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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안달복달 민후 (81/100)


81. 안달복달 민후
2022.06.11.


시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준호 관장님]이라고 뜬 화면을 보자마자 가슴이 쿵쿵 뛰었다.

1년에 몇 번 나오지 않는 세상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준호입니다.]

꿀 떨어지는 굵은 저음에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네.”

[7시까지 데리러 가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네.”

전화를 끊고 시은은 이준호 관장님이라고 저장된 이름을 수정했다.

-내 남자-

오랜만에 연애라 내 남자라고 쓴 게 좀 오글거리긴 했다.


“뭐 어때, 내 남자 맞는데. 히히.”

시은은 내 남자 옆에 하트를 하나 붙였다.

그러고는 저장된 이름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준호와 연애 1일 차 첫 데이트는 중식 코스 요리였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각종 중화요리가 순서대로 나왔다.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먹는 시은에게 준호가 물었다.


“음식은 입에 맞습니까?”

“네. 다 맛있어요.”

“저한테 궁금한 거 없습니까?”

궁금한 거요? 하고 시은이 눈으로 묻듯이 쳐다보았다.


“집은 어디고, 형제가 몇인지 보통 호구조사 같은 거 하지 않습니까?”

“아.”

시은이 고개를 주억거리다 말했다.


“궁금한 거 있어요.”

“물어보세요.”

“제가 그날 전화로 정확히 뭐라고 했어요?”

준호가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그날 밤에 제가 전화했을 때요. 뭐라고 하던가요?”

“기억…… 안 납니까?”

“네. 그날 제가 좀 취해서…… 보통 필름 끊긴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준호는 조금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날 자신에게 고백한 것을 기억을 못 하고 있었다.

그 고백을 듣고 얼마나 많은 고뇌에 빠졌었는데. 정작 본인은 그걸 기억 못 하다니.

준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시은은 긴장한 얼굴로 준호를 보았다.

분명 고백한 것은 맞을 건데 어떤 식으로 했는지가 궁금했다.

진상을 부리지는 않았는지,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하진 않았는지.


“기억을 못 할 줄은 몰랐네요.”

준호는 약간의 서운함과 함께 장난기가 발동했다.

쉽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날 뭐라고 했냐면…….”

시은이 집중하느라 상체가 점점 다가왔다.


“알려주기 싫은데요.”

준호가 말하자 시은이 상체를 뒤로 물리며 되물었다.


“네? 왜요?”

준호는 쿡, 하고 혼자 웃기만 했다.


“왜 알려주기 싫은데요?”

“시은 씨 계속 궁금하라고요.”

“네?”

준호가 장난하는 것을 눈치챈 시은도 피식 웃었다.


“진짜 안 알려줄 거예요?”

“시은 씨 하는 거 봐서요.”

“제가 어떻게 하면 알려주는데요?”

“글쎄요.”

준호는 음식을 입에 넣고 씹으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시은이 귀여웠다.


“그날 제가 진상 부리진 않았죠? 막 운다거나.”

“울었던 거 같기도 하고.”

“제가 울었어요?”

“나한테 따진 것 같기도 하고.”

준호가 능청스럽게 시은을 놀렸다.


“따졌다고요? 어떻게요?”

“왜 안 오냐고.”

시은은 자신의 흑역사를 상대만 알고 자신만 기억 못 하는 이 상황이 너무 불안했다.


“좀 자세히 말해봐요. 그렇게 웃지만 말고.”

떼를 쓰듯 말하는 시은이 귀여워 준호가 계속 웃었다.


“보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오늘 커피숍에 왜 안 왔냐고. 보고 싶었다고.”

시은은 갑자기 부끄러워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눈만 빼꼼 내놓고 있었다.


“그러고는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아흑, 부끄러워!’

시은이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전화 받고 밤새 잠을 못 잤습니다. 가슴이 뛰어서.”

시은이 상기된 얼굴로 준호를 보았다.

가슴이 뛰었다는 말에 시은이 눈을 빼꼼 내고 쳐다보았다.


“관장님은 평소에 저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데요?”

시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비타민 같은 사람.”

“비타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요.”

시은이 입꼬리를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시은 씨 가까이에 항상 있고 싶다, 곁을 허락해 주면 항상 가까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준호가 진지한 얼굴로 시은을 바라보았다.

시은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그녀에게 아직 고백하지 못했다.


“시은 씨.”

시은이 준호를 바라보았다.


“좋아합니다.”

시은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며 눈이 반짝였다.


“먼저 고백해 줘서 고마워요. 시은 씨가 고백해 주지 않았다면 시은 씨를 바라만 보다가 놓쳤을 겁니다.”

시은은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꿈을 꾸는 듯 현실적이지 않았다.


“내 여자친구가 되어 줘서 고마워요.”

어젯밤만 해도 실연에 아픈 마음을 노래로 불렀었는데.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가게는 곧 다시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준호는 시은이 다른 기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알아보는 중이었다.


“나 때문에 가게도 그만뒀는데, 내가 잘할게요. 시은 씨.”

“저도요. 저도 잘할게요.”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설레는 마음을 나누었다.


 

*

임신 30주가 넘어가니 은조는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건강한 분만을 위해서는 운동도 필수라고 해서 1시간씩 산책도 하고 수영도 했다.

막달에 휴직계를 낼 때까지는 직장은 계속 다닐 예정이었다.

은조가 근무 중에 걸어가는데 갑자기 다리를 타고 뭔가 뜨끈한 것이 흘러내렸다.

놀란 은조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헉, 뭐지?’

아기가 커지면서 방광이 눌려 가끔 소변이 조금씩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괜찮다고 했다.

다만, 그 양이 많을 때는 소변인지 양수가 새는 것인지 잘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

평소 소변이 조금씩 샐 때도 이렇게 다리를 타고 흘러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은조는 화장실로 가서 확인했다.

속옷이 생각보다 많이 젖어 있었다.

젖은 속옷만으로는 소변인지 양수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병원에 가야 할까? 어떡하지?’

가끔 소변이 샜기 때문에 은조는 소변이 많이 샜겠거니 생각했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속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은조가 그 얘기를 아이 둘 낳은 동료 직원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직원이 놀라며 말했다.


“그러다 큰일 나. 빨리 병원 가서 확인해.”

“양수는 아닌 것 같은데요. 양수면 엄청 많이 나오지 않을까요? 배도 안 아픈데요.”

“그래도 모르는 거야. 병원에 가 봐.”

은조는 찝찝하게 긴가민가하고 있을 바엔 병원 가서 확인해 보자고 생각했다.

외출증을 끊고 병원에 가서 검사했다.


“양수 맞는데요. 양수가 샜어요.”

“네?”

양수가 샜다는 말에 은조는 날벼락을 맞은 얼굴을 했다.

아직 양수가 나오면 안 되는 시기였다.

보던 책에는 양수가 터지거나 새면 아기를 조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은조는 겁이 덜컥 났다.


“바로 입원해서 항생제 주사 맞으셔야 해요.”

“이, 입원이요?”

입원해야 한다는 말에 은조가 불안해하자 의사가 말했다.


“지금 계속 나오는 건 아니죠?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양수가 조금 새는 경우는 많으니까요.”

“괜찮은 건가요? 선생님?”

“양막에 작은 구멍이 나서 샜을 겁니다. 이건 자연적으로 아물어요.”

크게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얘기에 은조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감염 우려가 있어서 항생제 주사를 맞아야 해요. 아기 폐 성숙 주사도 맞아야 하고요. 하루 이틀 안정 취해야 해서 입원하시는 게 좋아요.”

항생제를 맞고 입원해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외출증 끊고 나왔는데 갑자기 입원하라고 해서 은조는 직장에 전화해 사정을 설명했다.

산모용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며 민후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응. 은조야. 나 회의 들어가는 길이야. 길게 통화는 못 해.]

길게 통화 못 한다는 말에 은조가 간단히 용건만 말했다.


“민후 씨, 나 지금 입원해요. 양수가 샜어요.”

[뭐? 양수가 샜다고?]

다정했던 민후의 목소리가 갑자기 돌변했다.

*

민후가 회의실로 걸어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은조의 이름을 본 민후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응. 은조야. 나 회의 들어가는 길이야. 길게 통화는 못 해.”

아내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고 싶었지만, 곧 회의가 시작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민후 씨, 나 지금 입원해요. 양수가 샜어요]

성큼성큼 걷던 민후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뭐? 양수가 샜다고?”

민후의 억양이 높아졌다.

뒤따르던 비서실장도 놀란 얼굴을 했다.

회의실에 다다른 민후가 홱 등을 돌렸다.


“어디야? 지금.”

민후는 회의는 안중에도 없어졌다.

어렴풋이 아는 지식으로 양수가 새는 건 위급한 상황이었다.

임신한 아내가 위급한데 회의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니던 산부인과요.”

“지금 갈게.”

[아니, 괜찮아요. 심각한 건 아니…….]

양수가 샜다는 말에 민후는 전후 사정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오직 아내에게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민후는 오던 길을 돌아 반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 실장. 미안한데, 회의는 연기합시다. 들어가서 잘 얘기 좀 해 줘요.”

외부 업체와의 중요한 회의라 부득이한 사정으로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민후가 직접 사과하고 양해를 구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민후는 현재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조바심이 나 미칠 것 같았다.


“김 기사, 어디 있어요? 빨리! 급해!”

외출 예정이 없었던지라 기사가 바로 대기하고 있지 않아 차를 찾는데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기사가 헐레벌떡 뛰어와 차에 탔다.


“빨리 산부인과로 가요.”

날카로운 타이어 마찰 소리를 내며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좀 빨리 가 주세요.”

차는 속도를 내어 달렸다.

달리는 차 안에서도 민후는 초조한 듯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했다.


‘양수가 샜다고? 양수가 터졌다는 건가?’

일분일초가 급했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는 민후의 얼굴 위로 두려움과 불안함이 스쳤다.

아내에게 무서운 일이 일어날까 봐 겁이 났다.

민후는 업무적인 일로는 이렇게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사업을 진행하며 위기도 몇 번을 맞이했지만 언제나 냉정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직시했다.

하지만 은조에 관한 일에서는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제발, 무사하게 해 주세요.’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간절하게 바랐다.

병원 앞에 차가 도착하고 병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데스크에서 은조가 입원한 병실을 다급하게 물었다.

초조한 민후의 표정은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찾는 듯했다.

입원한 병실 번호를 알려주자 황급히 뛰어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길이 다급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 힘들다고 생각한 민후가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난간을 잡고 계단 두 개, 세 개씩 성큼성큼 뛰어 7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숨일 턱까지 차오른 민후가 병실 문을 벌컥 열었다.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운 은조가 보였다.

그녀의 팔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은조야!”

민후가 누워 있는 은조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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