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권선징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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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권선징악
2022.05.31.
은조는 민후와 함께 윤 회장을 면회하러 갔다.
면회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죄수복을 입은 윤 회장이 교도관과 함께 들어왔다.
은조를 보자 윤 회장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동안 주로 회사 임원들이 회사 일로 면회를 왔기에 오늘도 회사 임원인 줄 알고 들어온 것이다.
은조를 보자 윤 회장의 눈이 크게 동요하듯 흔들렸다.
자신이 해치려 했던 사람을 마주하자 천하의 윤 회장도 당황했다.
은조와 눈이 마주친 윤 회장은 바로 시선을 외면했다.
처음이었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은조를 제압해왔던 윤 회장이었다.
윤 회장은 은조를 맞닥뜨리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부담감을 느꼈다.
투명한 가림판을 사이에 두고 은조와 윤 회장이 마주 앉았다.
민후는 은조의 옆에 앉았다.
윤 회장이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아래 어딘가로 향한 채 물었다.
“왜 왔어? 구치소에 갇힌 꼴이 어떤가 구경하러 왔니?”
말투는 여전히 뾰족했으나 힘은 많이 빠져 있었다.
은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할머니를 보았다.
무서웠던 할머니였지만 핏줄이라는 생각에 가족으로 여기며 살았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준 사람이었고 아빠 쪽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가족이라 여겼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죽음의 위험까지 처했었다.
은조는 대체 ‘왜?’라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왜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 그러면 할머니가 얻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왜 그랬어요?”
은조가 물었다.
윤 회장이 천천히 시선을 들고 은조를 보았다.
“이예지 씨랑 공모했다면서요. 진짜 할머니가 날…… 정말 그랬던 게 맞아요?”
정말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냐고, 직접적인 단어는 차마 사용할 수 없었다.
은조는 할머니가 자신을 조종하듯 이용했지만 그래도 핏줄에 대한 애착은 있을 거로 믿었다.
그러니 중학생 시절 은조를 찾아와 혈육이라며 저택으로 데려가지 않았겠나 생각했다.
“정말 할머니가 시킨 거 맞아요?”
윤 회장은 다시 시선을 돌리고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할머니가 아니라고, 절대 살인 교사한 적이 없다고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라도 자신이 그러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고 은조가 말했다.
“제가 핏줄이잖아요! 그런데 왜!”
부릅뜬 은조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제가 핏줄이라고 절 데려가셨잖아요! 이럴 거면 왜 데려갔어요? 왜!”
은조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은조의 눈빛에 이제 예전처럼 할머니를 무서워하는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원망하는 감정만이 가득했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왜 저를 그렇게 미워했어요?”
윤 회장은 예전 무당이 했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은조를 내치려고 했었다.
손녀가 은조에게 행복을 빼앗긴다고 생각해 꿈에서 그렇게 운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그게 틀렸다고 했다.
다른 무당은 유정이가 동생이 불쌍하다고, 그만 괴롭히라고 그렇게 울었던 거라고 했다.
유정은 동생을 미워하는 게 아니었다.
동생을 괴롭히는 할머니가 미웠던 거였다.
윤 회장은 혼란스러웠다.
과연 자신이 대체 그동안 무엇을 그렇게 맹신하며 살아왔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절 그렇게 미워하실 거면서 왜 데려가신 거예요?”
윤 회장의 얼굴이 무너져내리듯 점점 일그러졌다.
“엄마랑 둘이 잘살고 있었는데 왜…….”
원망으로 은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윤 회장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크흐흐.”
지금 와 생각하니 모든 것이 헛된 짓이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밀려왔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흐흑.”
윤 회장이 머리를 숙이고 흐느껴 우는 모습에 은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살면서 이런 할머니의 모습을 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눈빛만으로 은조를 위협했던 그 할머니가 맞나, 의심될 정도였다.
할머니가 울고 있었다.
턱을 덜덜 떨면서.
은조는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아 옆에 앉은 민후를 돌아보았다.
민후는 경계를 풀지 않은 표정으로 윤 회장을 응시했다.
이런 행동도 감형을 받기 위한 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윤 회장은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지만 은조의 질문에 답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데려왔으면서 손녀의 행복을 뺏어갔다고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신이 판 무덤이면서 누구를 원망한다는 말인가.
윤 회장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날 원망해라. 용서해 달라고 말할 수도 없구나.”
은조와 민후는 180도 달라진 윤 회장의 모습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면회시간 종료되었습니다.”
구치소 직원이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했다.
교도관이 다가와 윤 회장을 데리고 나갔다.
은조는 윤 회장이 나가고 없는 빈 의자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자책하며 우는 할머니의 모습에 가족에게 배신당한 비참함은 조금은 덜어졌다.
*
예지의 재판이 있는 날이다.
민후도 재판을 보기 위해 법원으로 갔다.
재벌 며느리의 만행이 세상에 드러나자 언론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일부 언론은 경영권 다툼이 원인인 ‘형제의 난’이라 일컬으며 자극적인 기사를 썼다.
지난번 예지의 갑질 사건까지 재조명되며 연일 뉴스에 보도되었다.
예지가 죄수복을 입고 호송차에서 내리자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시동생을 죽이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영권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예지는 기자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민후는 예지가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재판이 진행되고 선고가 이어졌다.
“피고 이예지에게 살인미수죄로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
치밀하게 계획한 범행이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높은 형량이 내려졌다.
판결이 선고되자 예지는 울음을 터트렸다.
방청석에서 지켜보던 예지의 친정 식구들도 울음바다가 되었다.
경찰이 예지를 일으켜 재판장을 나가려고 했다.
걸음을 옮기던 예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려 한쪽을 쳐다보았다.
방청석 맨 뒷자리에 있던 민후와 눈이 마주쳤다.
민후와 눈이 마주친 예지가 입술을 짓이겼다.
완벽하게 진 게임에서 상대 승자의 오만한 눈빛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
은조는 1층 커피숍 입구에 붙은 안내 문구를 씁쓸하게 쳐다보았다.
<오늘 커피 1잔 무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사장이 쏩니다!>
마지막 영업일에 무료로 커피를 제공한다고 하니 관람자뿐 아니라 직원들도 줄을 섰다.
밀려드는 공짜 손님에 시은은 눈코 뜰 새 없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땅 파서 장사하나. 뭘 저렇게 공짜로 퍼주고 있어?”
은조는 적자일 것이 뻔한 시은의 매출을 걱정하며 투덜댔다.
“차 마시며 얘기나 나눌까 하고 왔더니 바쁘네.”
알바생까지 있는데도 손이 모자라 보여 은조는 빈 음료 잔을 치우는 일까지 도왔다.
시은이 일을 돕는 은조를 말렸다.
“은조야, 하지 마. 임신부 일 시킨다고 나 욕먹는다.”
배가 제법 불룩하게 나와 말렸더니 은조는 이 정도는 괜찮다며 쓰레기 치우는 것도 도왔다.
“이 장면을 네 남편이 봤다면 나 네 남편한테 찍힌다고. 일하지 마.”
“오늘 마지막 날이라 수다 떨러 왔는데 바빠서 안 되겠네.”
“미안. 오늘은 바빠. 무료 커피 끝나고 후임으로 오시는 분한테 인수인계도 해야 하거든.”
“집기들은 뒤에 오시는 분한테 다 넘기기로 했어?”
“응. 통으로 넘겨받으신다고 해서 그렇게 했어. 알바생까지 그대로 일하기로 해서 나만 빠져나오면 돼.”
다음 인수자가 집기들도 통으로 매입해서 정리할 것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럼 가게 정리하고 나중에 밖에서 따로 만나자.”
“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나 백수니까 네가 밥 사라.”
“알았어.”
은조가 바쁘게 일하는 시은을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쳐다보았다.
시은이 물었다.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은조는 관장이 왜 시은에게 일방적인 계약종료를 알렸는지 알고 있다.
시은의 고백에 곧 대답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관장이 자신이 직접 얘기하고 싶다고 해 은조는 시은에게 먼저 언질을 주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시은이 관장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어 안타까웠다.
“전화위복이란 말 있잖아. 곧 좋은 일 생길 거야.”
“그래. 고마워.”
시은은 친구의 흔한 위로의 말이라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인수인계를 끝내고 시은은 집으로 향했다.
바쁜 하루였던지라 무척 피곤했다.
그래도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은 없었다.
운전하면서 시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부터 뭐 하지?”
한숨 섞인 혼잣말을 계속했다.
“실연과 실업의 콜라보를 뭐로 달래나?”
그렇게 말을 내뱉고 나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했다.
이런 굴욕적인 실연은 없을 것이다.
그냥 ‘싫다.’도 아니고 해고 비슷하게 당했으니.
가슴이 체한 듯 갑갑했다.
자꾸만 긴 한숨만 나왔다.
집 앞에 다다라 차 앞 유리 너머로 불 꺼진 오피스텔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불 꺼진 빈집에 혼자 들어가기가 싫었다.
몸은 몹시 피곤한데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집에 들어갈 때 쓸쓸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들어가면 울음이 바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어두운 곳에서 혼자 웅크리고 울기 싫었다.
시은은 오피스텔 근처 상가 건물에 반짝거리는 간판을 주시했다.
‘노래방’이라는 글자에 차례로 하나씩 불이 들어와 깜빡였다.
차에서 내린 시은은 노래방으로 갔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술 취한 이들의 고성이 들렸다.
저렇게 소리라도 질러대면 이 답답한 속이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1시간 넣어 주세요.”
노래방에 혼자 온 것도 처음이었다.
책자를 뒤적이며 이별 관련 노래들을 예약했다.
‘나만 안 되는 연애’, ‘오늘 헤어졌어요.’
제목부터 가슴에 콕 박히는 노래들이 많았다.
반주가 시작되고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화면에 지나가는 가사들이 어떻게 이렇게 제 마음과 같을까?
감정을 200% 담아 이별 노래를 불러댔다.
“오늘 헤어졌어요♫ 나는 안 되나 봐요♬”
사실 따지고 보면 시작조차 안 한 짝사랑이라 이별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별 노랫말이 왜 이렇게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을까?
시은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감정을 한껏 담아 열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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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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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준호는 시은의 오피스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갑을 관계를 벗어난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계약종료 얘기를 한 후 시은이 오해한 것 같아 어떻게 제 마음을 전달할까 고민했다.
아무래도 얘기를 잘못한 것 같아 답답했다.
전화를 하려고 몇 번을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고백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첫마디를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도 막막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꽃다발이었다.
꽃다발을 들고 있으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절반은 전달될 거로 생각했다.
먼저 퇴근한 준호는 오다가 꽃집에 들렀다.
꽃집 사장님이 어떤 용도의 꽃다발이냐고 물었다.
준호는 머뭇거리다가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고백하려고요.”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것도 낯설고 어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