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오늘은 당신을 독차지할 거야
(85/100)
85. 오늘은 당신을 독차지할 거야
(85/100)
85. 오늘은 당신을 독차지할 거야
2022.06.25.
아기가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친정엄마가 육아에 많은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갓난아기를 돌보는 것이 쉬운 게 아니었다.
두 시간마다 깨서 모유를 달라고 우는 아기를 달래가며 젖을 물리니 은조는 늘 잠이 부족했다.
송화는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은조가 안타까웠다.
은조에게 더 자라고 하고 낮에 짜 두었던 모유를 젖병에 담아 먹이기도 했지만 우는 태풍이 소리에 신경이 쓰여 은조는 일어났다.
“피곤해서 우리 딸 얼굴이 핼쑥해졌네. 어떡하니? 피곤해서.”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겪는 거지. 엄마도 나 이렇게 키웠을 거 아니야? 그렇지?”
“물론 그랬지.”
“외할머니도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는 나처럼 도와주는 친정엄마도 없었잖아. 게다가 도와주는 남편도 없었잖아. 진짜 혼자서 키웠을 거 아니야.”
예전에는 엄마가 힘들게 자신을 키워왔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당시 엄마의 고생이 어떠했을지 몸소 체험해 피부로 와 닿았다.
은조는 안타까운 얼굴로 엄마를 보며 말했다.
“우리 엄마 정말 고생 많았어. 고마워, 엄마.”
“그땐 다 그렇게 키웠어. 너 태풍이 엄마한테 맡기고 강 서방이랑 어디 가서 하루 이틀 쉬다 와.”
“우리 엄마 그렇게 고생했는데 또 고생하라고?”
“고생 아니야. 외손자 예뻐서 물고 빨고 하잖아. 너 키울 때는 엄마도 초보여서 힘들었는데 이제는 경력자라 덜 힘들어. 아주 예뻐 죽겠어.”
딸이 육아에 힘들어하는 게 안타까웠던 송화는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산후조리도 끝나서 바깥바람 쐬어도 괜찮아.”
.
.
.
그렇게 해서 은조는 처음으로 아기를 떼어놓고 민후와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목적지는 조용히 쉬었다 올 수 있는 호숫가 별장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민후가 말했다.
“별장은 처음이지?”
“네.”
“오래됐어. 할아버지가 처음 만드신 별장이야. 뒤쪽에 숲이 있어 산책코스도 좋아.”
뒤에는 울창한 숲이 있고 앞에는 호수가 있어 경관이 아주 좋다고 했다.
기대도 되었지만 처음으로 아기를 떼 놓고 오니 은조는 자꾸 아기가 신경 쓰였다.
“늘 안고 있던 아기가 팔에 없으니 허전해요.”
은조가 팔을 들며 말했다.
“오늘은 태풍이는 잊어버리고 온전히 나한테 집중해 주길 바라.”
민후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 사실 그동안 조금 서운했어.”
“왜요?”
“당신의 관심에서 내가 2순위로 밀려난 게 확연히 느껴졌거든.”
“에? 진짜? 아닌데……. 난 당신이 늘 1순위예요.”
“내 시선은 항상 당신을 향해 있는데 당신 시선이 항상 태풍이한테만 가 있더라고.”
그런 감정을 느꼈다니, 은조는 남편에게 조금 미안했다.
“엄마는 아기한테 신경이 더 갈 수밖에 없어요. 내가 아니면 아기가 굶고 아기가 날 찾으니까요.”
“그래. 이해는 해. 이해는 하지만…… 조금 서운했어.”
은조가 상체를 기울여 민후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오늘, 내일은 당신만 바라볼게요. 내 눈에 항상 민후 씨 밖에 없어요.”
“그래. 장모님한테 정말 고마워. 아내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지은 지 50년도 넘었다는 별장에 도착했다.
건물은 관리를 잘해서 낡은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담쟁이 가지들이 벽체에 가득해 고풍스러운 멋이 났다.
“여기 오니까 숲 냄새나요. 나무 냄새, 흙냄새들. 진짜 좋다.”
은조는 가슴을 부풀리며 피톤치드 가득한 공기를 흡입했다.
별장 바로 앞에는 잔잔한 호수가 있고 백조들이 평화롭게 떠다녔다.
“여기 진짜 마음에 들어요. 진작 와 볼걸. 다음엔 태풍이 데리고도 와 봐요.”
별장 내부도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와, 벽난로네요. 이거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한쪽 벽에 설치된 벽난로가 분위기 있어 보였다.
민후가 땔감에 불을 붙이자 타닥타닥 불꽃을 일으키며 벽난로가 활활 탔다.
은조는 벽난로 앞에 앉아 불멍을 시도했다.
민후가 어디선가 가져온 담요를 은조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은조가 옆에 앉은 민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 너무 좋다.”
평온하고 따뜻한 이 순간이 행복했다.
타닥, 타다닥.
나무가 타면서 일어나는 불꽃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이렇게 둘만 있는 거 오랜만이다.”
민후가 은조의 어깨를 감싸고 말했다.
“이제 금욕기간도 지났으니 오늘은 당신의 승은을 기대해도 되겠지?”
출산 전부터 너무 오랫동안 금욕생활을 해왔던 민후는 의사가 말한 한 달이 지나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네. 저도 오늘을 기다렸어요.”
민후가 고개를 돌려 은조의 얼굴을 보았다.
은조가 키스해 달라는 듯 눈을 감고 턱을 들었다.
민후가 은조의 입술에 입술을 살며시 포갰다.
입술에 서로의 숨결이 스며들었다.
벽난로에 타오르는 불처럼 부부의 키스는 점점 뜨겁게 타올랐다.
숨이 차오를 정도로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참기 힘들다는 듯 민후의 손이 은조의 옷 속을 파고들었다.
은조는 고개를 젖히고 민후의 입술과 손길에 몸을 맡겼다.
어느새 벗겨진 옷가지들이 벽난로 주변 바닥에 흩어졌다.
담요를 덮은 두 사람의 몸은 하나가 되어 포개졌다.
타닥타닥 벽난로의 불길은 점점 거세게 타올랐다.
*
시은의 휴무여서 준호도 연차를 내고 두 사람은 교외 데이트를 즐겼다.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서 준호가 시은에게 말했다.
“일은 고되지 않습니까?”
“손님이 많이 몰릴 때는 힘들긴 한데 그렇게 힘들진 않아요. 매장이 커서 박물관에 있을 때 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주문량이 많더라고요.”
시은이 준호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큰 프랜차이즈 회사에 입사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준호 씨, 아시는 분이 있어요?”
시은은 준호의 소개로 프랜차이즈 카페의 매니저로 입사했고 1~2년 일하면 점장까지 진급도 가능하다고 했다.
“네.”
“누구요? 점장님이요?”
“아뇨. 본사에.”
“그럼 준호 씨가 저 여기 꽂아 준 거예요?”
“제가 무슨 권한으로요. 전 소개만 했을 뿐입니다.”
준호가 덧붙여 말했다.
“관내 운영시설에서도 시은 씨 카페에 관한 관람객들 서비스 평이 좋았습니다. 서비스나 관리 부분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채용이 된 거죠. 저는 소개만 했던 거고 시은 씨 능력으로 입사한 겁니다.”
“어쨌든 고마워요. 덕분에 큰 회사에서 일하니 저도 새로운 거 많이 배워요.”
사실 준호의 외가 쪽이 국내 유명 프랜차이즈를 보유한 외식사업체였다. 패밀리레스토랑, 한식부페 등 유명 프랜차이즈 다수를 소유한 국내 굴지의 외식업체였다.
시은이 일하는 카페 프랜차이즈도 그중 하나였다.
*
며칠 전 준호의 집.
준호의 어머니 미영이 출근하는 준호에게 물었다.
“너, 외삼촌한테 인사 청탁을 했다고?”
미영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웬일이니? 그런 부탁을 다 하고. 여자라며? 누군데?”
“청탁이 아니고 그냥 소개라고 하시죠. 자격 미달이면 입사 안 시켜도 된다고 했습니다.”
준호가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부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녀석이 부탁한 건데 삼촌이 모른척하겠어? 얘기 들으니 업계 경력도 있고 영 아닌 사람은 아니라고 하더구나.”
미영은 부탁 같은 건 태생적으로 싫어하던 아들이 최초로 부탁한 사람이 여자여서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누구냐고. 너랑 어떤 관계길래 네가 생전 안 하던 부탁을 하느냐고.”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서려던 준호가 뒤돌아 어머니를 보았다.
“제가 많이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그 말에 미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사귀는 여자야? 어떤 여잔데? 어느 집안 자제야?”
묻는 미영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카페 매니저로 취업을 했다는 건 번듯한 집안의 여식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준호가 진지한 얼굴로 미영을 보았다.
“어머니가 좋아하실 만한 집안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제가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여자이기도 하고요.”
미영은 굳어진 얼굴로 준호를 보았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그냥 넘겨서는 안 될 문제인 것 같았다.
미영이 입꼬리를 슬쩍 당겨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선 자리를 마다하더니 숨겨둔 여자가 있었구나? 인사는 언제 시켜줄 거니?”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닙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때가 되면 인사시켜드리겠습니다.”
준호는 어머니가 원하는 며느릿감이 어떤 여자인지 알고 있다.
어머니가 준호에게 내밀었던 선 자리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집안이 좋은 여자들이었다.
준호는 시은의 부모님이 어떤 직업을 가지셨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서로 개인사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았었다.
*
운전하던 준호는 며칠 전 어머니가 물었던 것이 생각나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은 씨.”
시은이 대답 대신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질문 실례일지 모르겠는데,”
준호가 말끝을 흐리자 시은이 웃었다.
“뭔데요? 실례되어도 괜찮으니 물어보세요.”
“부모님은…… 무슨 일 하십니까?”
질문하고 나서도 준호는 왠지 자신이 속물 같아서 싫었다.
“아, 부모님이요. 아버지는 평생 직업군인으로 근무하시다가 퇴역하셨어요. 엄마는 그냥 전업주부시고요.”
“아. 네.”
준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준호 씨는요? 준호 씨 부모님은 무슨 일 하세요?”
“아버지는 대학교수이십니다. 어머니는 사업체 운영하시고요.”
“아, 그러시구나.”
고개를 돌리는 시은의 표정이 어딘가 조금 어두워졌다.
순간 준호의 집과 자신의 집이 차이가 좀 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어쩌면 준호와의 연애가 길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이런 거 물어서.”
“아니에요. 어차피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인데요. 뭐.”
시은이 차창 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틀 연속으로 이런 질문을 받으니까 이상하기도 하네요. 어제도 누가 저한테 부모님이 뭐 하시냐고 물으셨거든요.”
그 말에 준호가 쳐다보았다.
“누가요?”
“어떤 여자 손님이 오셨는데 매니저를 불러 달라고 해서 갔거든요. 앉으라고 하더니 개인적인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준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로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그녀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뭘 물었습니까?”
*
하루 전.
점심 피크 시간이 한차례 지나가고 시은이 한숨 돌릴 때였다.
“매니저님. 어떤 손님이 매니저님을 찾으세요.”
“저요?”
시은이 의아한 얼굴로 직원이 가리킨 손님을 보았다.
6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 손님이었다.
시은은 어떤 불만이 있어 항의하려고 그러나 생각하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고개의 만족을 위해서 어떤 불만 사항도 친절하게 응대하고 개선하는 것이 매니저의 임무였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이 카페의 매니저입니다. 저희 매장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용하시는 데 불편한 점이 있으셨습니까?”
시은이 공손한 자세로 인사하고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준호의 어머니, 미영이 시은을 쳐다보았다.
“아가씨가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매니저예요?”
“네. 그렇습니다.”
“앞에 좀 앉아 볼래요?”
미영이 턱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시은은 고객의 태도에 상대하기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친절하게 응대하되 일방적이고 터무니없는 불만에 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