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솔로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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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솔로탈출
2022.06.07.
“내가 얼마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 줄 알아요?”
“……네?”
시은은 준호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만 보았다.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되는 겁니까?”
시은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며 생각했다.
‘계약 종료하면서 무슨 일이 생겼나?’
관장이 찾아와 연락이 안 된다며 속이 타들어 갔다고 하는 건 공적인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관장님. 무슨 일 있어요? 계약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예요?”
“네?”
시은의 반응에 준호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아침부터 여기 오신…… 이유가? 우리 집은 또 어떻게 알고…….”
시은은 준호가 어젯밤부터 자신의 집 앞에서 꼴딱 밤을 새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계약서에 있는 주소지 보고 찾아왔습니다.”
일부러 찾아왔다는 말에 시은은 의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개인 정보 마음대로 열람해서 미안합니다.”
“…….”
시은은 굳은 채로 준호를 응시했다.
개인 정보를 열람하면서까지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무슨…… 일로…….”
준호가 짧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래도 아무 일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
시은의 얼굴엔 물음표만 떴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많이 놀라셨을 텐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습니까?”
“무슨 얘기요?”
시은은 의아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호를 응시했다.
“저한테 많이 서운하셨죠? 미안합니다.”
준호가 시은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갑을 관계가 아닌 상태에서 시은 씨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시은 씨? 마음을 전해?’
준호가 사용하는 단어들에 시은의 눈동자가 동요하듯 떨렸다.
그가 찾아온 이유가 공적인 이유는 아닐 것 같았다.
그제야 시은의 눈에 복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다발이 보였다.
시은이 꽃다발과 준호를 번갈아 보았다.
시은의 시선에 준호가 뒤돌아보았다.
“아, 미안합니다. 기다리다가 하도 안 와서.”
준호는 시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걱정하는 마음에 꽃다발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준호가 바닥에 있던 꽃다발을 들었다.
싱싱했던 꽃은 밤새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바닥에 있던 꽃을 그녀에게 다시 주기가 싫었다.
“이건 버려야겠습니다. 다음에 새것으로 사다 드리죠.”
시은은 지금 상황들에 복잡한 감정들이 얽혔다.
‘설마…… 이건.’
그가 집 앞까지 찾아온 것부터 꽃다발, 그의 말들을 종합해봤을 때 이건…….
‘고백 각인데?’
자신이 했던 취중 고백에 관한 대답을 이제야 하려는 것 같았다.
시은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주세요!”
꽃을 버리겠다는 준호에게 불쑥 말했다.
“그거. 저 주시려는 거 아니에요?”
시은이 상기된 얼굴로 준호를 보았다.
“그렇긴 한데. 좀 시들었습니다.”
“괜찮아요. 줄기 조금 잘라서 물에 담가두면 다시 살아나요.”
시은이 머뭇거리는 준호에게서 꽃다발을 가져갔다.
준호는 이렇게 멋없게 꽃다발을 주려고 했던 건 아닌데, 생각했다.
“어제 샀을 때는 싱싱했는데 밤새 뒀더니.”
준호의 말에 시은이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어제요? 어제부터 여기 계셨던 거예요?”
“네.”
준호의 대답에 시은이 입을 크게 벌렸다.
“밤새우셨다고요? 여기서?”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요? 어제 언제 오셨는데요?”
“8시쯤?”
시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시은이 집 앞 노래방에 갔던 시각이 9시였다. 거기서 나와서는 곧바로 강원도 바닷가로 갔다.
그 시간 동안 준호가 집 앞에서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후회가 밀려왔다.
“전화라도 하시지!”
“기다리다가 해 봤는데 꺼져 있었습니다. 시은 씨는 어디에 있다가 온 겁니까?”
“바다요.”
“바다?”
“밤새 여기 있었다고요?”
시은이 집 앞 복도에서 밤을 새웠다는 준호의 팔과 어깨를 만져보았다.
차가웠다.
아직 가을 초입이기는 해도 새벽은 쌀쌀했다.
시은은 이렇게 오피스텔 복도에 그를 계속 세워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관장님. 일단 들어가요.”
시은은 자신의 집으로 준호를 데리고 들어갔다.
집까지 들이는 건 좀 오버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직장이 아닌 장소에서 만난 것도 처음인데 곧바로 집에 같이 들어가자고 하는 거 좀 그런가?’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으니 이런 자신을 헤픈 여자라 오해할까 걱정되었다.
“저기, 혹시 오해하실까 봐 그러는데요.”
시은이 현관에 들어선 준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원래 집에 남자 막 들이고 그러는 여자 아니거든요.”
“네?”
“저 기다리다가 밤새웠다고 하니까 들어오시라 한 거예요. 따뜻한 차라도 대접해야 하는 게 도리 아닌가 해서.”
준호가 구두를 벗으며 물었다.
“그런데 바다엔 왜 간 겁니까?”
그런 줄도 모르고 밤새워 기다린 것이 좀 억울했다.
“관장님 덕분에 졸지에 백수 됐잖아요. 신세가 처량해서 새마음을 다지려고 다녀왔죠.”
시은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준호가 미안한 얼굴로 시은을 보았다.
“그거, 오늘 해명하겠습니다.”
“네. 해명해 주세요. 사실 아직 관장님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거든요.”
준호가 서서 아담한 내부를 둘러보았다.
시은의 오피스텔은 혼자 살기 적당한 크기의 집이었다.
“너무 넓어서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모르겠죠? 저도 가끔 집에서 길도 잃어버려요.”
역설적인 시은의 농담에 준호가 픽 웃었다.
준호는 이런 유쾌한 성격의 시은이 마음에 들었다.
시종일관 진지한 자신에게는 없는 부분이라 더 매력적이었다.
시은이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잡동사니를 치우고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준호가 소파 쪽으로 가려는데 창가에 세워둔 빨래건조대가 눈에 들어왔다.
빨래건조대에는 갖가지 여자 속옷들이 널려 있었다.
준호의 시선이 그곳에 닿은 것을 눈치챈 시은이 달려들었다.
“아, 잠깐만요!”
시은이 당황하며 빨래건조대를 걷으려고 했다.
빨래가 널려 있는 채로 건조대를 허겁지겁 접었다.
허둥대는 바람에 건조대가 옆으로 쓰러졌다.
“어어.”
준호가 쓰러지는 건조대를 낚아채듯 잡았다.
건조대는 무사히 잡았으나 널려 있던 속옷들이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
“어머!”
시은이 빛의 속도로 낚아채듯 속옷들을 주웠다.
보라색, 핑크색, 검은색 각종 레이스 속옷들을 주워 허리춤에 감추었다.
그런데 준호의 손에도 속옷 하나가 들려 있었다.
준호가 그것을 시은에게 주었다.
“여기.”
검은색 레이스가 달린 속옷이었다.
준호의 손에 있던 것을 확 낚아채 뒤돌아선 시은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
.
.
시은은 따뜻하게 끓인 차를 준호에게 주었다.
“빈속이라 커피보다는 홍차가 나을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준호가 뜨거운 차를 들고 마셨다.
밖에서 밤을 새웠더니 뜨거운 차 한 모금이 들어가자 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시은은 준호가 준 꽃다발의 꽃을 정리했다.
줄기를 사선으로 잘라 물에 담가두니 다시 싱싱하게 살아났다.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들이쉬자 싱그러운 꽃향기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예쁜 화병에 담아 준호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 봐요. 다시 싱싱해졌죠?”
준호가 눈을 마주치고 옅게 미소를 보였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자 시은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 바다에 떠오른 태양을 보며 이제 다 잊어 주겠노라, 다 내려놓고 새마음으로 새 출발 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준호가 자신에게 주려고 꽃을 사 온 이유를 상기하자 시은은 가슴이 두근댔다.
꽃을 사 와 집 앞에서 밤새 기다린 것과 자신에게 계약종료를 알린 것은 상당히 괴리감이 있었다.
선뜻 이해하기가 힘든 그의 행동들이 궁금했다.
“아까 해명하신다고 하신 거. 해 주세요.”
준호가 시선을 내려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날 밤에 전화를 받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시은은 기억나지 않는 취중 고백한 날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내가 시은 씨한테 얘기를 잘 못 한 것 같아요. 순서가 그게 아니었는데.”
준호가 뒷목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시은 씨의 남자친구가 되는 게 시은 씨한테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시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점이요?”
“사내연애는 사람들에게 금방 들키기 십상이고 그러면 안 좋은 소문이 나돌 거로 생각했어요. 재계약 시기가 돌아올 거고 시은 씨가 특혜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질 게 분명합니다.”
“…….”
“친구인 한 실장님 특혜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는데 거기에 저와 관련이 있다고 하면 더 소문이 나빠질 것 같았어요. 저 때문에 시은 씨가 상처를 받게 할 수는 없었어요.”
준호는 시은의 남자가 되기 위해 먼저 그것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의도를 먼저 시은 씨한테 설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시은 씨가 오해한 것 같더군요.”
“저 안 좋은 소문 날까 봐…… 그래서 나가라고 한 거예요?”
“네. 이유를 설명해 드리고 싶었는데 시은 씨가 먼저 일어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어요.”
“그럼 저랑…… 사귈 마음이…… 있으셨던 거네요?”
준호가 시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직 자신에게만 향한 준호의 눈빛에 시은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시은 씨가 허락하신다면 시은 씨 남자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시은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참고 있으려니 콧구멍이 커졌다.
흥분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절제가 되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날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꾹 눌러 참았다.
“당연히 허락하고 말고요.”
시은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었다.
준호도 따라서 싱긋 웃었다.
“…….”
“…….”
서로 바라보며 웃을 뿐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어색한 공기에 휩싸였다.
드라마에 보면 이런 장면에 포옹한다든지 그러던데…….
그렇다고 손도 한 번 안 잡아 본 사람들이 포옹할 수는 없고.
시은은 어색한 분위기에 맞잡은 자신의 손만 꼼지락댔다.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은 준호도 마찬가지였다.
준호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저는 그럼 출근해야 해서.”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이 되었으니 그는 출근해야 했다.
“아…… 그, 그렇죠.”
준호가 일어나자 시은도 따라 일어났다.
아침 식사라도 해 줘야 했었나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침을 못 먹어서 어쩌죠? 제가 토스트라도 빨리 해드릴까요?”
이제 그의 여자친구가 되었는데 아침을 챙겨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현관으로 걸어가던 준호가 시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의 미소에 시은은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설렜다.
“괜찮습니다. 아침 원래 잘 안 먹습니다.”
구두를 신고 현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준호가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같이 저녁 먹을까요?”
시은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건 첫 데이트?
시은이 턱을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이따가 전화하겠습니다.”
준호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시은이 주먹을 쥐고 기쁨의 세러머니를 했다.
“예스!”
결승 골을 넣은 축구선수처럼 주먹을 허공에 날렸다.
“드디어 솔로탈출이다아!!”
시은이 환호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워호! 나도 이제 애인 있다! 이것들아!”
현관에 붙은 거울을 보며 기쁨의 댄스를 추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날뛰던 시은이 그대로 멈칫했다.
방금 준호 씨가 나갔는데? 설마 아직 안 가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누구세요?”
“시은 씨. 핸드폰을 두고 나왔습니다.”
준호의 목소리였다.
시은의 인상이 구겨졌다.
준호의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 충전하느라 충전기에 꽂아두었던 것을 상기했다.
“잠깐만요.”
후다닥 뛰어가 준호의 핸드폰을 가져와 문을 열었다.
“여기.”
열린 문 사이로 핸드폰을 건넸다.
준호가 받으면서 시은과 눈을 마주치고 씩 웃었다.
문이 닫히고 시은이 입술을 짓이겼다.
다 들었나 봐. 아, 창피해.
시은이 울상이 된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