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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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2022.07.05.
시은이 물을 마시고는 간신히 기침을 멈추었다.
아직도 놀라 펄떡펄떡 뛰는 가슴을 진정할 길이 없었다.
시은은 회장님과 독대하며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긴장했는데, 그 회장님이 준호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준호에게서 어머니가 사업체를 운영하신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회장님이란 중요한 얘기는 왜 쏙 빼고 말했는지 준호가 원망스러웠다.
회장님이 준호의 어머니란 사실을 알고 나서는 시은은 왠지 모르게 더 시선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시은의 시선은 테이블 모서리 어딘가로 향했다. 테이블 아래에서 맞잡은 손을 꼼지락댔다.
어깨는 긴장한 채 잔뜩 움츠러들었고, 침을 언제 삼켜야 할지 그런 것도 신경 쓰였다.
매장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시은과 미영을 둘러싼 공기는 무거웠다.
“우리 준호랑 얼마나 만났어요?”
미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석 달 정도 되었습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시은이 대답했다.
“연애라는 게 잘 만나다가도 조금만 삐끗하면 또 헤어지기도 하는 거라 내가 안 나서려고 했어요. 젊을 때 연애 몇 번씩은 다 하잖아요?”
“…….”
“그냥 지켜볼까 하다가 차라리 더 정이 깊어지기 전에 떼어 놓는 게 낫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떼어 놓는다’라는 단어에 시은은 미영이 자신을 만나고자 한 이유를 바로 간파했다.
미영이 핸드백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젊은 여자의 사진이었다.
“어때요? 같은 젊은 여자가 보기에?”
“…….”
시은은 이 여자는 누구며, 왜 자신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는지 의아해 시선을 들어 미영을 보았다.
“우리 준호랑 결혼시키려고요.”
그 말에 시은은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아래에 맞잡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대대로 집안이 법조계에서 한 자리씩 했던 분들이에요. 이 아가씨도 이번에 로스쿨에 들어갔고요.”
“…….”
시은은 떨림이 멈추지 않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무슨 얘기인지 알죠?”
시은이 시선을 들어 미영을 쳐다보았다.
무슨 얘기인지는 잘 알겠는데 너무 불쾌했다.
꼭 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그냥 헤어지라고 해도 잘 알아듣고 헤어졌을 텐데?
시은은 자존심이 상해 이대로 비참하게 내쳐지는 모양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눈에 힘을 주어 미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송한데 착각하셨나 봅니다.”
미영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쳐다보았다.
“저는 준호 씨와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준호 씨가 누구랑 결혼하는지 관심도 없고요.”
시은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마음에 없는 말을 쏟아 냈다.
“그냥 잠깐 가볍게 만나는 사이였어요. 별로 제 취향이 아니어서 조금 만나다가 관두려고 했었는데.”
여기까지 얘기하자 앞에 앉은 미영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미영이 당황하자 시은은 미영에게 복수해 준 것 같은 생각에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괜한 발걸음 하셨네요.”
제 아들이 취향이 아니어서 잠깐 만나다가 차려고 했다는 말에 미영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네까짓 게 뭔데, 우리 아들이 취향이 아니니 이딴 소리를 지껄여?’
미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할 말이 없었다.
이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아들만 죽자사자 쫓아다니는 건지 미영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자라면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 같았다.
시은을 쳐다보는 미영의 눈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네 주제에 감히 누굴…….’
분을 삭이느라 미영은 콧바람을 내뿜으며 가슴을 들썩였다.
“말씀 끝나셨으면 일어나도 될까요? 곧 손님들이 몰려올 바쁜 시간이라서요.”
시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영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커피숍을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시은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자신의 모습이 안 보이는 곳까지 도달하자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먹은 것도 없는데 가슴이 체한 듯 갑갑했다.
목구멍에는 무언가가 꽉 들어차 숨도 내쉬지 못할 것만 같았다.
준호와 집안의 수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결혼까지는 힘들다는 결말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결말을 원하지는 않았다.
너무 자존심 상하고 불쾌했다.
‘그냥 잠깐 가볍게 만나는 사이였어요. 별로 제 취향이 아니어서 조금 만나다가 관두려고 했었는데.’
기분이 나빠 속에도 없는 말을 지껄인 것도 준호에게 미안했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나온 거지?’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회사에 입사시켜 준 준호가 원망스러웠다.
알았더라면 고사했을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걷는지 기어가는지조차 인식할 수가 없었다.
시은이 가까스로 몸을 피신한 곳은 어느 건물 화장실이었다.
다행히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면대에 팔을 짚고 간신히 버티고 섰다.
고개를 들어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언제 나왔는지도 모를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세면대 물을 틀어놓고 정신없이 얼굴에 끼얹었다.
눈물이 수돗물에 섞여 내려갔다.
*
한주 그룹 회장실.
강 회장의 사무실에 민후와 강 회장, 법무팀의 한 변호사가 함께 있었다.
한 변호사가 민후에게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확인해 보십시오. 지분 13% 증여되었다는 서류입니다.”
강 회장이 나머지 지분을 민후에게 증여했다.
이로써 민후가 한주 그룹의 최대주주가 되었고 사실상 오너가 되었다.
“곧 신임회장 선임을 위한 임시주총을 열겠습니다. 회장님은 명예회장으로 추대될 것입니다.”
민후가 상석에 앉은 강 회장을 보았다.
원래 계획은 민후가 그룹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실질적인 지휘권을 가지려고 했었다.
하지만 강 회장의 건강이 안 좋아져서 경영권 승계 시기를 조금 당기게 되었다.
민후가 강 회장을 향해 똑바로 앉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난 언제나 널 믿고 있다.”
강 회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앉으며 말했다.
“한 변호사는 그만 나가보고 황 비서 좀 들어오라고 해.”
“예.”
곧 회장의 수행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한주 에스씨 매각 건은 어떻게 되었어?”
“이엑스가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1차 부도처리 됐습니다.”
“그래?”
강 회장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황 비서가 이어 말했다.
“강 이사님 예상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저들이 회장님 도청장치에 의지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날짜에 혼동을 줬더니 결국 어음 막는 데 실패했습니다.”
민후의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듣고 있던 민후가 말했다.
“저쪽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최종부도는 막으려고 할 겁니다. 자산을 헐값에 내놓으면 그걸 우리가 하나씩 주워 먹으면 되는 거죠.”
민후가 황 비서를 보며 물었다.
“이엑스 주가도 지금 많이 내려갔죠?”
“예.”
“지분 좀 확보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요?”
“경영에 간섭할 정도면 됩니다.”
민후가 단호하게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한주를 우습게 본 걸 후회하게 될 겁니다.”
민후는 그날 저녁, 본가 강 회장의 서재에 있던 도청장치를 떼어냈다.
손으로 분질러 부숴 버리려던 민후가 멈칫했다.
저쪽에서 다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대고 말했다.
“그동안 재미있었습니다. 이제 무전 놀이는 그만 하죠. 도청은 불법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손으로 장치를 조각내어 부숴 버렸다.
*
이엑스푸드 부회장실.
예지의 엄마 김 부회장이 마지막 녹음된 민후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동안 재미있었습니다. 이제 무전 놀이는 그만 하죠. 도청은 불법입니다.>
김 부회장이 이엑스푸드 1차 부도처리라는 기사가 실린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한주 쪽에서 도청한다는 사실을 다 알고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렸다는 얘기였다.
김 부회장의 눈이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점점 커졌다.
“으아아!”
김 부회장은 소리를 지르며 책상에 있던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옆에 있던 비서가 난데없는 봉변에 몸을 움츠렸다.
사무실 문을 열고 예지의 아버지 이 회장이 들어왔다.
“이게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이 회장도 1차 부도처리 기사가 실린 신문을 손에 들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어디서 그런 허위정보를 듣고 일을 망친 거야?”
한주의 장난질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김 부회장은 분해서 씩씩거릴 뿐이었다.
“인수도 실패하고 어음을 막지 못해 1차 부도까지 났어! 72시간 안에 어음 막지 못하면 최종부도야! 빨리 수습할 생각이나 해! 계열사들의 여유자금을 다 끌어모아도 부족해.”
김 부회장은 민후에게 당한 게 분해서 주먹 쥔 손을 덜덜 떨었다.
눈에 독기를 가득 품은 채 김 부회장이 중얼거렸다.
“감히 날 가지고 놀아? 가만 안 둬!”
.
.
.
김 부회장은 곧바로 예지가 수용된 교도소에 면회하러 갔다.
“한주 곧 임시주총이 열린다더라. 네 시동생이 회장으로 선출될 거야.”
민후가 회장직에 오른다는 말에 예지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김 부회장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막을 방법이 있을 것 같아.”
눈이 번쩍 뜨이는 말에 예지가 상체를 바짝 당겼다.
“막을 방법이라니? 그게 뭔데?”
김 부회장이 주변 눈치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도청을 듣다 보니까 강 회장이 정신이 왔다 갔다 하더라.”
“아버님이?”
“며칠 전 일도 기억 못 하는 걸 보면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 같아.”
강 회장의 건강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었던 예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시동생한테 증여한 지분을 다시 뺏을 기회야.”
“어떻게?”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는 걸 주장해야지.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증여한 것은 무효라고.”
예지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리고 성년후견인신청을 하는 거야. 사무처리 능력이 없는 치매 노인을 대신해 후견인이 조력하는 거야. 미국에 가 있는 강 서방을 후견인으로 지정 신청하는 거야.”
예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 아버님 병원 진료 기록 좀 조사해 줘. 약물 복용한 기록도.”
예지가 한껏 들뜬 얼굴로 말했다.
“아버님 주치의를 포섭하는 게 제일 좋은데, 한번 알아봐.”
천천히 고개를 돌린 예지가 히죽 웃었다.
광기가 어린 눈빛이 섬뜩하기까지 했다.
*
[몇 시에 끝납니까? 오늘은 나 만나 줄 거죠?]
시은은 준호의 메시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매번 시은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준호가 왔고 늦은 밤 데이트를 즐겼다.
어제, 그의 어머니를 만난 날은 그를 만나지 않았다.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다.
그를 보면 바로 펑펑 울어 버릴 것 같았기에.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는 핑계를 댔다.
그런데 오늘도 준호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시은은 준호에게 답을 보냈다.
[미안해요. 오늘도 못 만나겠어요. 요즘 아주 바쁘네요.]
이제 그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어디 몸이 아픈 건 아닌 거죠?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네요. 일찍 들어가서 푹 쉬어요.]
곧장 그가 답 메시지를 보내왔다.
몇 글자 안 되는 글자에도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그의 마음이 녹아 있는 듯했다.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곧고, 강직해 보이지만 내면은 약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할까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