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뽀뽀 천 번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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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뽀뽀 천 번 해 줄게
2022.06.21.
은조는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은 대부분 산후조리원에 들어가고는 하지만 은조는 집이 가장 편한 곳이라 집으로 왔다.
친정엄마가 집에서 숙식하며 산후조리를 도와주기로 했다.
송화는 은조가 몸조리하는 동안에는 잠을 푹 자도록 아기침대도 송화 방에 두라고 했다.
민후도 배우자 출산 휴가를 받았다.
24시간도 모자라게 바빴지만, 출산한 아내를 위해 온전하게 시간을 쓰고 싶었다.
민후는 은조가 집에 오자마자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강 서방, 뭐 하는 건가?”
송화가 가까이 가 보니 미역을 불리고 있었다.
“미역국 끓이려고?”
“네. 장모님.”
“이리 나와 봐. 내가 할게.”
“아닙니다. 아기 낳으면 제가 해 주고 싶어서 일부러 배웠습니다. 고생한 아내에게 직접 미역국 끓여 주고 싶어요.”
민후의 말에 송화는 말리던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딸에게 저렇게 다정한 사위를 보면 흐뭇했다.
민후는 도우미에게 배웠던 미역국 끓이는 법을 상기하면서 요리에 집중했다.
불린 미역을 참기름에 볶고 소고기도 볶다가 물을 부었다.
처음 해 보는 솜씨치고는 제법 비주얼이 괜찮았다.
주방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자 은조가 나왔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요? 민후 씨, 뭐 만들어요?”
“왜 나왔어? 더 누워 있어.”
민후가 국을 휘저으며 말했다.
“병원에서도 계속 누워 있어서 지겨워요. 미역국 끓이는 거예요?”
“응. 당신 아기 낳으면 미역국은 꼭 내 손으로 끓여 주고 싶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
은조가 민후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해 주는 게 없다뇨. 당신이 이렇게 다정하게 잘해주는 게 난 매일 선물 받는 기분이에요.”
민후가 고개를 돌려 은조에 말했다.
“미역국 말고 선물은 따로 준비한 게 하나 있지.”
“선물이 또 있어요? 뭔데요?”
은조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물었다.
민후가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고급 외제 차의 로고가 그려진 스마트키였다.
가운데 알파벳 B가 눈에 띄는 억대의 최고급 자동차였다.
“아기 데리고 병원도 자주 다녀야 하잖아.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좀 더 튼튼한 차가 나을 것 같아서.”
“자동차 선물이요?”
은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응. 올해 신형이야. 우리나라에 열 대밖에 안 들어왔어.”
이렇게 고가의 선물을 받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우와! 나, 이거 진짜 받아도 돼요? 고마워요. 민후 씨!”
은조가 기쁜 얼굴로 민후를 껴안았다.
좋아하는 은조를 보며 민후도 기분이 좋았다.
“마음에 들어?”
“네. 이렇게 큰 선물 태어나서 처음 받아봐요.”
“당신이 한 위대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민후가 은조를 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 봤어? 난 마음에 드는 거 있었어. 당신은 그중에 어떤 게 좋아?”
“보자마자 딱 마음에 드는 게 있었어요.”
둘은 왠지 같은 이름을 골랐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말하기 할래요?”
“그래.”
은조가 하나, 둘, 셋, 하고 센 다음 둘이 동시에 이름을 말했다.
“강태풍.”
“강태풍.”
예상한 대로 둘 다 같은 이름을 골랐다.
“당신도 그 이름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요.”
그사이 미역국이 보글보글 끓었다.
“다 된 것 같은데 간 좀 볼래?”
은조가 미역국 맛을 보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진짜 맛있어요. 지금까지 먹어 본 미역국 중에 제일 맛있어요.”
서로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송화가 아기를 안고 나왔다.
“엄마, 맘마 먹을 시간이에요. 맘마 주세요.”
송화가 아기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우리 태풍이 배고파요? 맘마 먹을까요?”
은조가 아기를 안고 모유 수유할 자세를 취했다.
“아기 이름은 태풍이로 정한 거야?”
송화가 물었다.
“응. 아버님이 지어 주신 이름 중에 강태풍이 난 딱 끌리더라고. 엄마는 별로야?”
“아냐. 엄마도 좋아. 이름에서 아주 씩씩하고 늠름한 느낌이 나는 게 아주 좋아.”
“아버님이 태풍이 동생 이름까지 지으신 게 마음에 들었어. 태풍이, 태산이, 태랑이, 딸 이름 태희까지 지으셨어.”
“사돈어른께서 이름 지으신 거 다 쓰려면 3남 1녀는 낳아야겠네?”
3남 1녀는 낳아야겠다는 말에 은조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개구쟁이 남자아이 셋에 귀여운 딸까지. 상상만 해도 정신없고 복작복작했다. 그래도 행복할 것 같았다.
모유를 먹이니 아기는 금세 잠이 들었다.
모유를 먹으면 반드시 배에 찬 가스를 빼 주어야 한다고 했다.
잠이 든 아기를 안고 등을 쓸어 주는 것은 민후의 몫이었다.
은조가 안고 있을 땐 몰랐는데 민후가 아기를 안고 있으니 정말 작았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몸에 팔다리가 있고 작은 얼굴엔 눈코입이 올망졸망 있을까 신기했다.
민후가 잠든 아기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장모님도 아기를 돌보느라 피곤했던지 깜빡 잠이 들어 있었다.
민후가 조용히 은조를 데리고 침실로 갔다.
“당신도 누워 있어. 가능한 몸을 안 쓰는 게 좋다잖아.”
민후는 은조와 함께 침대로 가서 누웠다.
민후의 팔을 베고 누운 은조가 민후의 허리를 껴안고 물었다.
“우리 안 한 지 얼마나 됐죠?”
“두 달도 넘었어.”
막달부터는 위험하다고 해서 출산 두 달 전부터는 잠자리를 아예 하지 않았다.
아이 낳고도 최소 한 달은 지나야 부부생활이 가능하다고 의사가 말했다.
은조가 안타까운 얼굴로 민후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민후 씨, 오래 참아서 어떡하지?”
그간 민후의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아는 은조로서는 지금 그가 극한의 인내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몸에 사리가 서너 말은 쌓였을 것 같아.”
은조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그냥 해 버릴까요? 꼭 책에 쓰여 있는 대로 따라야 할 필요 있을까요?”
민후가 시선을 내려 은조를 보았다.
아내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민후가 짧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겨우 참고 있는데 흔들지 마. 나 진짜 폭발할 것 같다고.”
책에는 여자의 몸이 완전히 회복하는 데 한 달은 걸린다고 쓰여 있었다.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 때문에 아내의 건강을 해치게 할 수는 없었다.
“사실은 나도 하고 싶으니까 그렇죠.”
은조가 입을 삐죽이며 말하자 민후가 은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은조는 진짜 하려나, 생각하며 긴장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대신 뽀뽀를 천 번 해줄게. 당신 온몸에.”
은조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먼저 해 줄래요.”
은조가 민후를 밀치고 반대로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뽀뽀 천 번, 내가 먼저 해 줄 거야.”
은조가 고개를 숙여 민후의 입술을 비롯한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했다.
그녀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
.
.
서로를 꼭 끌어안고 민후는 은조의 어깨와 팔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를 만지고 있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 모두 편안한 표정으로 서로를 안고 체온을 느꼈다.
“출산 휴가 끝나면 바로 복직할 거야?”
“그래야죠.”
“괜찮겠어? 힘들지 않겠어?”
“다들 3개월 쉬고 나와서 일하는데 나도 할 수 있겠죠.”
“사실 마음 같아서는 더 쉬라고 하고 싶은데 당신도 나름의 일에 대한 욕심이 있을 테니까 말은 못 하겠어.”
가만히 듣고 있던 은조가 말했다.
“사실 일에 대한 욕심, 별로 없어요. 이 일이 원래 제 꿈은 아니었거든요.”
민후가 시선을 내려 은조를 보았다.
“꿈이 뭐였는데?”
“의상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전혀 다른 분야인데?”
“할머니가 학예사가 꼭 되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 과를 가게 되었죠.”
민후는 진로 결정까지 은조 뜻대로 하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 알게 되었죠. 죽은 언니의 꿈이 학예사였더라고요. 죽은 언니 대신 나를 데려왔기 때문에 언니가 되려고 했던 학예사가 되라고 한 거였어요.”
민후는 마음이 아파 은조를 꼭 껴안았다.
“지금도 안 늦었어. 하고 싶었던 공부 다시 해.”
“너무 늦었죠. 이제 아기 엄마가 되었는데.”
민후가 은조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70대 할머니가 시험 보고 대학에 입학한 거 뉴스에서 봤어. 할머니도 하시는데 당신이 못 할 이유가 뭐 있어?”
은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민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박물관 사직서 내고 다시 공부해. 다시 시험 봐서 대학교 다시 들어가.”
“진심이에요?”
“그래. 진심이야. 내가 왜 이런 농담을 하겠어?”
“낼모레면 서른인데 새내기 대학생이 되라고요? 그리고 공부한다고 해도 나이가 차서 그 분야로 취업도 할 수 없을 텐데.”
“취업 안 해도 돼. 하고 싶었던 공부라며? 공부에 나이가 어디 있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 보고 싶었던 공부 하라고.”
은조는 민후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듣고 보니 공부하는 데 나이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설 내내 은조의 꿈은 패션디자이너였다.
꿈까지는 이루지는 못해도 깊이 있는 공부는 해 보고 싶었다.
“정말…… 나 공부할까요?”
“그래. 원하면 유학도 보내줄 수 있…….”
민후가 말끝을 흐리다가 정색했다.
“아, 이건 좀 생각해 봐야겠어. 공부는 원 없이 시켜주고 싶지만 멀리 보내는 건 못 해.”
민후가 은조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서 내가 못 살 거야.”
은조가 픽 웃었다.
유학까지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는다.
“나 진짜 공부해요?”
“응. 할머니 때문에 못 했던 거 다 해 봐, 아기는 베이비시터 쓰면 되고. 장모님도 도와주실 거니까.”
“나 그럼 다시 수험생이 되는 거잖아요.”
“자신 없어?”
은조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뇨.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나 공부 다시 할래요. 다시 대학교도 다니고 싶어요.”
은조는 다시 새내기 대학생이 된다는 생각에 조금 들뜬 표정을 지었다.
“나 사실, 할머니 때문에 집, 학교, 집, 학교만 다녔거든요. 친구도 마음대로 못 사귀고 MT 같은 것도 한 번도 못 갔어요. 미팅도 못 해 봤고.”
신난 듯 말하는 은조를 보며 민후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미팅하겠다는 건 아니지?”
“어휴, 당연히 아니죠. 학교생활의 즐거움을 온전히 못 누렸다는 얘기예요.”
민후는 미팅에, MT 얘기를 들으니 벌써 아내 단속을 하고 싶어졌다.
처음에 하고 싶었던 공부 하라고 할 때만 해도 여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던 건 사실이다.
할머니의 간섭 때문에 MT도 한 번도 못 갔다는 말을 했는데 자신도 똑같이 간섭하고 못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음, MT라…….”
은조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 만약 다시 대학교 새내기 되면 MT 보내줄 거죠?”
민후가 당황한 눈으로 은조를 보았다.
저렇게 기대에 찬 표정에 대고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MT 그거, 별거 없는데. 밤새 술 마시는 거 말고는 하는 것도 없어. 당신은 술도 못 마셔서 재미없을 거야.”
“그래도 궁금해서 한번 가 보고 싶다고요. 가게 해 줄 거죠?”
“…….”
민후가 선뜻 대답을 못 하고 쳐다보았다.
‘의상디자인과에는 남학생도 있겠지? 남녀가 같은 방에서 잔다고? 상당히 불쾌하군.’
“왜 대답이 없어요? MT 안 보내줄 거예요?”
“아니. 가, 가야지. 가 보고 싶었다며.”
민후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자 은조가 환하게 웃었다.
“약속해요. 자, 약속.”
은조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민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