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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겁쟁이 민후 (82/100)


82. 겁쟁이 민후
2022.06.14.



“은조야!”

병실에 들어선 민후가 누워 있는 은조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응. 괜찮아요.”

은조가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거칠게 숨을 뱉어내며 그가 물었다.


“진짜 괜찮은 거야? 양수가 샜다며?”

“새는 건 가끔 있는 일이래요. 계속 나오지만 않으면 괜찮대요.”

애가 달아 달려온 민후와 달리 은조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걱정 많이 했어요? 안 그래도 급하게 올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전화를 바로 끊어 버려서 말릴 새도 없었어요.”

민후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지금 감염 예방주사 맞고 있어요. 밤새 별일 없으면 내일 퇴원해도 된대요.”

“아, 다행이다.”

은조는 민후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저런, 걱정 많이 했나 봐. 땀 좀 봐.”

은조가 팔을 뻗어 민후의 이마를 닦았다.

민후가 은조의 손을 덥석 잡고 입을 맞추었다.

눈을 감고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너무 놀랐어. 양수가 새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

“놀랐겠어요. 저도 처음에 양수 샜다는 말 듣고 놀랐거든요.”

“정말 괜찮은 거래? 내일 퇴원해도 된대? 불안하면 더 입원해 있는 건 어때?”

“검사했는데 다 정상이라서 더 입원하지 않아도 된대요. 무리하지 않고 안정 취하면 된대요.”

“걱정 많이 했어. 잘못될까 봐 얼마나 겁이 났던지.”

민후가 은조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요즘 나 겁쟁이가 된 것 같아.”

“왜요?”

“다른 일은 안 그런데 너와 아기에 관해서는 굉장히 예민해.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겁나.”

은조가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대범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왜 이렇게 겁이 많아졌을까?”

은조가 민후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일 안 일어나요.”

“…….”

“아까 내가 너무 앞뒤 자르고 입원한다고만 얘기해서 그래요. 차근차근 설명했으면 걱정 많이 안 했을 텐데.”

“어쨌든 별일 아니어서 다행이다.”

“일하다가 뛰어와서 어떡해요? 괜히 미안해지네.”

“일은 내일 하면 되지.”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식사시간이 되어 직원이 식판을 가지고 들어왔다.


“식사 왔습니다.”

민후가 식판을 받아서 침대로 가져왔다.


“밥 먹자.”

민후가 침대에 딸린 식판을 올리고 침대 헤드도 올려 주었다.

그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떠 은조의 입가에 가져갔다.


“자. 아, 해.”

“저 손 멀쩡해요.”

“알아. 내가 먹여 주고 싶어서 그래.”

은조는 피식 웃으며 입을 벌렸다.

밥숟가락을 입에 넣어주자 은조가 아기 새처럼 잘 받아먹었다.
 

  
민후는 오물거리며 밥을 먹는 은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또 밥을 떠서 먹여 주었다.


“나 완전 어린애 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분은 좋네요. 사랑을 듬뿍 받는 것 같아.”

“기분 좋으면 집에서도 매일 먹여 줘야겠는걸?”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

삼성동 본가 강 회장의 서재.


“이혼하거라.”

강 회장이 기현에게 말했다.

기현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아들과 며느리를 해하려고 했던 사람을 내 식구로 둘 수가 없다.”

강 회장은 강경하게 이혼할 것을 권했다.

기현이 아무 대답이 없자 강 회장이 쳐다보았다.


“대답 안 해?”

“저희 부부 일이에요. 아버지가 갈라서라, 마라 하실 권한이 없어요.”

“뭐야?”

강 회장이 눈썹을 치켜들며 인상을 썼다.


“이게 단순하게 가정사로 여길 일이야? 한주 그룹의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졌어!”

뉴스에 한주 그룹의 기사들이 보도되면서 주가가 요동쳤다.


“서로 원수진 것도 아니고 형제끼리 죽이려 했던 사건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걔 징역 살고 나오면 나 다시 식구로 못 받아들인다.”

강 회장의 입장은 단호했다.


“네가 걔랑 헤어지지 못하겠다면 너도 같이 호적에서 파 버릴 거다.”

기현이 강 회장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냥 하는 소리 같으냐?”

호적을 파겠다는 단호한 강 회장의 말에도 기현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기현은 지금 딴생각하느라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오늘 강 회장의 서재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중대한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것도 교도소에 면회 갔을 때 예지가 시킨 일이었다.


‘여보. 아버님 서재에 도청 장치 하나 심어놔.’


‘도청 장치?’


‘당신이 회장님이 되려면 아버님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파악해야 해..’

예지는 교도소에서도 기현을 차기 회장으로 만들기 위해 수를 쓰고 있었다.


‘한주 계열사 매각 소식이 있어.. 우리 이엑스푸드에서 합병을 추진해 볼 생각이야..’

친정 쪽 기업에서 한주의 지분을 확보해 기현에게 힘을 실어 줄 계획이었다.

기현은 예지의 계획을 듣고 간도 크게 강 회장의 서재에 도청 장치를 심어놓을 생각이었다.

어떻게 하면 강 회장이 자리를 비우게 하고 이걸 설치할까, 그 생각만 가득했다.

*

기현은 예지를 면회하기 위해 교도소로 갔다.

기다리고 있으니 교도관과 예지가 들어왔다.

예지의 모습을 본 기현이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예지의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당신 얼굴이 왜 그래? 맞았어?”

예지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응. 여보. 여기 미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아! 나 머리도 뽑혔어. 이거 봐 봐.”

예지가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이 뽑힌 자리를 보여 주었다.

기현은 예지의 성격으로 미루어봤을 때 재소자들과 트러블이 있을 것을 예상했었다.

평생 공주처럼 살아온 사람이 이런 곳에서 생활하려니 하루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재소자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폭행을 묵인해도 되는 겁니까?”

기현이 옆에 있는 교도관에게 소리를 질렀다.

교도관이 힐끔 쳐다보고 대답했다.


“폭행자는 독방 수감 행정처분 되었습니다.”

“겨우 10일이잖아요. 나오면 또 때릴 거라고요!”

예지가 교도관에게 불만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예지 수감자는 이곳이 교화하는 곳인 걸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푹신한 이불을 찾질 않나, 유기농 과일을 찾지를 않나, 이러니 갈등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교도관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무슨 호텔인 줄 아나.”

기현이 측은한 눈으로 예지를 보았다.


“교도소에 무슨 유기농 과일이 있어. 힘들어도 이곳에 적응해야지.”

예지가 원망하는 눈으로 기현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힘을 키워서 나 가석방이나 특별사면 받게 해 줘.”

수용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가석방 얘기를 했다.


“여기에 질 떨어지는 여자들하고 하루도 더 못 지내겠어!”

예지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작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그건 어떻게 됐어?”

그거라고 공개적으로 말을 못 하는 것 보면 도청 장치를 말하는 거였다.


“설치했어.”

예지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말했다.


“여보, 한주 에스씨가 부도 위기래. 지난번 대양 EM을 무리하게 인수하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나 봐. 채권단으로 넘어가게 되면 우리 이엑스가 최고의 입찰가를 제시해서 인수할 생각이야. 우리 아빠 기업이 덩치를 키울 거야.”

예지가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해서 우리가 선수를 쳐야지. 서방님을 밀어낼 기회가 분명 올 거야.”

예지가 기현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아버님이 시킨 대로 해외지사에 잠깐 있다가 와. 1년만 나갔다 오면 우리 엄마 아빠가 그동안 설계할 거야.”

“나 해외지사로 나가 있는 동안 민후 자식이 회장 선임될 거야. 그동안 가만히 손 놓고 있으라고?”

“기다려. 도약을 위한 일보 후퇴야. 서방님이 힘을 잃도록 해야 해.”

기현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아버지가 나가기 전에 당신이랑 서류 정리하고 나가라고 하셔.”

예지가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이혼하라고?”

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나 버리면 안 되는 거 알지?”

예지가 상체를 바짝 당겨 투명판에 손바닥을 대고 말했다.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도 다 내 덕이야. 나 없이 계열사 대표 자리까지 가능했을 줄 알아? 당신은 나 없이 아무것도 못 해. 알지?”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에 기현이 예지를 기분 나쁘게 쳐다보았다.


“나 여기서 몇 년 썩는 이유가 뭔데, 다 당신 때문이잖아. 당신 하나 잘되게 해 주려고.”

 

.
.
.

면회를 끝내고 나온 기현은 뒤를 돌아 교도소 건물을 보았다.


‘잠깐은 당신 힘을 빌리지만 내가 힘이 세졌을 때는 복역 중인 아내를 끝까지 안고 갈 이유가 없지.’

기현이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어차피 당신은 20년 동안 거기서 썩어야 하잖아.’

 

*

2달 후.

한밤중에 은조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진통하는 은조를 태우고 운전하는 민후의 얼굴은 초조함이 가득했다.


“아아아.”

은조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낼 때마다 민후는 안절부절못했다.


“많이 아파? 조금만,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어.”

새벽이라 도로가 뻥 뚫려 있는데도 민후의 마음은 급했다.

그렇다고 산모를 태우고 과속을 할 수는 없었다.

병원에 도착한 은조는 곧바로 분만 준비실에 들어갔다.

각종 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은조는 진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민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산통은 트럭이 허리를 밟고 지나가는 듯한 통증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이런 고통을 겪은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은조의 손을 잡았다.


“너무 괴로우면 수술해 달라고 할까? 마취하면 아프지 않을 거 아니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은조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할 수 있어요.”

산통으로 바짝 말라 버린 입술로 그녀가 말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당신을 그냥 보고 있기가 너무 힘들어.”

일그러진 민후의 표정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민후가 은조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해. 은조야. 내가 미안해.”

민후는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아내 옆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했다.


“당신이 왜 미안해요. 천사 아기를 만나려면 누구나 겪는 거예요. 우리 아기한테 힘내라고 당신이 말해 줘요.”

민후는 배에 대고 아기에게 말했다.


“리은아. 조금만 힘내자. 엄마 힘들지 않게 빨리 세상에 나와.”

민후는 울컥했는지 눈가가 빨갛게 변했다.


“아빠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해.”

은조가 아기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민후의 손을 꼭 잡았다.


“민후 씨가 도와주는 게 왜 없어요? 이렇게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전 의지가 돼요. 민후 씨 없다면 전 더 무서웠을 거예요.”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은조를 보며 민후는 미안함과 고마움과 걱정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민후는 잠깐 짬을 내어 장모님과 강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오늘 아기를 낳을 것 같습니다. 지금 병원이에요.”

[뭐? 우리 새아가가 아기를 낳는다고? 어디? 어디 병원이야?]

강 회장은 몹시 흥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오매불망 손주만 기다렸던 강 회장이 손주의 탄생 소식에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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