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너무 예뻐서 불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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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너무 예뻐서 불안해
2022.07.26.
6개월 후.
은조는 원하던 의상학과에 합격해 서른 살의 나이에 대학생 새내기가 되었다.
막상 대학 생활을 하려니 은조는 또래 동기들보다 나이가 들어 보일까 봐 신경이 쓰였다.
좀 더 어려 보이는 옷을 사고 헤어스타일도 바꾸었다.
후드티에 머리를 하나로 묶어 말총머리를 한 은조가 민후의 서재로 총총대며 갔다.
“어때요? 나 몇 살처럼 보여요?”
서재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던 민후가 시선을 들어 보았다.
청바지에 후드티, 수수한 화장에 머리를 하나로 묶은 아내는 스무 살 초중반으로 보였다.
순간 민후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내가 너무 어리고 예뻐 보여서.
저렇게 입고 다니면 유부녀인 줄 모르고 쫓아다닐 남자들이 분명 생길 것 같았다.
민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등을 의자에 기댔다.
“쓰으, 그건 좀…….”
아내에게 좀처럼 부정적인 얘기는 하지 않았던 민후가 말꼬리를 흐렸다.
“왜요? 이상해요?”
민후의 반응에 은조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이상하다기보다…… 점잖지가 않은 느낌?”
“그래요?”
은조가 서재에 걸린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대학생들 이렇게 많이 입고 다녀서 입어본 건데.”
은조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럼 다른 거로 입어볼게요.”
잠시 후 은조가 다른 옷으로 바꾸어 입고 왔다.
이번에는 퍼프소매가 귀여운 원피스였다.
허리에서 잡힌 주름이 A라인으로 퍼져나가 무릎 바로 위로 깔끔하게 떨어졌다.
하나로 묶었던 머리는 풀어 한쪽 귀를 내어놓고 핀으로 고정한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이건요? 이건 어때요?”
은조가 손을 허리에 올리고 물었다.
“하아.”
민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아까보다 더 예쁘잖아?’
민후가 한숨을 내쉬자 은조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이것도 이상해요?”
옷차림이나 겉모습에 항상 칭찬만 해주었던 민후가 저런 반응을 보인 것이 은조는 불안했다.
한 번도 부정적인 피드백이 없었던 사람인데 저 정도 반응이면 엄청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상해요? 어디가 이상한데요?”
은조가 자신감이 없는 얼굴로 묻자 민후가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이상한 게 아니라…….”
민후가 은조 바로 앞에 서서 말했다.
“너무 예뻐서.”
은조가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너무 예뻐서 불안해.”
“네?”
“이렇게 예쁘고 어려 보이는 모습으로 학교에 다니면 내가 불안해서 어떻게 일을 하겠어?”
은조가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뭐예요. 진짜 이상한 줄 알고 놀랐잖아요. 너무 어려 보이려고 애쓰는 게 티 날까 봐 불안했었는데.”
민후가 눈썹을 움찔하더니 은조의 허리를 팔로 감아 끌어당겼다.
“어려 보이고 싶어? 왜?”
“나이 많다고 눈에 띄고 싶지 않으니까요.”
“이러면 결혼한 줄 모르고 남자들이 쫓아다닐 것 같은데, 그걸 노린 건 아니고?”
“날 뭐로 보고 그래요?”
은조가 손에 낀 결혼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 결혼반지 버젓이 끼고 학교 다닐 거예요. 혹시 누가 다가오면 결혼했다고 바로 철벽 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은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나 은근히 기분 좋다. 이제 민후 씨도 나처럼 불안해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민후 씨 회장님 되고 나서 여직원들 사이에서 더 인기 많아졌다면서요?”
“누가 그래?”
“뉴스 기사에 막 나오거든요? 드라마 주인공처럼 30대 영앤리치핸섬의 표본이라고, 인기가 엄청 많아졌다고.”
“그래서 당신이 불안해했어?”
“그럼요. 회사에 여직원들 얼마나 많아요? 내 남편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 좀 불안했다고요.”
민후가 흡족한 듯 웃었다.
“왜 불안해? 내가 한눈팔까 봐?”
“여자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안 넘어갈 남자 없다느니, 이런 얘기들이 있으니까.”
“날 그런 멍청한 남자들하고 동급으로 보다니 불쾌하네.”
민후가 옅게 웃으며 손으로 은조의 얼굴을 감쌌다.
“당신 아직도 날 몰라? 난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여자로 안 보여. 그리고 작정하고 달려들 틈도 주지 않을 만큼 다른 사람에겐 냉정해.”
민후가 은조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불안해할 필요 전혀 없어. 그런 거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이 바쁘거든.”
“민후 씨도 마찬가지로 불안해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너무 완벽하게 멋있어서 내 눈에 어떤 남자도 멋있게 보이지 않으니까.”
민후가 행복하게 웃다가 손을 그녀의 치마 쪽으로 내렸다.
치마 끝단에서부터 그녀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 옷은 안 되겠어. 치마가 너무 짧아. 바람 불면 위험해. 봄에는 특히 바람도 많이 불어서 안 돼.”
은조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더니 말했다.
“이게 뭐가 짧아요? 지난번 창립기념일에 입었던 것도 이 정도 길이였어요.”
“학교에 갈 때는 바지로 입고 다녀. 바지가 편하고 좋잖아?”
옷차림까지 단속하려는 민후를 은조가 째려보았다.
“꼰대처럼 굴지 말아요.”
“꼰대? 이게 무슨 꼰대야?”
“꼰대 맞거든요? 옷차림까지 단속할 거예요?”
“단속이라니. 이건 그냥 조언이야.”
“민후 씨가 뭐라든 이거 입고 학교 갈 거예요. 칫!”
은조가 민후를 밀어내고 홱 뒤돌아 서재를 나갔다.
민후가 불안한 얼굴로 쫓아갔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 치마 입어. 그런데 그거보다 좀 긴 건 없어?”
*
은조는 박물관 근무할 때 알고 지내던 직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직원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윤경 씨,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한 실장님도 잘 지내셨어요? 실장님은 나이를 거꾸로 드세요? 퇴사하시더니 어떻게 더 어려진 것 같아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준호가 보였다.
시은과 헤어졌다는 얘기를 듣고 준호를 만나니 갑자기 대하기가 어색해졌다.
준호도 마찬가지였는지 은조와 눈을 마주치고는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은조가 먼저 준호에게 인사했다.
“관장님. 안녕하세요.”
“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전 아기 키우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아기 많이 컸겠습니다.”
은조는 아기를 낳은 직후 시은과 준호가 병원에 방문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게 불과 몇 달 전이었는데.
“네. 많이 컸어요. 요즘 잡고 일어서서 곧 걸어 다닐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대화하면서 머릿속에 시은을 떠올렸지만, 누구 하나 그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직원들이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은조는 공교롭게도 준호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며 준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있었다.
시은 씨 잘 지냅니까?
은조를 보자마자 이 말부터 묻고 싶었다.
연락을 끊고 사라져버린 시은이 너무 궁금했다.
준호는 결혼식 내내 이 말이 입에서 맴돌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식사가 나왔다.
스테이크를 썰면서 은조가 준호에게 물었다.
“관장님은 결혼 안 하세요?”
은조는 준호가 곧 좋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할 것 같다는 얘기를 시은에게서 들었다.
결혼 계획을 확인하고 싶었다.
은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기를 썰던 준호의 손이 멈칫했다.
준호의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혼자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예상과 대답이 달라 은조가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결혼할 여자분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에요?”
칼질을 멈추고 은조를 보는 준호의 표정이 진지했다.
“결혼할 여자요?”
“로스쿨 다니는 여자분이랑 결혼할 계획이라고…….”
준호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준호를 보며 은조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들었는데.”
“누구한테요?”
시은의 말로는 준호의 어머니에게서 그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준호와 협의되지 않은 채로 시은에게 얘기를 했던 건가?
그렇다면 준호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헤어졌을 수도 있다.
“……시은이한테서요.”
은조의 대답에 준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충격을 받은 듯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은조를 보았다.
자신에게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시은에게서 나왔다니?
로스쿨 다니는 여자라는 말에 준호는 무언가에 뒤통수를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전부터 로스쿨 다니는 여자와의 맞선을 계속 강요했었다.
그렇다면 시은이 어머니를 만난 것이 틀림없다.
“아니었어요?”
“자세히 좀 얘기해 봐요. 시은 씨가 뭐라고 하면서 그 말 했습니까?”
“관장님 어머님이 시은이 만나서 그 여자분 사진 보여주면서 결혼시킬 거라고 했다고 했어요. 그러니 그만 만나라고.”
“뭐라고요?”
준호가 인상을 쓰더니 탄식 같은 숨이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하아.”
준호의 얼굴이 점점 사납게 찌푸려졌다.
그의 어머니를 향한 원망이 치솟았다.
시은이 갑자기 이상해진 이후로 준호는 어머니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혹시 시은을 만났느냐고.
어머니는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자신을 속이고 몰래 시은을 만나고도 제게 거짓말을 한 어머니 때문에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은조가 준호의 표정을 살피더니 물었다.
“관장님은 어머니께서 시은이 만난 거 전혀 모르고 계셨어요?”
준호가 심각하게 인상을 쓴 채로 은조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헤어지자고 한 거랍니까? 우리 어머니가 한 말 때문에? 나한테 확인해 보지도 않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에 이어 자신을 믿지 못한 시은도 미웠다.
“시은이는 어머니 만난 이후로 겁을 먹은 거예요. 자신과 관장님과의 가정환경이 너무 차이 나서 자신이 없었대요. 저렇게 대놓고 싫다 하시는데 그걸 이겨낼 자신이 없었대요.”
준호는 이제 시은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물어봤다면, 아니 어머니를 만났다는 얘기를 한마디라도 했었다면 그렇게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시은이 그날 상처받아서 자기가 관장님 별로 안 좋아한다고, 곧 차버리려고 했다고 호기를 부리며 얘기했대요.”
준호는 화가 나 들썩이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물었다.
“시은 씨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은조가 준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은이가 있는 곳을 준호에게 알려주는 게 나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은조가 보기엔 시은이 끝내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준호처럼 괜찮은 남자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관장님. 시은이 만나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다시 만나자고 하시려고요?”
그렇다고 시은이 자신 없다고 포기한 것을 은조가 중간에서 나서기도 조심스러웠다.
“관장님 어머니 설득할 자신 있어요? 시은이 그거 두려워서 관장님 놓은 거예요.”
“…….”
“시은이가 또 어머니라는 벽을 마주하고 상처받을까 걱정돼요.”
준호가 어머니를 설득할 수 없다면 시은은 더 큰 상처를 받을 것이다.
“이제 마음 잡고 잘 사는 애, 다시 휘저어 놓을까 걱정이에요.”
“난 시은 씨가 마음이 떠났다고 해서 그렇게 믿었습니다.”
준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알았다면 그때 시은 씨 그렇게 안 보냈습니다.”
준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시은 씨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면 무조건 시은 씨와 결혼합니다.”
결연한 표정의 준호를 보면서 은조가 말했다.
“주소는 일단 주는데…… 잘하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은조가 시은이 일하고 있는 곳과 바뀐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어서 주었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일하는데 외곽에 있어요. 이사도 했고요.”
종이를 받아든 준호가 한참 메모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준호는 곧바로 결혼식을 빠져나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시은이 일한다는 커피숍이 있는 외곽으로 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