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선물 받고 싶으면 옷 벗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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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선물 받고 싶으면 옷 벗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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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선물 받고 싶으면 옷 벗어요
2022.07.09.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가던 시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버릇처럼 한숨이 나왔다.
가끔 머릿속에 그의 어머니가 내민 사진 속 여자가 떠올랐다.
짧은 찰나였지만 단발머리에 단정한 인상이 눈에 각인되듯 선명했다.
“로스쿨에 들어갔으면 검사나 판사가 되겠네. 참 대단한 여자다. 공부도 되게 잘했나 보다.”
시은이 한숨 섞인 혼잣말을 했다.
시은이 생각해도 준호 같은 남자 옆에는 자신보다 판검사가 어울릴 것 같긴 했다.
이런 생각이 하나도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부는 잘해도 뭐…… 커피는 나보다 못 뽑겠지?”
시은은 자신이 그 여자보다 나은 게 어떤 게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공부만 해서 재미는 없을 것 같아. 놀지도 못하고.”
언젠가 준호가 시은에게 ‘시은 씨는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점을 은근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았다.
준호가 마음에 들어 하던 자신의 장점이 그 여자에게는 없을 것이라 혼자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했다.
자신이 그 여자보다 못해서 준호와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해 시은이 오피스텔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시은은 준호와 마주쳤다.
시은의 집 앞에서 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준호를 보자마자 시은은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준호가 다가오며 말했다.
“걱정되어서 왔어요.”
시은은 준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했다.
하지만 꾹 참았다.
“몸이 안 좋은 건 아닌가 해서…….”
준호가 시은 앞에 서서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시은은 울음을 참아내느라 입술을 앙다물었다.
준호는 시은이 자신을 보고 반기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이상했다.
“오해하지 말아요. 집에 들어갈 생각하고 온 거 아니에요.”
준호가 손에 든 종이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피곤하대서 몸에 좋은 것들 챙겨 왔어요. 이건 공진단이고 이건 녹용이랑 좋은 것들 많이 들어간 보약이에요. 피곤할 때 먹으면 좋대요.”
준호가 공진단과 비싼 보약을 꺼내 보였다가 다시 종이가방에 넣었다.
시은에게 종이 가방을 건네면서 말했다.
“집에 들어가서 바로 하나 먹어요. 그리고 푹 자요.”
시은은 준호가 건네는 보약을 보다가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다정한 눈에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만남을 거절했더니 걱정되어 여기까지 약을 챙겨 들고 온 남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시은은 코끝이 빨개졌다.
이 남자와 좀 더 만나고 싶었다.
아직 연애를 제대로 해 보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헤어지기는 싫었다.
“고마워요.”
시은이 준호가 준 보약을 받아들며 시선을 내렸다.
“내가 너무 일이 많은 곳을 소개해 줬나 봐요. 힘들면 그만둬도 괜찮아요.”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와 헤어지게 되면 아무래도 오래 다니지는 못할 것 같았다.
시은은 준호와 더 마주 보고 있으면 눈물을 보일 것 같아 말했다.
“준호 씨. 미안한데 저 그만 들어가서 쉬고 싶어요.”
“그래요. 쉬어요. 갈게요.”
준호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시은이 뒤돌아 현관 도어락을 열려고 할 때였다.
“시은 씨.”
준호의 목소리에 시은은 그대로 현관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습니까?”
준호는 시은의 행동이 부쩍 이상해져 궁금했다.
시은이 준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준호 씨한테 화난 거 없어요. 화날 일이 뭐가 있어요.”
자신한테 화가 난 것이 아니라면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럼 혹시 누구 만난 적 있습니까?”
“…….”
시은은 준호가 그의 어머니를 만난 것을 눈치채고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누구요?”
시은은 모른 척 대꾸했다.
“전에 커피숍에 찾아왔다던 회장님이요.”
시은이 준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렇게 묻는 걸 보니 그의 어머니가 자신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아뇨. 만난 적 없어요.”
시은은 거짓으로 대답했다.
그에게도 자신이 이준호란 남자를 만나기엔 수준이 떨어져서 나가떨어진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흔한 연애의 결말처럼 마음이 변했다거나 성격 차이로 이별을 고하고 싶었다.
“그럼, 조심히 가요, 준호 씨.”
시은이 인사를 건네고 현관문을 열었다.
“네. 잘 자요. 시은 씨.”
시은이 집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닫았다.
좁아지는 문 사이로 준호와 눈이 마주쳤다.
속마음과는 다르게 그에게 쌀쌀맞게 대한 시은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준호의 눈빛이 가여워 보였다.
탁.
문이 닫히고 시은은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왈칵 눈물이 쏟아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그가 문밖에 있다면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렸다.
*
민후가 퇴근하고 집에 가자 은조가 말했다.
“민후 씨, 태풍이 재우고 당신한테 줄 선물이 있어요.”
“무슨 선물?”
민후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미리 얘기해 주면 재미없죠. 나중에 봐요.”
아기를 재우고 선물을 준다는 말에 민후는 어떤 선물일까 기다리게 되었다.
아기를 재운 후에는 부부만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잠든 아기를 아기 침대에 눕히고 민후가 침대에 누운 은조 옆으로 갔다.
“나 선물 언제 줘? 선물 준다며?”
“선물 받고 싶으면 옷 벗어요.”
옷을 벗으란 말에 민후가 음흉하게 씩 웃었다.
“무슨 선물일까? 너무 기대되는데?”
민후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옷을 벗어야 받는 선물이란 생각에 민후는 음흉한 생각에 빠졌다.
즐거운 부부만의 시간을 가질 생각에 빛의 속도로 손이 움직였다.
마구 벗어 던지는 민후를 보며 은조가 말했다.
“누가 다 벗으래요? 바지까지 그러면 어떡해요?”
은조가 민망하다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선물, 이렇게 받는 거 아니었어?”
민후가 이불을 걷고 침대 속으로 쏙 들어왔다.
그가 은조를 껴안으며 말했다.
“빨리 선물 줘. 뭔데?”
몸을 바짝 붙이며 말하자 은조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어휴, 내가 못 살아!”
은조가 침대 옆에 두었던 셔츠와 넥타이 선물을 꺼냈다.
“셔츠 샀단 말이에요. 입어보라고 입고 있던 거 벗으라고 했던 거예요. 누가 다 벗으래?”
“아아, 그거였어? 난 또.”
민후가 능청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안고 있는 은조를 놓아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몸을 더 밀착했다.
“넥타이 색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응. 예뻐. 그런데 갑자기 이 선물들은 뭐야?”
“내일 임시주주총회 열리는 날이잖아요. 당신 회장으로 선출되는 날.”
은조가 넥타이를 빼서 민후의 맨몸에 대어 보며 말했다.
“회장님 되는 기념으로 선물해 주고 싶었어요. 이 셔츠랑 넥타이 매고 갔으면 해서요.”
“고마워. 더 힘이 날 것 같아.”
“셔츠랑 넥타이 맨 모습 보고 싶은데.”
은조의 말에 민후가 넥타이만 받아서 맨 목에 둘렀다.
“어때?”
“아, 뭐예요! 이상해.”
상의를 탈의한 몸에 넥타이만 매고 있는 모습에 은조가 눈살을 찌푸렸다.
민후가 생각했던 선물은 부부만의 시간을 갖는 거였다.
어서 빨리 아내를 안고 싶었다.
안고 있으니 그의 몸은 이미 안달이 나 있었다.
“내일 아침에 볼 수 있잖아. 지금은 난 이게 더 급해.”
민후가 은조의 몸 위로 올라타며 곧바로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민후의 입술이 은조의 목을 타고 올라와 입술을 물었다가 내놓았다.
그녀를 보며 민후가 씩 웃었다.
“내가 기대했던 선물은 이런 거였어.”
민후가 다시 입술을 물었다.
은조의 입술을 열며 촉촉한 숨결이 스며들었다.
은조는 눈을 감고 파고든 그의 숨결을 물었다.
그 숨결은 곧 깊숙이 침입하며 뜨겁고 짙은 키스로 이어졌다.
*
한주 그룹 임시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이다.
민후는 어제 은조가 선물한 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그룹 본사로 갔다.
오늘은 은조도 임시주총에 참석하기 위해 함께 나섰다.
은조도 강 회장에게 증여받은 지분이 일부 있었다.
주총이 열리는 대강당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은조가 민후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당신 오늘 너무 멋있어요.”
민후가 넥타이를 매만지며 웃었다.
“고마워. 당신이 선물한 넥타이 덕분에 날개를 단 기분이야.”
그룹의 새 총수를 선임하기 위해 지분율이 높은 주주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동안 민후의 업무 성과가 뛰어난 것은 사장단과 주주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민후가 그룹 총수직을 인계받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임시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개회를 선언했다.
<이사회에서 결의한 강민후 대표이사의 회장직 승계에 관한 사항을 승인할 것인지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에 있는 투표용지에 찬반을 적어 주십시오.>
“잠시만요! 절차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때 강당으로 누군가 들어오며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 가운데 민후의 눈이 커다래졌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기현이었다.
싱가포르지사에 있어야 할 기현이 여긴 왜 나타난 건지 모두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나도 지분 16%를 가진 주주인데 나 빼고 이렇게 중요한 안건을 의결하려고 합니까?”
기현이 앞에 앉은 민후와 강 회장을 차례로 쳐다보다가 사회자에게 말했다.
“제게 발언권을 주시겠습니까? 절차에 중대한 문제가 있어 제기하려고 합니다.”
절차에 중대한 문제라고 하자 장내가 술렁였다.
사회자가 발언하라고 하자 기현이 단상으로 가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다들 아시겠지만 한주 그룹 강현식 회장님의 장남이자 현재 한주 EM 싱가포르지사장 강기현입니다.”
기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장내에 울렸다.
민후와 강 회장이 굳은 얼굴로 기현을 주목하고 있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오늘 안건을 취소하기 위해서입니다.”
최소라는 말에 주주들이 술렁였다.
“얼마 전 회장님께서 강민후 대표이사에게 지분을 증여하시어 현재 강민후 대표의 지분이 30%가 넘었습니다. 이대로 투표를 진행하면 찬성 투표가 과반이 넘겠죠.”
기현이 민후와 강 회장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오늘 이곳에 오기 전에 가정법원에 아버지 강 회장님에 대한 성년후견 개시 심판을 청구하고 왔습니다.”
웅성웅성. 장내가 술렁였다.
민후가 인상을 쓴 채 기현을 보았다.
“회장님은 지금 정신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의사판단에 문제점이 있는 상태에서 강민후 대표에게 지분을 증여했습니다. 증여 과정에서 어떤 문제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뭐, 뭐야? 저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지팡이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지켜보던 강 회장이 노기를 드러냈다.
“저는 의사 결정력이 모자란 회장님의 정신 감정을 의뢰하고 지분 증여를 무효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업 총수의 정신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은 기업운영에 있어 절대 유리하지 않았다.
기업운영에 있어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주가에도 영향을 미친다.
오너가의 일원이 공개석상에서 이런 사안을 발언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주들이 술렁이며 동요했다.
강 회장은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바로 드러냈다.
“나 멀쩡하다, 이놈아! 어디서 날 치매 노인으로 몰아!”
강 회장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