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착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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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착하네
2022.07.12.
“나 멀쩡하다, 이놈아! 어디서 날 치매 노인으로 몰아!”
강 회장이 벌떡 일어나며 호통을 쳤다.
기현은 서류 하나를 들어서 보이며 그에 맞섰다.
“여기, 회장님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는 진단서입니다.”
강 회장이 분노한 눈을 부릅뜨고 지팡이를 기현을 향해 들었다.
“저, 저, 등에 칼을 꽂는 배은망덕한 놈!”
기현을 향한 지팡이 끝이 크게 흔들렸다.
강 회장이 눈에 흰자위가 훤히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뜨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이윽고 지팡이를 툭 떨어트리고 뒷목을 턱 잡았다.
수행비서가 뛰어들며 소리쳤다.
“회장님!”
강 회장이 수행비서 쪽으로 쓰러져 그가 강 회장을 붙잡았다.
민후와 은조도 벌떡 일어나 강 회장 쪽으로 달려왔다.
“아버님!”
강 회장이 의식이 없는 것을 확인한 민후가 소리쳤다.
“빨리 구급차 불러요!”
민후가 곧바로 강 회장을 등에 업고 회의장을 나갔다.
놀란 은조도 같이 뒤따라 나갔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소란스러워졌고 단상에 서 있던 기현은 당황한 채로 멀뚱히 서 있었다.
강 회장이 쓰러지면서 임시주주총회는 연기되었다.
기현은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쓰러진 것에 다소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강 회장이 민후에게 업혀 나간 후 주주들은 안 따라가 보냐는 얼굴로 기현을 보았다.
기현은 어찌해야 좋을지 판단을 못 하고 땀이 밴 뒷목을 쓸어낼 뿐이었다.
그래도 주총이 연기된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강 회장의 정신 감정을 하고 나서 의사결정에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되면 증여된 지분도 환수하고 성년후견인도 지정하게 될 것이다.
남은 건 하나, 누가 후견인으로 지정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연히 장남인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강 회장은 병원으로 옮겨 빠르게 응급처치를 받은 덕분에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
VIP 병실로 옮겨진 강 회장은 곧 의식도 회복되어 모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버지. 정신이 드세요? 여기 병원이에요.”
강 회장이 눈을 뜨고 자신을 빙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민후와 은조, 비서진 2명이 보였다.
다들 걱정되고 초조한 얼굴이었다.
기현이 보이지 않아 강 회장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말없이 눈만 끔뻑이는 강 회장을 보며 민후가 말했다.
“아버지,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강 회장이 민후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놈들이 쌍으로 날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해? 누군지 다 안다. 이놈아!”
역정을 내는 아버지를 보며 민후는 안심이 되어 웃었다.
“죄송합니다. 뒷목 잡고 쓰러지셨는데 당연히 걱정되죠. 우리 아버지 건강하시네요.”
“내가 기현이 그놈 미워서라도 이백 살까지 살아야겠다. 그놈보다 내가 더 오래 살 거야!”
“예. 당연히 그러셔야죠.”
.
.
.
기현은 뒤늦게 강 회장이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갔다.
자신 때문에 쓰러지셨다는 죄책감은 있었기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VIP 병동이 있는 층에 도착하고는 한참을 망설였다.
병실 앞에는 경호원 두 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복도 끝에 초조하게 서 있는데 병실에서 나온 민후와 마주쳤다.
민후가 기현을 보고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기현을 향한 민후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민후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법원에다 뭘 했다고?”
기현은 강 회장의 상태가 우선 궁금하여 물었다.
“아버진 괜찮으셔?”
“궁금하긴 해? 형 때문에 충격받아 쓰러지신 거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기현도 민후를 노려보며 물었다.
“너는 아버지 알츠하이머인 거 알고 있었지? 아버지 정신 오락가락하시는 거 이용해서 지분 증여받았지?”
“뭐?”
기현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갔다.
“전에 법무팀에서 들으니 재산증여는 내년에 하실 거라고 했어. 이렇게 갑자기 당길 이유가 없잖아. 네가 뭐라고 하면서 노인네를 부추겼기에 아버지가 재산을 일찍 정리하신 거냐고!”
“아버지가 법무팀과 상의해서 결정하신 거야. 건강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정리하신 거라고.”
“보니까 이미 건강은 안 좋아지셨던데? 약은 작년부터 먹고 계셨더라고.”
“알츠하이머 초기는 경미한 증상이야. 노년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이라고!”
“허! 초기인지 중증인지는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겠어.”
“병원 기록 이미 뒤졌던데? CT랑 MRI 검사 결과 봤으면 알 것 아니야?”
“난 못 믿겠거든. 네가 결과를 바꿔치기했는지 어쨌는지 어떻게 알아? 나머지 지분을 전부 넘긴 결정이 온전한 정신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진 것인지 확인해야겠어.”
기현은 어떻게든 민후에게 증여된 지분을 다시 되돌리고 싶어 우겨댔다.
민후는 자기 생각만 내세우는 꽉 막혀 버린 기현이 답답해 한숨을 토해냈다.
“법원에서 정신감정 다시 하라고 판결 나면 내가 아버지 모시고 가 검사할 거야.”
못 박아두듯 말하고 기현이 뒤돌아서 병원을 떠났다.
강 회장의 상태도 확인하지 않고 떠나는 기현을 보는 민후의 마음은 무거웠다.
대체 무엇이 형을 저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씁쓸했다.
*
준호는 쥬얼리 매장에서 주문한 청혼 반지를 찾았다.
직원이 케이스를 열어 반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1캐럿 다이아몬드 최상급으로 커팅된 제품입니다. 플래티넘 백금에 안쪽에도 부드럽게 마감되어 착용감이 좋도록 제작했습니다.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준호가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분이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네요.”
반지 케이스를 주머니에 넣고 매장을 나왔다.
차에 타서 시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로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언제나 바쁜 그녀이기에 불쑥 전화하는 건 피했다.
[오늘은 피곤해도 시간 잠시 내 줘요. 우리 오늘 100일입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준호는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반지를 다시 보았다.
과연 그녀가 청혼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귄 지 100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불쑥 청혼하면 놀라지는 않을까?
놀라겠지? 아직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 안 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준호는 결혼에 관한 시은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녀의 마음에 확신이 생겨야 부모님을 설득할 수가 있다.
청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반지를 일단 준비하기는 했는데 어떤 식으로 청혼을 할까, 이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아뿔싸. 낭패다.
각종 이벤트를 하면서 청혼하는 영상을 각 미디어를 통해 많이 보았다.
예비신부들은 그런 감동적인 청혼이벤트를 좋아한다던데…….
미처 그 생각까지 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준호는 이마를 문질렀다.
지금 와서 이벤트를 준비하기는 물리적인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가 중요할 것이다.
반지를 쳐다보며 준호가 혼자 연습을 해보았다.
“시은 씨,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뭔가 마음을 움직이기엔 많이 부족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댔다.
자신에게는 왜 이런 달달한 말솜씨가 없는 걸까?
*
[오늘은 피곤해도 시간 잠시 내 줘요. 우리 오늘 100일입니다.]
준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시은이 핸드폰에 캘린더 어플을 열어보았다.
100일이 되는 날이라고 자신도 캘린더에 표시를 해 두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100일 기념일에 준호에게 어떤 선물을 해 줄까 고민했던 것을 떠올렸다.
시은은 준호와의 관계를 더 질질 끌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의 이별은 이별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마음이 아프지만, 오늘 그에게 이별을 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00일 기념일이 이별하는 날이 될 줄 몰랐다.
“딱 100일간의 만남.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숫자가 좋네.”
시은이 혼잣말하며 준호의 메시지에 답을 했다.
[네. 오늘 만나요. 준호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띠링.
기다렸다는 듯 답이 왔다.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가겠습니다.]
이모티콘도 없는 몇 글자 안 되는 문장에서 신나는 그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시은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
.
.
9시에 퇴근하고 시은이 커피숍을 나왔다.
준호가 차를 대어놓고 늘 기다리던 장소로 향했다.
준호의 차를 보자 시은은 가슴이 시큰거리며 아프기 시작했다.
마음을 다잡듯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차로 걸어갔다.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많이 기다렸어요?”
“기다리는 시간도 즐겁습니다.”
준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시은은 마음이 또 약해지려고 했다.
여전히 설레고 떨렸다.
그의 얼굴만 보면 이렇게 가슴이 설레고 반응하는데 어떻게 이별을 고할 수 있을까?
‘오늘까지만 그냥 만날까? 이별은 다음에 얘기할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갈등이 생겨났다.
“오늘은 컨디션 어때요? 괜찮습니까?”
그의 다정한 말투에 시은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만나지 않으려고 피곤하다는 핑계를 댔는데 저렇게 매일 자신을 걱정했다.
“……괜찮아요.”
그를 쳐다보고는 도저히 대답할 수 없어 시선을 내렸다.
“오래 붙잡아 두지는 않을게요.”
준호가 차의 시동을 켜며 물었다.
“배고프죠? 식사하러 갈까요?”
“아뇨. 식사는 됐어요. 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그럼 어디 갈까요? 예쁜 디저트 가게 갈래요?”
종일 커피 냄새를 맡았던 그녀에게 차를 마시러 가자고 할 수는 없었다.
시은이 예전에 예쁜 디저트 파는 곳이라며 데리고 갔던 곳이 생각났다.
시은이 앞 유리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조용한 데로 가요. 얘기하기 좋은 곳으로.”
시은은 미루지 말고 오늘 끝내기로 했다.
미루면 더 그의 손을 놓기가 어려우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차가 조용히 출발하고 시은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준 약은 먹었어요?”
“……네. 먹었어요.”
먹지 않았지만 먹었다고 말했다.
“공진단도?”
“……네”.
“착하네.”
준호가 팔을 뻗어 동그란 시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쿵쿵쿵.
순간 시은의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이별을 결심했는데 이렇게 다정하게 굴면 어떡하란 말인가.
시은은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무릎에 올려 둔 가방을 꽉 쥐었다.
차가 도착한 곳은 한강공원이었다.
“여기가 야경이 예쁜 것 같은데 마음에 들어요?”
준호가 야경이 멋진 포인트를 찾아 그곳에 차를 세웠다.
화려한 조명의 한강 다리와 강 건너편 빌딩들의 조명들이 물에 반사되어 근사했다.
물결이 움직일 때마다 불빛들이 흔들리며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한강 야경이 이렇게 예뻤나?’
시은은 늘 지나치던 한강 야경에 새삼 감탄했다.
이별하기엔 너무 잔인하게 완벽한 데이트 장소다.
준호도 차 안에서 보는 야경이 꽤 마음에 들었다.
청혼하기에는 손색이 없는 장소 같았다.
준호가 주머니에 넣어둔 반지 케이스를 만지며 잘 있나 확인했다.
곧 청혼하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아까 혼자 연습했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준호가 손을 슈트 안주머니 쪽으로 슬쩍 넣으며 말했다.
“시은 씨. 실은 오늘…….”
“할 말이 있어요. 준호 씨.”
준호의 말을 자르고 시은이 말했다.
준호는 시은이 눈치채지 않도록 안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반지 케이스를 쥔 손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네. 먼저 말해요. 시은 씨.”
시은은 아래로 시선을 내리고 무릎에 올려 둔 가방끈을 쥐고 만지작댔다.
준호는 시은을 보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시은이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열었다.
“우리 그만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