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도청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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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도청장치
2022.06.28.
시은은 자신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중년 여자가 이상했다.
“고객님, 무슨 일로 절 찾으셨나요?”
“실례지만 몇 살이에요?”
실례인 줄 알면서 나이를 먼저 묻는 건 나이에서 우위를 선점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
기분이 나빴지만, 고객 앞에서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스물여덟입니다.”
“스물여덟.”
미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은의 나이를 한 번 곱씹었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어요?”
고객이 묻기에는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시은은 최대한 친절하게 응대하려고 했다.
“커피숍 운영했습니다.”
“아, 그래요?”
“고객님, 오늘 이용하시는 데 불편한 점이 있으셨습니까?”
“아뇨. 새로운 매니저가 왔다기에 궁금해서 불렀어요.”
시은은 이 카페의 단골손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도가 지나친 개인적인 질문에 시은의 눈빛이 달라졌다.
“죄송하지만 그게 왜 궁금하신 거죠?”
되묻는 시은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목소리도 조금 딱딱해졌다.
그때, 점장이 황급히 다가와 중년 여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시은은 점장의 태도와 말에 놀란 얼굴로 여자를 보았다.
‘회장님?’
“연락도 없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점장은 눈만 끔뻑이며 쳐다보는 시은에게 말했다.
“회장님이십니다. 인사드리세요.”
시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다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새로 입사한 매니저 민시은입니다.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내가 얘기 안 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뭐. 인사는 아까도 했으니 앉으세요.”
미영이 점장을 향해 말했다.
“최 상무 라인으로 들어온 사람이죠?”
“예.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와 봤어요.”
시은은 자신이 정식 단계를 거치지 않고 낙하산으로 입사해서 회장님까지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온몸이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아까 질문에 답은 들었으면 좋겠는데.”
미영의 말에 시은이 시선을 들고 쳐다보았다.
조금 전 부모님 직업에 관해 물었었다.
시은은 미처 하지 못했던 면접을 보는 건가 보다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얼마 전 퇴역하셨습니다.”
“장교셨어요?”
“아뇨. 부사관이셨습니다.”
“아, 그래요.”
미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은의 외모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시은은 갑작스러운 회장님과의 면접에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미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시은도 따라 일어나 미영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미영은 그렇게 면접처럼 아들의 여자를 염탐하고 돌아갔다.
.
.
.
“회장님이시라기에 깜짝 놀랐죠. 그때부터 막 긴장되는 거 있죠.”
시은의 얘기를 듣던 준호의 얼굴이 아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른 건요? 다른 얘기는 안 했습니까?”
“다른 건 안 물어보시고 가셨어요.”
준호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시은 씨한테 무례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누가요? 회장님이요?”
시은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회장님이시라는데 무슨 무례요. 당연히 궁금하시겠다 싶었어요. 아마도 제가 밑에서 차근차근 올라간 게 아니고 소위 말해서 낙하산 같은 거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으시나 싶더라고요.”
“어떤 회장님이 일개 매장의 매니저 인사이동에 관심을 둡니까? 그런 소소한 일에 관심 두지 않습니다.”
준호는 어머니가 자신 몰래 시은을 찾아가서 살피고 조사했다는 게 화가 났다.
“어쨌든 소개해 준 준호 씨 입장 곤란해지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일하려고요.”
시은은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보였다.
어제 만난 회장님이 준호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
민후와 은조는 가족 식사하는 날이 되어 삼성동 본가로 갔다.
태풍이를 낳고는 처음 가는 본가라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았다.
자동차에는 카시트가 필요했고 기저귀와 아기 여벌 옷도 챙기니 짐이 한가득하였다.
강 회장은 손자 볼 생각에 들떠서 며칠 전부터 갓난아기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아기가 올 것이니 멸균 수준으로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산모에게 좋은 음식도 준비하라고 일렀다.
민후가 아기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강 회장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아이고, 우리 손자, 태풍아. 할아버지, 할아버지. 오루루루 까꿍!”
아기가 강 회장을 보고 방긋 웃자 강 회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이 녀석 웃는 것 좀 보게. 허허.”
그렇게 기다리던 손주를 보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민후도 은조도 흐뭇했다.
가족 식사 자리는 예전과 달리 단출했다.
기현도 해외 지사로 나가고 없고 예지는 수감 중이니 식탁에는 세 사람밖에 없었다.
“태풍이 어멈, 많이 먹어라. 산모 몸보신에 좋은 음식으로 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강 회장이 은조를 위해 만든 해신탕을 은조 앞으로 밀어 주었다.
“네, 아버님. 너무 맛있어요.”
“민후도 많이 먹고.”
“예.”
“대표이사 자리에 앉으니 책임감이 더 막중할 것이다. 골머리 아픈 일이 많아졌지?”
민후는 얼마 전 이사회에서 한주 전자 대표이사로 선임이 되었다.
한주 전자는 한주 그룹의 핵심계열사였다.
차기 회장이 되기 위한 초석을 깔아두는 셈이었다.
지금도 지분이 20%에 육박하지만 강 회장이 지분을 더 증여하게 되면 최대주주로 그룹 전체에 지배력이 강화될 것이다.
주주들의 이견이 없는 한 민후가 회장으로 선출될 것이다.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세요? 지난번 김 박사님 만났는데 신경 쪽 약을 드신다고요?”
“요즘 깜빡깜빡하는 게 좀 자주 있어. 약을 먹으면 좀 낫다고 해서 먹고 있다.”
민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 회장을 보았다.
요즘 들어 부쩍 쇠한 모습이었다.
“정밀검사도 받으셨습니까?”
“받았다. 치매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이놈아.”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직 정정하십니다.”
“그럼, 뒷방 늙은이 취급당하기엔 아직 멀쩡해.”
강 회장이 기세 있게 말했다.
“그럼요. 아버님 아직 젊으세요. 앞으로 30년은 더 건강하게 사실 거예요.”
식사가 이어지고 강 회장이 민후에게 말했다.
“한주 에스씨, 이엑스푸드에서 인수하려고 움직이고 있다. 알고 있어?”
“네.”
민후는 식사하면서 덤덤하게 대답했다.
“최고 입찰가를 제시해서 우선협상권이 그쪽으로 갔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일각에서는 자금조달에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이엑스가 그만한 자금이 없다는 건 업계에서는 다 알죠.”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이엑스가 재계 서열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어.”
“…….”
“사돈이 우리 한주를 탐내는 이유가 기현이 때문이냐?”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겁니다. 형한테도 그렇게 얘기했겠죠.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걸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거라니?”
강 회장이 하얀 눈썹을 씰룩이며 민후를 보았다.
“한주 계열사와 합병해서 제3의 그룹을 만들 셈이겠죠.”
“뭐?”
“힘을 키워 우리 한주를 야금야금 먹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강 회장이 끙, 소리를 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기현이 자식이 처가를 등에 업고 우리 그룹을 쪼개기라도 한다는 얘기냐?”
“아버지, 저들 생각대로 그렇게는 안 될 거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강 회장이 답답한지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그런데 이엑스가 우리 쪽 사모펀드에서 제시한 입찰가에 딱 백만 원 높은 금액을 제시했다. 누가 우리가 제시하는 금액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변에 스파이가 있는 건지…….”
강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민후도 그 부분이 조금 이상했다.
계열사를 입찰받을 준비를 몇 달 전부터 하고 있었다는 정황도 수상했다.
“아버지, 도청장치 탐지하는 업체 불러서 서재나 아버지 핸드폰에 도청장치 있는지 탐지 한번 해야겠습니다.”
“도청? 그런 게 있었으면 황 비서가 바로 발견했을 텐데?”
“요즘 기술이 좋아서 육안으로 표시가 잘 나지 않는대요. 화분 속에도 심고 그런다고요.”
민후는 식사를 끝내고 곧바로 도청장치 탐지하는 업체를 불렀다.
강 회장의 서재와 핸드폰에 장치가 있는지 탐지했다.
다행히 핸드폰에는 탐지되지 않았고 서재에서 도청장치가 발견되었다.
도청장치는 조명기구 속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강 회장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흥분했다.
“이, 이걸 대체……!”
민후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아는체하지 말라는 손짓을 보였다.
도청장치를 떼어내지 않고 이걸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후가 강 회장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조용히 물었다.
“아버지, 근래에 서재에 그동안 다녀간 사람이 누구누구입니까?”
민후가 묻자 강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다. 몇 달간 아무도 다녀간 사람이 없는데.”
“형은요? 기현이 형이나 형수가 갇히기 전에 서재에 들어간 적 없었습니까?”
강 회장이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안 난다.”
몇 달간 서재에 다녀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얘기가 민후는 믿기지 않았다.
민후가 알기로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회사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강 회장의 기억력의 문제가 가볍지는 않은 것 같았다.
“회장님, 지난주에 미래혁신본부 본부장님이 다녀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서재 탐지 때문에 집에 와 있던 강 회장의 수행비서가 나서며 말했다.
강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어어, 그래. 왔던 거 같네. 요즘 자주 깜빡깜빡해.”
황 비서가 민후에게 말했다.
“강 대표님이 해외 지사 나가시기 전에도 다녀가셨습니다.”
기현도 아버지의 서재에 다녀갔다고 했다.
“회장님이 요즘 기억력이 부쩍 안 좋아지셨습니다.”
황 비서가 민후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지난번 큰 사모님과의 사건으로 꽤 충격을 받으셨는지 한동안 잠도 잘 못 주무셨거든요.”
민후는 건강했던 아버지가 저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민후가 황 비서에게 말했다.
“황 비서님은 도청장치 일련번호 조사해서 누가 사 갔는지 알아봐 주세요.”
“예.”
*
다음날. 황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사님. 도청장치 누가 사 갔는지 나왔습니다. ○○○라고 예전 큰 사모님의 수족이었습니다.]
큰 사모님이라면 예지를 가리켰다.
“형수 쪽 사람이에요?”
민후의 눈썹이 심상치 않게 꿈틀댔다.
[예, 시키는 일 이것저것 하던 사람인데 사 간 날짜를 보니 큰 사모님 수용된 그 이후입니다. 설치한 사람은 큰 사모님이 아니라 강 대표님일 확률이 높습니다.]
“형이란 얘기죠? 정보가 이엑스에 다 흘러 들어갔고요. 그래서 이엑스가 우리 쪽보다 아슬아슬하게 높은 금액을 입찰가로 제시한 거군요.”
[예.]
민후가 턱을 매만지며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졌다.
“이렇게 하죠. 저들이 듣고 있다는 걸 역으로 이용하죠.”
[어떻게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겁니다.”
[거짓 정보요?]
“이엑스가 입찰 준비를 하면서 CP를 많이 발행했어요. 곧 어음 만기일이 돌아옵니다. 한주 계열사 합병에 성공하면 어음을 막을 수 있겠지만 실패하면 어음을 막을 방법이 없을 겁니다. 매각 날짜에 혼란을 줘서 어음을 막지 못하도록 만들죠.”
전화를 끊은 민후가 비장한 얼굴로 서서 창밖을 응시했다.
“무리하게 몸집을 불리면 탈이 나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