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우리 헤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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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우리 헤어졌어요
2022.07.23.
저녁 식사를 하던 준호는 숟가락을 놓고 물컵을 들었다.
입맛이 달아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생존을 위해 꾸역꾸역 밥을 입안으로 욱여넣어 보았지만, 돌을 씹는 것만 같았다.
갈수록 얼굴이 핼쑥해져 가는 준호를 미영이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왜 안 먹어? 좀 더 먹어. 너 좋아하는 갈비찜 한 건데. 너 요즘 살 빠졌어.”
“입맛이 없어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 늘어진 어깨로 힘없이 2층으로 올라가는 준호를 보는 미영이 혼잣말했다.
“등신 같은 놈.”
언젠가부터 준호는 표정이 안 좋아졌고 평일에 쉬는 날이 없어졌다.
미영은 제 아들이 시은과 헤어졌다는 직감을 했다.
미영이 원하는 대로 되었지만 저렇게 등신처럼 구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준호는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았다.
그녀에게 혹시 메시지가 왔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오늘도 친구나 지인들의 메시지나 업무 때문에 오는 문자만 가득했다.
친구 아들의 돌잔치 소식, 세미나 참석 여부를 묻는 메시지.
그녀가 없는데도 세상은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어제와도 같은 오늘, 일주일 전과도 같은 오늘, 한 달 전과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데 준호만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준호는 대화창에서 그녀와의 지난 대화들을 다시 곱씹으며 읽었다.
자신이 말실수한 게 있는지 시은이 서운해할 말을 했는지 읽고 또 읽었다.
문득 이런 자신을 마주하고는 준호는 인상을 쓰며 핸드폰을 던졌다.
집착하지 말자. 못나게 굴지 말자, 속으로 되뇌며 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비웃으며 그녀의 얼굴은 그의 시간을 비집고 불쑥불쑥 나타났다.
아침에 옷을 입다가 슈트 상의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발견했다.
헤어지던 그 날 입었던 옷에 그 반지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반지 케이스를 보자 준호는 심장이 옥죄어 오는 통증을 느꼈다.
준호가 반지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청혼 반지라고 했더니 꼭 성공하시길 바란다던 직원의 말이 스쳐 지나가듯 떠올랐다.
이 반지를 주면서 어떻게 프러포즈를 해야 할까 고민했던 시간도 스쳐 지나갔다.
주인 잃은 예쁜 반지는 여전히 빛이 났다.
활짝 웃으면 유독 반짝이던 그녀의 눈동자 같았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니 준호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가 웃으면 전염되듯이 준호도 언제나 웃음이 났었다.
준호의 눈가가 점점 빨갛게 변해갔다.
*
시은은 점장에게 퇴사하겠다는 얘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준호와 연결고리가 있는 회사에서 더 일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어머니를 언제 또 마주칠지 모르는 회사에 있을 수가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프랜차이즈 카페는 늘 바빠서 그나마 생각나지 않는 시간이 많았다.
집에 혼자 있으면 거의 준호 생각이 떠나지 않았지만 일할 때만큼은 잊을 수 있었다.
시은은 밀려드는 주문을 하나씩 받고 있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 테이크아웃 맞으십니까? 6,400원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고객들의 줄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발랄한 톤으로 말하던 시은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다음 손님이 준호였기 때문이다.
시은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피했다.
“헤이즐넛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로 부탁합니다.”
익숙한 음성으로 그가 커피를 주문했다.
시은은 모니터에만 시선을 주며 그가 주문한 것을 입력했다.
손은 떨리고 심장은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테이크아웃인지 매장에서 먹을 건지 물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은은 준호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겨우 입을 열었다.
“……드시고 가실 겁니까?”
고객을 응대할 때 늘 유지해야 하는 발랄한 톤의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축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자 옆에서 일하던 직원이 힐끔 쳐다보았다.
“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고객이 주문한 음료를 한 번 더 확인하는 것과 가격을 알려야 하는 규정도 잊어버렸다.
준호가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받다가 손끝이 순간 닿았다.
찌리릿!
0.1초의 짧은 찰나 손톱만큼 닿은 것뿐인데 2만 볼트의 전기가 온몸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얼굴이 다 타버릴 듯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시은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인지하고 더욱 고개를 숙였다.
카드를 다시 건넬 때 시선을 살짝 들어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시은은 눈에 띄게 핼쑥해진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왜 그렇게 살이 빠졌어요? 아무것도 못 먹어요?’
시은은 자신만큼 그도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동시에 저렇게 만든 이가 자신이라는 죄책감에 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주문이 끝나고 다음 손님의 주문을 받을 때 시은은 어떻게 주문을 받았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시간이 1초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시간에서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이 멈추고 주변 사람들이 일시 정지한 상태로 준호와 시은 두 사람만이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준호는 주문대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은은 준호가 앉은 쪽을 일부러 쳐다보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그쪽으로 시선을 주면 또 눈이 마주칠 것만 같아서다.
초췌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순간적으로 이별을 고한 것을 후회했었다.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다시 만날까?’
그의 어머니가 헤어지기를 원해서 자존심 상해 이별을 고했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앞으로 넘어야 할 거대한 산들이 두려웠다.
시은에게는 올려다보기도 버거운 너무나 커다란 산이었다.
*
준호가 시은이 일하는 커피숍까지 찾아간 건 충동적이었다.
그냥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멀리서 얼굴 한번 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주문대에서 주문을 받고 있었다.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얼굴로 굳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안 본 사이에 얼굴이 좀 말랐다.
그녀도 자신처럼 밥맛도, 입맛도 없어 매일 굶다시피 하는 걸까?
그녀도 힘들어한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혹시나 헤어진 것을 후회하는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실수로 그녀와 손끝이 닿았다.
손끝에서 시작된 전율이 온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녀도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그녀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준호는 멀리서 시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도 자신처럼 힘들어서 헤어진 것을 후회하며 이별을 번복하지는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기대가 들었다.
.
.
.
준호는 다음 주에 다시 카페를 찾았다.
오늘은 주문대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매장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려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카페를 찾았지만 시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못 보던 직원이 보이고 직원이 그 사람을 매니저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준호가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민시은 매니저님은 출근 안 하셨습니까?”
“민 매니저님은 그만두셨는데요.”
“…….”
준호의 심장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준호를 완전히 떠나버렸다.
*
한 달 후.
교도소에 있는 예지는 가정법원에서 날아온 우편물을 받아들고 손을 덜덜 떨었다.
이혼판결문이었다.
2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손쓸 수도 없이 이혼당했다.
“이…… 이…… 나쁜…… 새끼…….”
판결문을 들고 손을 덜덜 떠는 예지의 눈이 섬뜩하게 빛이 났다.
“으아아아!”
예지는 눈에 광기를 드러내며 동물처럼 울부짖었다.
분을 참지 못하고 예지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이 나쁜 새끼!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교도관이 눈이 뒤집혀 미친 듯 날뛰는 예지를 붙잡았다.
“으허엉!”
예지는 교도관에게 붙잡혀 울음을 터트렸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나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넣었던 예지는 가진 것을 다 잃었다.
이엑스푸드가 부도나고 집안은 빚더미에 앉았다.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 찼던 예지는 끝없는 나락 속으로 추락했다.
.
.
.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엑스푸드는 매각절차를 밟았다.
한주 그룹이 핵심계열인 이엑스 푸드빌드를 인수했다.
일각에서는 한주와 이엑스푸드가 혼맥이어서 한주가 이엑스를 구원해준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뜬소문이란 것이 금방 밝혀졌다.
두 기업이 이제는 사돈 관계가 아니라는 기사가 나오고 이엑스 푸드빌드가 헐값에 한주로 넘어갔다는 기사가 나왔다.
계약서를 쓰는 날, 법무팀에 위임해도 되었지만, 민후는 직접 계약서에 서명하기 위해 갔다.
그곳에서 이엑스푸드 김 전 부회장을 마주쳤다.
민후를 마주친 김 부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헐값에 회사를 넘기는 것도 치가 떨리는데 그 대상이 한주 그룹이어서 더 굴욕적이었다.
“안녕하세요. 사돈어른. 아 참, 이제 사돈이 아니군요.”
민후가 인사하다가 호칭을 정정했다.
일부러 이제 사돈이 아니란 사실을 부각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부회장과 민후는 큰 회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인수, 매각 서류에 서명했다.
부회장은 성질나 죽겠다는 감정을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내며 계약서에 신경질적으로 서명했다.
서명을 끝내고 민후가 악수를 청했다.
김 부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민후의 손을 잡았다.
“저희 한주 그룹에서 최선을 다해 운영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명의 직원도 해고 없이 그대로 한주 그룹으로 편입해 고용하겠습니다.”
‘흥. 재수 없어.’
김 부회장은 분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빼고는 홱 돌아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민후는 부회장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제 이엑스푸드란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
시은을 오랜만에 만난 은조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헤어졌다고? 언제?”
“한 달쯤 되었나?”
시은은 턱을 괸 모습으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왜! 왜 헤어졌는데?”
“그냥…….”
“그냥이라니?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 관장님이 헤어지재?”
“아니.”
“그럼 네가?”
시은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은조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시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은이 얼마나 준호를 좋아했는지 알기에 믿기지가 않았다.
은조가 의아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자 시은이 말했다.
“그냥 좀 안 맞아.”
“어떤 게? 성격이?”
가정환경이.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시은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뭐 이것저것 다!”
은조는 준호와 시은, 두 사람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해 가지 않았다.
둘 다 어디 모난 성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는 성격도 아니었다.
성격이 좀 안 맞다 하더라도 둘 다 서로를 배려하면 했지, 이렇게 빨리 끝날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너 바른대로 말해. 성격 안 맞는다는 말. 믿기 어려워.”
“…….”
시은은 확신에 찬 은조의 말에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무슨 일 있었던 거지? 그렇지? 너 지금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거 다 보이거든.”
꾹 다문 시은의 입술 끝이 씰룩이더니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애써 감추고 있던 감정들이 봇물터지듯이 터져나왔다.
시은은 준호의 어머니를 만났던 이야기부터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