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나만 몸 달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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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나만 몸 달았지?
2022.07.19.
강 회장이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기현을 보았다.
“네 처가(家) 말만 듣던 놈이 여긴 왜 나타난 거야? 네 처가(家)에 가서 잘 먹고 잘살지 그러냐?”
기현은 두 무릎을 바닥에 대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처가(家) 그렇게 좋아하는데 성도 이 씨로 바꿔라.”
“죄송해요. 제가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봐요. 저 이제 정신 차렸습니다. 저 아버지 말대로 이혼도 할 거예요. 이혼 준비하고 있어요.”
민후는 무릎을 꿇고 비는 기현을 뒤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아버지,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기현이 무릎으로 걸어 강 회장에게 더 다가가며 애원했다.
강 회장은 얼굴도 보기 싫다는 듯 앉아 있던 회전의자를 돌려 등을 돌렸다.
“이혼하든 재혼을 하든 네 놈 일에는 관심도 없다. 민후야. 기현이 이제 한국에 못 들어오게 해외지사로만 뺑뺑이 돌려라.”
“예. 알겠습니다.”
기현이 고개를 돌려 뒤에서 대답하는 민후를 보았다.
곧 회장이 될 민후를 보며 기현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내가 들어오라고 하긴 전에는 들어올 생각 하지도 마라. 황 비서! 이놈 좀 끌어내!”
밖에서 경호원 두 명이 들어와 기현의 양팔을 잡았다.
“아버지! 잠깐만요! 아버지!”
기현은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갔다.
*
예지는 교도소에 접견 온 변호사에게서 이혼 소송 이야기를 들었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
“이혼이라니? 내가 언제 이혼한댔어?”
“강 지사장님이 이혼 소송하셨습니다.”
예지는 그렇지 않아도 강 회장의 성년후견인개시 신청이 기각되어 짜증이 나 죽을 판인데 기현까지 문제를 일으키니 왈칵 화를 냈다.
“나한테 다들 왜 이러는 거야! 정말 기현 씨가 이혼 소송한 거 맞아? 아버님이 시켜서 그런 거지?”
“아닙니다. 지사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겁니다.”
예지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예지가 변호사에게 달려들듯 말했다.
“기현 씨 좀 만나게 해 줘. 면회 좀 오라고 해 줘.”
“어제 출국하셨습니다. 변론기일이 잡히면 다시 들어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뭐라고? 오늘 나 면회 오기로 했는데 출국했다고?”
기현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느낌이 들자 예지는 불안증세를 보였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기현 씨가 그럴 리 없어. 날 버릴 리가 없어.”
그래도 지금까지 자신을 끝까지 믿어 주고 지지해 주던 사람이었다.
남편마저 자신을 버린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해져 왈칵 화를 냈다.
“강기현, 나 배신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지사장님이 소송과 함께 2억 원의 위자료를 청구했습니다.”
변호사의 말에 예지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뭐? 위자료? 나한테 위자료를 청구했다고?”
“예. 가족을 해치려고 한 사건에 대해 충격과 상처를 받았으며 가정파탄의 원인이 그에 있다고 했습니다.”
예지는 제대로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허!”
예지는 분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강기현, 이 나쁜 새끼!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감옥살이하고 있는데!”
분을 이기지 못한 예지가 발악했다.
“아악! 이 나쁜 새끼야!”
변호사는 광기로 눈이 뒤집힌 예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다른 소식도 하나 더 있습니다만.”
분노를 이기지 못한 예지가 씩씩대며 변호사를 보았다.
“다른 소식 뭐?”
변호사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엑스푸드…… 최종 부도났습니다.”
“뭐?”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
민후와 은조는 그룹 본사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본사 대강당에서 민후의 회장 취임식이 거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임시 주총에서 민후의 회장직 승계에 관한 투표가 진행되었고 투표결과 찬성이 70%가 넘어 민후가 신임회장에 추대되었다.
민후는 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엑스푸드 최종 부도. 법정관리 순서. 무리하게 몸집을 불리던 것이 화근.』
민후가 조수석에 앉은 수행비서에게 말했다.
“문 비서, 뉴스 봤습니까? 이엑스가 법정관리 들어간다고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비서가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냈다.
“통매각인지 분할매각인지 알아보세요.”
비서가 몸을 반쯤 틀어 뒤를 보며 물었다.
“이엑스 얼마나 인수할 생각이십니까?”
“그룹 핵심인 이엑스 푸드빌드를 인수할 생각입니다. 미래전략팀에 연락해 인수전략 짜서 저한테 보고하라고 하세요.”
“예.”
본사 앞에 차를 대고 내리니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30대의 젊은 그룹 총수라는 키워드로 연일 뉴스에서 떠들썩하게 보도가 되었다.
함께 차에서 내린 은조에게도 기자들이 관심을 쏟았다.
젊고 잘생긴 회장님을 차지한 여인이 누구인지 모두 궁금해했다.
은조는 단아한 원피스 차림으로 우아한 멋을 풍겼다.
기자들이 민후와 은조를 둘러싸고 카메라에 두 사람을 담느라 바빴다.
사람들에 둘러싸이자 민후는 본능적으로 은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카메라 플래시가 쉴새 없이 터졌다.
기자들에 둘러싸여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하는데 비서가 재촉했다.
“회장님, 곧 취임식이 시작됩니다.”
민후가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은조의 감싸 안고 무리를 빠져나왔다.
대강당에서 임원과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 취임식이 진행되었다.
<강민후 신임 회장님의 취임사가 있겠습니다.>
민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젊은 직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탓에 한쪽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민후가 마이크에 대고 취임사를 시작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주의 최고경영자가 된 것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은조는 자신이 선물한 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회장 취임식을 하는 민후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진짜 멋있어. 저렇게 멋진 남자가 내 남자라니.’
은조는 감탄을 속으로 삼키며 연설하는 민후를 바라보았다.
취임사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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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이 끝나고 민후는 은조와 함께 선대 회장님이 쓰던 집무실로 갔다.
집무실 전에는 비서실이 있는데 비서실장을 비롯한 비서진들이 일제히 일어나 민후를 맞았다.
“취임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고맙습니다. 이런 환대 불편하군요. 앉으세요.”
민후는 자신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아직은 불편했다.
비서실장이 집무실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회장님 쓰시던 책이랑 물건들은 이미 옮겨 두었습니다. 많이 바꾸지 말라고 하셔서 책상은 선대 회장님께서 쓰시던 거 그대로입니다.”
“네. 잘하셨습니다.”
민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강 회장이 사용하던 때와 크게 바뀐 건 없지만 블라인드를 환한 색으로 교체해 한층 밝은 분위기가 났다.
민후가 책상에 올려진 명패를 들어서 보았다.
투명한 아크릴에 회장 강민후라고 새겨진 명패를 보는 감회가 남다른지 한참 보았다.
민후가 명패를 다시 내려두고는 비서에게 말했다.
“차 한잔 부탁합니다.”
은조와 자신이 마실 차를 부탁하자 비서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나갔다.
은조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회장님 된 거 축하해요.”
민후가 은조와 눈을 맞추고 가볍게 웃었다.
“고마워.”
“아까 명패는 왜 그렇게 본 거예요?”
“왕관이 주는 무게감이랄까? 책임감이 더 따르는 자리니까.”
은조가 애틋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지위가 높을수록 권한보다는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뜻이니 그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지 은조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을 거잖아. 아버지보다 한주를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돼.”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 속에 그가 느끼는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대보다 훨씬 잘해왔어요. 스스로 당신의 능력을 믿으세요. 민후 씨는 민후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에요. 본인이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
은조의 격려에 민후가 웃었다.
“당신은 항상 날 최고라고 치켜세우니까 자신감이 생겨. 고마워.”
“치켜세우는 거 아니고 진짜 최고니까.”
언제나 자신감과 카리스마가 넘치던 민후는 가끔 은조 앞에서만은 일인자의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아내는 모든 것을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영혼의 동반자라는 증거였다.
“나한테 따로 부탁하고 싶은 거 없어요?”
은조의 물음에 민후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보았다.
“무슨 부탁?”
“나도 회장님 사모님 자리가 되니 남들 시선도 신경 쓰이고 그러거든요. 제가 해야 할 일이나 조심해야 할 거 있으면 얘기해 줘요.”
“해야 할 일도 없고, 조심해야 할 것도 없어. 당신은 워낙 모범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내 옆에 그냥 있어 주면 돼.”
비서가 차를 가지고 들어와 찻잔을 나란히 놓아주고 갔다.
“내가 더 바빠질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네.”
은조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남편이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올랐으니 생활에도 조금 변화가 있을 거라 예상은 했다.
“출장도 더 잦아질 건데 괜찮아?”
지금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출장을 가는 편이었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줄인 거였다.
그것보다 출장이 더 잦아진다고 하니 은조도 조금 신경이 쓰였다.
“얼마나요?”
찻잔을 입가에 댄 채 물었다.
민후가 등을 소파에 기대며 말했다.
“글쎄. 한 달에 한두 번? 한번 가면 좀 길어질 수도 있고.”
차를 호로록 마시는 은조가 눈알을 굴렸다.
한 달에 한두 번이나 가는데 일정도 길어진다면 거의 해외 출장으로 집을 비운다는 얘기 아닌가?
떨어져 지내는 건 싫지만, 못 가게 할 수도 없는 일이라 은조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죠, 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민후가 은조를 가만히 보았다.
“진짜 괜찮다고? 출장을 한 달에 한두 번이나 가는데?”
“그럼 어떡해요? 안 갈 수 없는 출장인데 가야죠.”
“나는 못 견디겠는데?”
민후가 팔짱을 낀 채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한 달에 반 이상을 떨어져 지낼 순 없어.”
“떨어져 지내면 더 애틋해진대요. 주말 부부도 더 사이가 좋아진다잖아요.”
은조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어차피 난 수험생이니 이참에 공부나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민후가 못마땅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은조를 보았다.
“어째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랑 오래 떨어져 지내도 당신은 별로 타격이 없어?”
“왜 없어요? 보고 싶죠.”
대답하는 은조가 덤덤한 투로 말하자 민후가 서운한 투로 말했다.
“대답에 영혼이 없네. 나만 몸 달았지? 나만 보고 싶어 하고”
불만을 투덜대는 민후를 보며 은조가 웃었다.
“하하, 아니라니까요. 민후 씨 출장 가면 나도 되게 그립다고요.”
“전화도 내가 훨씬 많이 하잖아. 당신이 먼저 전화한 적 없어.”
“그건 민후 씨 바쁜 시간에 전화하게 될까 봐 신중했던 거죠. 그리고 내가 전화하기 전에 이미 민후 씨가 전화하니까 내가 할 일이 없었던 거고요.”
민후는 더 바빠져 아내와 지낼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 아쉽고, 걱정되었다.
은조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의 민후에게 다가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민후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민후 씨 혼자 몸 단 거 아니에요. 나도 매일 밤 얼마나 당신 그리워하는데요.”
은조가 민후의 입술에 입을 가져가며 말했다.
“사랑해요.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