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시은이 점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준호는 누룽지 백숙이란 간판에 불이 켜진 식당 앞에 차가 서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내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영락없이 퇴근 후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 모습이었다.

어렴풋이 느꼈던 불안함이 사실로 확인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찾은 모양이었다.

친구인 은조가 사실을 모르고 제게 연락처를 주었나 보다.

준호는 한순간에 바닥에 내쳐진 기분이었다.

무겁게 내려앉는 가슴이 답답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차라리 눈으로 확인한 것이 오히려 후련했다.

이제는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30분쯤 달렸을까. 준호는 문득 그녀를 만나서 묻고 싶었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를 만난 얘기를 왜 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이대로 헤어지더라도 그녀에게 한 가지만은 알려주고 싶었다.

어머니가 말했던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결혼할 여자 같은 건 없다고.

시은이 혹여 오해했을까 걱정되었다.

행여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면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은조가 주었던 메모지를 보았다.

그녀의 바뀐 핸드폰 번호가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그녀의 새 전화번호를 하나씩 찍는데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지막 숫자를 찍고 준호는 잠시 망설여졌다.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목소리가 냉랭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그녀에게 자신은 이제 부담스러운 존재일 텐데.

꿀꺽 침을 삼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준호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음성이 귀를 타고 온몸에 스며들어 떨림으로 변했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응답을 재촉했다.


“……여보세요.”

준호가 건조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

그러자 이번에는 저쪽에서 대답이 없었다.

단번에 준호의 목소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접니다.”

[……네.]

그녀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지금 통화하기 곤란합니까?”

혹시 그녀의 새 연인이 옆에 있어서 그녀가 불편할까 싶어 물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나만 묻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

“어머니 만난 얘기 왜 안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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