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그냥 끝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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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그냥 끝나는 겁니까?
2022.07.16.
“우리 그만 만나요.”
준호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멍했다.
“…….”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린…… 별로 안 맞는 것 같아요.”
준호는 잠시 뇌 회로가 끊긴 것처럼 굳은 듯이 있었다.
반지 케이스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반지케이스를 더 모아 잡았다.
손가락 틈으로 보이지 않도록.
준호가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안 맞는다? 어떤 부분이 그렇습니까?”
“…….”
시은은 할말이 없었다.
어떤 부분이 안 맞는다고 말해야 할까? 말수가 적어서 같이 있으면 심심하다고 할까?
아니면 혼자 독단하고 일방적으로 계약 종료해버린 그런 성향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할까?
시은은 준호의 단점을 찾으려고 애썼다.
떠오르는 그의 단점이 없었다.
“그냥…….”
쏴아아아.
그때 갑자기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한강 다리에서 분수처럼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조명의 색이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한강 다리의 분수 쇼가 아름다웠다.
평상시 같으면 와, 하고 탄성을 질러댔을 텐데 시은은 무감각한 얼굴로 분수 쇼를 보고 있었다.
“그냥 마음이 식은 것 같아요.”
준호를 싫어할 핑곗거리가 없어 둘러댈 수 있는 건 시은 본인 마음이 변했다는 것뿐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원래 변덕이 좀 있어요.”
시은의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준호가 상처받을 만한 거짓말을 하려니 마음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준호가 고개를 돌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에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몇 번이나 숨을 쉬었다.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반지케이스는 슈트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가 말을 좀처럼 잇지 못했다.
시은은 시선을 다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고정한 채 준호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마음을 졸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냥 끝나는 겁니까?”
준호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이해 가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식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그녀는 행복해했다.
며칠 만에 마음이 이렇게 식어 버리는 게 가능한가.
“시은 씨 마음이 식었다고 하면…… 그러면 그냥 끝나는 겁니까?”
“…….”
시은은 시선을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마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겁니까?”
“…….”
“난 마음이 식지 않았는데…… 이건 누가 책임집니까?”
늘 차분하던 준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
따지듯 묻는 준호는 지금 마음속에 해일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 답답함은 배신감에 화가 나서 그런 것인지 그녀를 잃을까 불안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형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제발 현실이 아니기를 기도하고 싶었다.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듭니까? 얘기해 주면 고칠게요. 노력해 볼게요.”
시은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준호 씨는 잘못이 없어요. ……미안해요.”
시은이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준호 씨. 내가 나쁜 년이니까 나 욕해요. 나 같은 거 잊어버리고 좋은 여자 만나세요.”
다른 여자 만나라는 말에 준호는 인상을 쓰며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취업도 시켜줬는데 거기는 오래 못 다닐 것 같아요. 미안해요.”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연애는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야 하기는 하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마음이 식어 버렸다고 이별하는 건 너무 부당했다.
분하고 화나고 마음이 너무 아프고 진짜 다시 못 만날까 불안해 미치겠고.
준호는 복잡한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힘들었다.
시은은 밀폐된 공간에 그와 더 같이 있는 게 힘들었다.
대중교통이 없는 곳이지만 시은은 이곳에서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준호 씨. 저는 여기서 갈게요.”
시은이 준호에게 마지막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준호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시은의 마지막 인사말을 듣고 있었다.
딸깍.
시은이 차 문을 열려고 레버를 당겼다.
“그냥 있어요.”
준호의 단호한 말에 시은이 멈칫했다.
“여기서 어떻게 가려고 해요? 이 늦은 밤에.”
“택시 부르면 돼요.”
준호가 시동을 다시 켰다.
“데려다줄게요.”
“아뇨! 그러지 마세요.”
시은이 다소 강한 어조로 거절했다.
“그냥 갈게요. 가게 해 줘요.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요.”
이대로 어떻게 준호 씨 차를 타고 집까지 가란 말이에요? 어색한 시간을 어떻게 견디라고?
“불편해도 조금 참아요. 위험한 것보다 나아요.”
차가 출발했다.
준호는 방금 시은이 한 말이 가슴이 따끔거릴 만큼 아팠다.
그냥 가게 해 달라고, 그게 더 편하다고.
나랑 있는 게 이제는 그렇게 불편합니까? 라고 묻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이제 불편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30분 전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될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어떤 말로 청혼할까? 그 생각에 긴장되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마음이 쓰리고 아파 죽을 것 같다.
차가 시은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준호는 시은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이제 그녀가 이 차에서 내리면 정말 끝인 건가?
이제 영원히 그녀를 보지 못하는 건가?
붙잡아야 하나? 매달려 애원해야 하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화를 내야 하나?
복잡한 머릿속을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차 안으로 시원한 공기가 들어찼다.
어느새 그녀가 차 문을 열고 내리고 있었다.
문을 닫기 전 그녀가 허리를 숙여 말했다.
“잘 가요. 준호 씨. 준호 씨 만나는 동안은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덕담을 나누는듯한 멘트를 하고 탁. 차 문이 닫혔다.
걸어가는 시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준호의 눈가가 점점 빨개졌다.
*
기현은 해외 지사에서 휴가를 내고 한국에 온 상태였다.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강 회장의 성년후견인에 자신이 지정되고 민후에게 증여된 지분도 되돌려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법원의 판결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와중에 결과가 나왔다.
“어떻게 됐어?”
기현을 도와주는 변호사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강 회장님 성년후견인신청이 기각되었습니다.”
변호사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기각이라니! 정신감정까지 받았다며?”
“정신감정 결과 의사결정에는 무리가 없다는 의사소견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주치의 포섭한 거 아니었어?”
“포섭했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신념이 확고한 분이라…….”
“장모님이 다 만들어놓은 것처럼 말했단 말이야! 내가 임시주총 가서 터트리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고!”
“강 회장님 증상이 경미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강 회장님께서 직접 출석해 판사님의 질의에 응답도 했는데 정상적인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장모님은 대체 뭘 믿고…… 하, 진짜.”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도청했을 땐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죄송합니다.”
변호사는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럼 성년후견인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민후한테 간 지분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거야?”
“예. 현재로서는.”
기현은 낙담한 얼굴로 인상을 썼다.
이렇게 되면 자신만 궁지로 몰리는 꼴이 된다.
이번 일로 기현이 강 회장의 눈 밖에 나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박 변호사.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난 장모님만 믿고 있었는데.”
변호사가 기현을 보며 말했다.
“지사장님. 지금 이엑스 상황도 많이 안 좋습니다.”
기현이 잔뜩 인상을 쓴 채 시선을 돌렸다.
“안 좋다니?”
“지난번 부도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나서 자금 통로가 하나씩 막히고 있습니다. 계열사 하나가 1차 부도를 내고 대표가 잠적했고 이엑스 본사도 곧 어음만기가 또 돌아오는데 이번에도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기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이엑스가 부도가 난다는 얘기야?”
“예. 이번엔 힘들 것 같습니다.”
기현이 시선을 돌리고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교도소에 있는 예지와 빨리 손절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박 변호사. 이혼 소송 준비해 줘.”
변호사가 기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혼소송 말입니까?”
“합의는 아마 안 하려고 할 거야. 가정파탄의 원인이 예지 쪽에 있다고 주장해야지. 내 가족을 살인 미수했는데 당연히 저쪽이 파탄의 책임이 있잖아? 박 변 같으면 내 동생을 죽이려고 한 여자와 계속 살 수 있어?”
변호사가 기현을 거북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처가에 기댈 때는 언제고 빠르게 태세전환 하는 기현이 놀라웠다.
기현은 처가가 몰락하고 있다는 판단이 서자 빠르게 등을 돌렸다.
이제는 배신했다고 오해하는 강 회장에게 다시 납작 엎드릴 차례였다.
기현이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했다.
“아버지를 만나야겠어.”
*
강 회장도 회사 집무실에서 가정법원의 심판 소식을 들었다.
“회장님. 법원에서 성년후견인개시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암, 그래야지. 내가 이렇게 멀쩡한데 무슨 후견인이 필요하다고 그러는 거야?”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때 민후가 강 회장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가정법원 심판 결과 났습니다. 들으셨습니까?”
민후도 소식을 듣고 강 회장의 사무실로 온 것이다.
“그래, 들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축하드립니다.”
강 회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축하받을 일이냐? 기현이 그놈 아직 한국에 있어?”
“예. 다음 주에 출국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지사 임기 끝나도 한국에 들이지 마. 아예 더 멀리 보내 버려라. 내 눈감기 전에는 그놈 얼굴 보고 싶지 않다.”
강 회장은 장남이 자신을 뒷방 늙은이 취급한 것에 적잖이 상처를 받았다.
민후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연기되었던 임시주총도 다시 열어야지? 이래저래 시끄러워 나도 그만 쉬고 싶다. 너한테 다 물려주고 우리 손주 재롱이나 보고 살련다.”
강 회장이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때 비서가 문을 노크하고 말했다.
“회장님. 강기현 싱가포르지사장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면담하고 싶으시다고 하시는데 어떡할까요?”
강 회장이 눈을 슬쩍 뜨고는 말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지라고 해.”
“예.”
비서가 문을 닫더니 밖에서 곧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기현이 들어오려고 비서와 실랑이하는 듯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잠깐만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
기현이 뛰어 들어와 소리쳤다.
기현은 곧바로 강 회장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강 회장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기현을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누구신데 날 아버지라 부릅니까? 난 아들이 강민후 하나밖에 없소이다.”
기현이 눈썹 끝을 내려 울상이 된 얼굴로 강 회장을 보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