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나, 준호 엄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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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나, 준호 엄마예요
2022.07.02.
시은과 데이트를 끝낸 준호가 집에 들어가자 어머니 미영이 준호를 맞았다.
“어디 갔다 오는 거니?”
“…….”
준호는 대답 없이 묵묵히 구두를 벗었다.
“평일에 휴가까지 내고 어디에 갔다 오느냐고.”
“언제부터 제가 휴가 내는 것에까지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준호가 다소 날카롭게 대꾸하자 미영이 표정을 굳혔다.
미영은 준호가 요즘 들어 평일에 연차를 자주 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서비스업종인 시은을 만나느라 그랬다는 걸 알고 나자 몹시 못마땅했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겠니?”
실내용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던 준호가 미영을 보았다.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한테 할 얘기가 있었습니다.”
준호는 자신 몰래 커피숍에 찾아가 시은을 만나고 간 어머니에게 화가 나 있었다.
준호가 거실 쪽으로 걸어가자 미영도 뒤따라갔다.
층고가 높은 거실 한가운데 크림색 가죽 소파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어머니. 어제 그 사람 만났습니까?”
준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미영이 다리를 꼬고 앉아 준호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래.”
“왜 저한테 얘기도 안 하시고 가신 겁니까? 제가 곧 인사시켜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화초 옆에 잡초가 자라면 처음부터 싹을 뽑아 버려야 하는 거다. 그래야 화초가 잘 자라거든.”
준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 사람이 잡초입니까?”
“돈이 없어 군대에 말뚝 박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이 화초는 아니잖니? 밑으로 동생이 둘씩이나 딸린 장녀더구나. 은행에 부채도 있고.”
“뒷조사도 하셨습니까?”
준호의 목소리에 화가 묻어났다.
“네가 마음을 주고 있는 모양인데 어떤 여자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니?”
“집안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예의도 바르고 교육도 제대로 잘 받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어머니 생각처럼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 아니에요.”
미영이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근본은 무시 못 하는 법이야. 지금 네 눈에 그게 안 보일 뿐이야.”
준호가 눈을 매섭게 치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혼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할 겁니다. 어머니는 더는 제 개인사에 관여하지 마세요!”
결혼이란 단어까지 꺼내는 준호를 보고 미영은 더 조바심이 났다.
“설마 걔랑 결혼할 생각이니?”
“…….”
준호가 분노에 찬 얼굴로 미영을 보았다.
아직 결혼 얘기를 시은에게 하지는 않았지만, 준호는 처음부터 시은과의 결혼생활을 상상했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그분, 제가 사랑하고 있습니다.”
미영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허, 사랑 같은 소리 하네.”
미영이 일어나 준호에게 소리쳤다.
“어린애도 아니고 서른이 넘어서 무슨 사랑 타령이야! 걔랑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벌써 생각만 해도 남세스럽다. 그런 집안이랑 어떻게 사돈을 맺어?”
미영의 말에 준호의 눈이 분노로 형형하게 빛났다.
“어머니 말씀대로 저 어린애 아닙니다. 결혼은 혼자 결정하고 혼인신고도 혼자 할 수 있는 성인입니다.”
준호가 의미심장한 말을 끝내고 뒤돌아 2층으로 올라갔다.
미영이 계단을 오르는 준호에게 소리쳤다.
“허튼 생각하지 마! 아버지가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니?”
미영은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씩씩대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
딩동.
은조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은조가 아기를 안고 반가운 얼굴로 현관으로 갔다.
“이모 왔나 보다.”
문을 열자 시은이 환하게 웃었다.
“태풍아~~~. 이모 왔어!”
시은이 은조에게서 태풍이를 뺏어 안았다.
“태풍이 진짜 많이 컸다. 태풍아, 이모야, 이모. 이모 기억하지?”
아기가 시은을 보고 방긋 웃자 시은이 귀엽다며 소리를 질렀다.
“꺄아! 너무 귀여워!”
시은이 육아에 바쁜 은조와 만나기 위해 집으로 왔다.
“자, 이건 태풍이 백일 선물.”
얼마 전 태풍이의 백일이 지났다.
백일은 가족끼리 조촐하게 식사만 해서 시은이 따로 축하해 주기 위해 온 것이다.
“고마워.”
“잘 지냈어? 어떻게 애 낳기 전보다 더 예뻐졌네?”
“응? 그래? 행복해서 그런가?”
“으이그, 또 시작이야. 행복 타령. 너 행복해 죽겠는 거 잘 알겠다고요.”
시은이 거실에 펼쳐진 책들을 보며 물었다.
“공부는 잘돼?”
은조는 사직서를 내고 의상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대학시험을 또 본다고 그래?”
시은이 말은 이렇게 해도 은조가 고등학생 때 의상학과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누구보다도 응원을 해 주었다.
“오랜만에 공부하니까 재미있어. 인강 보면서 공부하는데 할 만해.”
“그래. 너 고등학교 내내 의상학과 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라도 다시 공부하는 거 잘했어. 할 수 있을 거야.”
은조가 차와 과일을 내어오며 시은에게 물었다.
“너는 요즘 어때? 관장님하고는 잘 만나고 있지?”
“응.”
과일을 입에 물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은이 행복하게 웃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지?”
“오늘 93일째야.”
새로 시작한 연인답게 날짜도 꼬박꼬박 세고 있었다.
“한창 좋을 때다.”
“백일 기념일이 딱 일주일 남았어.”
시은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무슨 선물을 해 줄까 고민이야. 같이 고민 좀 해 줘.”
“백일기념 선물? 보통 커플링 많이 하지 않아?”
시은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안 그래도 나 커플링 갖고 싶어. 내가 커플링 준비해도 될까? 준호 씨가 또 준비하면 어쩌지?”
“응. 그래. 관장님이 준비하실 수도 있겠다.”
“그렇지? 보통 남자가 준비하잖아. 커플링 준비하겠지? 내가 안 해도 되겠지?”
“한번 슬쩍 물어보든지.”
“어떻게 그걸 물어봐. 이런 건 서프라이즈로 딱 꺼내놓는 거잖아. 준비하는 것 알아도 모른 척하고 나중에 감동하는 모습을 보여야지.”
시은이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준호 씨가 진짜 커플링 준비할까? 나 커플링 되게 갖고 싶은데.”
“준비하실 것 같아.”
은조는 연애에 행복해하는 시은을 보니 흐뭇했다.
“너도 빨리 결혼해. 너도 아기 낳아서 둘이 아기 안고 만나고 그러면 재미있겠다. 아직 결혼 얘기는 오가지 않았지?”
“응. 아직.”
시은이의 얼굴에 점점 웃음기가 가셨다.
“그런데 결혼할 수 있을까 싶다.”
“왜?”
은조가 놀라며 물었다.
“얼핏 듣기로 준호 씨 집안이 좀 대단한 집안인 것 같더라고.”
시은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랑 좀 수준 차이가 나는 것 같아서. 결혼까지는 못 갈 것 같아.”
은조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런 걸 혼자 판단해? 관장님 그런 거 따질 분 아니야.”
“결혼이 당사자만 하는 건 아니잖아. 결혼은 집안이 비슷한 수준끼리 결혼해야 한다더라.”
시은은 괜스레 아기의 손을 잡고 장난을 치며 말했다.
“난 그냥 연애만 해도 좋아.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할래.”
은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은을 보았다.
*
준호가 퇴근하고 쥬얼리 매장에 들렀다.
“어제 커플링 제작 주문했는데요. 혹시 제작에 들어갔나요?”
“아직 접수만 되었고 제작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커플링 말고 청혼 반지로 바꾸고 싶어서요.”
“청혼 반지요?”
“네.”
“결혼반지로 사용하실 건가요?”
준호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결혼반지에는 좀 더 큰 다이아몬드가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직원은 샘플로 몇 가지의 반지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준호는 100일 기념 선물로 심플한 디자인의 커플링을 주문했었다.
어제 어머니와 언쟁을 벌인 이후로 결혼을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머니가 벌써 저렇게 반대를 하고 나서니 시은을 잃게 될까 봐 불안했다.
아직 결혼에 관한 그녀의 생각도 알지 못하기에 준호의 불안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만약 시은의 마음을 확인한다면 어떻게든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만에 하나 그래도 반대하신다면 어머니에게 말한 대로 결혼을 혼자서 결정하고 진행할 각오도 하고 있었다.
우선은 시은에게 청혼하는 것이 먼저였다.
준호는 직원이 보여주는 샘플 반지 중에서 알이 크고 유독 빛나는 반지를 골랐다.
“이게 좋겠습니다.”
*
은조는 시은이 백일기념 선물을 준비한다는 말에 부러웠다.
자신은 그런 연애를 해 보지 못하고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우린 지금 만난 지 며칠이나 되었지?”
은조는 민후와 만난 지 며칠이나 되었는지 계산해보았다.
할머니가 만나보라고 해서 나간 선 자리에서 민후를 만났는데 정확한 날짜가 기억이 안 났다.
은조는 민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후 씨, 우리 처음 선 본 날 기억해요? 그게 몇월 며칠이었죠? 7월이었던 건 기억나는데 며칠인지 기억이 안 나요.]
업무에 바쁜지 답은 한참 후에 왔다.
[나도 잘 기억이 안 나. 갑자기 그건 왜?]
[우리 만난 지 오늘 며칠째인지 궁금해서요.]
[그게 왜 궁금해?]
남편의 반응에 은조는 서운해 입을 삐죽였다.
‘천 일이 곧 다 되어가는 것 같아서요. 우리 만난 지 천 일째 되는 날 특별하게 기념하고 싶어서요.’라고 썼다가 은조는 다시 타다닥 지웠다.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었어요. 일 보세요.]
*
시은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매니저 업무가 손에 익기 시작하면서 한층 일이 수월해졌다.
오픈과 마감이나 컴플래인 고객을 응대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본사 임원 백으로 입사한 시은을 처음엔 못마땅하게 여기던 점장도 시은의 일 처리 능력을 보며 인정하기 시작했다.
점장은 회장님까지 매장에 찾아오는 것을 보고, 시은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여겼다.
곧 직장인들 퇴근 시간이라 바빠질 것을 대비해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미영이 시은이 일하는 카페에 또 찾아왔다.
점장이 먼저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점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시은도 뒤따라 나갔다.
“안녕하세요.”
미영이 시은을 한번 쳐다보다가 점장에게 말했다.
“점장님. 나 매니저님과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한 시간만 외출해도 되겠어요?”
시은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지난번에도 따로 면접처럼 일대일로 만났는데 왜 또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 걸까? 정상적인 입사 과정이 아니라서 문제가 된 건가?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예. 그럼요. 괜찮습니다.”
감히 누가 회장의 요구를 거절하겠나. 점장은 외출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 할 바쁜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흔쾌히 외출을 허락했다.
시은은 어쩌면 초고속으로 해고당할지도 모른다는 찝찝한 생각을 하며 앞치마를 벗었다.
커피숍을 나온 미영과 시은은 우습게도 근처 다른 커피숍으로 갔다.
종일 커피 냄새 맡았는데 다른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회장님과 마주 앉았다.
시은은 지난번보다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차가운 음료로 목을 축이려고 음료 잔을 들었다.
그때 미영이 기다리지 않고 말을 했다.
“사실 나, 준호 엄마예요.”
순간 시은은 머리를 뭔가로 강타당한 느낌이었다.
빨대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쭉 빨아당기던 시은이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