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확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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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확 밀어?
2022.04.30.
검찰청.
압수한 윤 회장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온 것을 검사가 보았다.
[회장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저 제주도에 내려왔어요. 두 사람 지금 리조트에 있고요. 내일 요트를 탄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요트 타면 아무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로 갈 텐데 뭔가 좀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바다엔 CCTV도 없잖아요. 연락 부탁드려요.]
예사롭지 않은 내용에 검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바다엔 CCTV도 없잖아요?”
검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
검사가 수사관에게 지시했다.
“메시지 보낸 발신자 번호, 조회 한번 해보세요.”
검사가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했다.
“두 사람이 리조트에 갔다. 내일 요트를 탄다? 이 두 사람이 누굴까?”
메시지에서 말한 두 사람이 위험에 빠질 거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검사가 수사관에게 말했다.
“제주도 해경에 연락해서 출항하는 요트 소유주와 승선자 명단 확보해 주세요. 그리고 만일을 위해 순찰 강화하라고 해주시고요.”
검사가 윤 회장의 핸드폰에 있는 데이터를 살피며 말했다.
“윤 회장은 얽혀 있는 사건이 뭐가 이리도 많아?”
윤 회장의 핸드폰에는 수십 개의 통화 녹음 파일이 있었다.
아마도 자동 녹음 기능이 설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검사는 그 중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번호와 통화한 파일을 재생해 들었다.
통화내용을 듣던 검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검사가 윤 회장 사건 담당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 형사님. 제주도에 한번 내려 갔다 오시죠.”
[제주도요?]
“윤혜란 회장이 제주도로 갈 것 같은데요. 도주 위험도 있으니까 일단 신병확보 차원에서요. 증거도 충분하니까 최대한 빨리 영장 발부하도록 하겠습니다.”
*
“아주 팔자가 늘어지셨네.”
시은은 커피숍에서 핸드폰을 보며 구시렁댔다.
“누군 종일 커피 타는데 누군 한가롭게 튜브나 타고 있고.”
연차를 내고 제주도로 여행 간 은조의 SNS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은조가 제주도 수영장에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선베드에 한가롭게 누워 있는 사진이나 수영장에서 튜브 타고 찍은 모습을 보니 부러웠다.
휴가를 간 것도 부러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여행을 간 것이 더 부러웠다.
“좋겠다.”
시은은 테이블에 엎드려 턱을 손등에 올리고 창밖을 보았다.
이제 곧 가을이 오려는지 나뭇잎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곧 낙엽이 떨어지겠지? 그러면 또 옆구리는 시릴 거고.”
혼자서 중얼거리는데 시은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관장 준호였다.
시은은 인기척을 느끼고 벌떡 상체를 들었다.
“어서 오세…….”
시은은 인사말을 끝맺지 못했다.
준호가 커피숍에 얼마 만에 등장한 것인가.
시은의 눈동자가 몹시 흔들렸다.
준호와 눈을 마주치고는 시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날 취중에 전화한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아 궁금해 미칠 것 같았고 한편 서운하기도 했고 또 미치게 보고 싶기도 했다.
한동안 그를 향한 격렬했던 감정들로 힘든 나날들을 보냈었다.
이제 겨우 잠잠해졌는데 다시 그가 나타나 속을 휘저었다.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님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누가 보았으면 이상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손님이 왔는데 주문도 받지 않고 눈싸움하듯이 서로만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먼저 입을 연 건 준호였다.
“잘 지냈습니까? 오랜만입니다.”
“…….”
시은은 원망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2주가 다 되도록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나타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안부를 묻는 그가 야속했다.
‘잘 지냈냐고요? 어떻게 잘 지내겠어요? 갑자기 안 오셔서 속이 타 죽는 줄 알았는데!’
이런 말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연인도 아니고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
관장에게는 그냥 자신은 커피숍의 사장일뿐이다.
오랜만에 카페에 오면 흔히 건네는 인사말일 뿐이다.
시은은 황급히 시선을 내리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네. 주, 주문하시겠어요? 그…… 늘 드시던 거. 그, 그거로 드려요?”
목소리에 긴장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아, 바보 같아. 목소리 왜 떠는데!’
시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로 입술을 짓이겼다.
“커피 말고…… 잠깐 얘기 좀 했으면 합니다.”
시은이 놀라 시선을 들었다.
“……네?”
준호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쳤다.
시은은 그 순간 직감했다.
‘아, 그날 내가 고백했구나.’
자신을 바라보는 준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예전 커피를 주문하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
*
요트가 속도를 내어 달리자 상쾌한 바람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요트 앞머리에는 안전손잡이를 잡고 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 끝에 서면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팔을 벌리고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면 유명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되었다.
“진짜 새가 된 것 같아요.”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는 은조의 모습에 민후는 뿌듯했다.
은조가 배에 새겨진 배 이름을 보고는 물었다.
“배 이름이 포, 글로리아 호네요? 무슨 뜻이에요?”
“글로리아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어 이름이야.”
하얀 동체에 새겨진 선명을 보는 민후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선물하신 요트거든.”
“……아.”
은조는 강 회장이 보기보다 로맨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이 요트를 딱 한 번 타셨어. 그때가 내가 중학생 때였고. 내가 낚시해서 큰 물고기 잡은 사진 있지? 그게 그때야.”
은조는 민후의 서재에 있던 어릴 때 사진을 떠올렸다.
“사실, 나 그때 이후로 처음 타.”
민후의 말에 은조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안 탔다고요?”
“응.”
기현은 요트를 꽤 이용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민후는 요트를 타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아서 타지 않았다.
타면 어머니와 즐거웠던 그때가 매우 그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 마음이 바뀌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타서 그때처럼 즐거운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어머니 생각도 덜 날 것 같았다.
은조는 어머니 얘기에 표정이 촉촉해진 민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민후가 괜찮다는 듯 옅게 웃었다.
어느 정도 바다 가운데로 나오니 몇몇 요트와 낚시 배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배를 멈추고 있는 건 부근이 낚시 포인트라는 얘기였다.
민후가 선실로 들어가 최 씨에게 말했다.
“아저씨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여기쯤 배를 멈춰주세요.”
최 씨가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조금 더 가면 낚시 포인트가 있습니다.”
최 씨는 좀 더 멀리 나가려고 했다.
“여기 다른 배들도 많이 있잖아요. 여기도 포인트인가 본데요?”
민후가 말하자 최 씨가 난감한 표정을 했다.
예지가 주변에 다른 배가 없는 한가한 곳으로 가달라고 미리 부탁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가면 아주 좋은 포인트가 있다니까요.”
최 씨가 고집을 부리며 다른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배를 멈추지 않았다.
민후가 최 씨를 쳐다보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조금 의아했다.
“그냥 여기서 멈추세요. 여기서 낚시할 겁니다.”
민후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최 씨가 약간 움찔했다.
최 씨는 할 수 없이 배를 멈추었다.
민후는 선상 낚시를 위해 준비한 낚싯대를 꺼냈다.
“여기를 잡고 이걸 돌리면 줄을 풀고 감을 수 있어.”
민후가 은조에게 낚싯대 잡는 법과 릴 감는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
마스크와 가발을 쓰고 변장한 예지는 배가 멈춘 것을 보고는 선실로 향했다.
음료수를 들고 서빙하는 척하며 예지가 조종석에 있는 최 씨에게 다가갔다.
예지가 최 씨에게 음료수를 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여긴 안 돼요. 더 멀리 나가라니까요. 주변에 다른 배들이 있잖아요.”
“전무님이 멈추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예지가 짜증 난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이러면 계획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잖아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저는 전무님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점잖으신 분이 화를 내시는 것 같아서.”
예지를 쳐다보는 최 씨는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아저씨. 저한테 협조하시기로 했잖아요! 무조건 더 한산한 바다로 나가세요.”
극도로 불안한 얼굴의 최 씨는 긴장해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예지가 최 씨 귓가에 가까이 대고 작게 말했다.
“서울에 있는 취준생 아들, 취업 안 시킬 거예요? 5년째 취업 준비한다면서요?”
최 씨의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우리 한주 그룹에 취업시켜준다니까요. 아드님 스펙으로 대기업에 취업이 가당키나 해요?”
예지는 졸업 후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살아가는 최 씨의 백수 아들을 미끼로 이용했다.
“약속드리죠. 아저씨가 협조만 잘해주시면 아드님 이사 자리까지 승진 보장할 거예요.”
이런 사람들이 어떤 것에 마음이 동하는지 예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저희 남편이 회장님이 될 거니까 제 말 믿으세요.”
악마처럼 최 씨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저씨 손에 아들의 미래가 달려 있어요.”
예지가 나가고 최 씨의 눈동자가 한없이 흔들렸다.
선실 주방 쪽으로 돌아간 예지는 창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창 낚시를 하던 민후가 소리쳤다.
“잡았다!”
민후의 낚싯대가 포물선을 그리고 휘어졌다.
곧 물고기를 한 마리를 건져 올리자 은조가 환호하며 좋아했다.
하하 호호, 좋아하는 두 사람을 보는 예지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흥, 그렇게 좋아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
중얼거리던 예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르릉, 소리와 함께 배에 진동이 느껴졌다.
최 씨가 요트의 시동을 다시 걸었다.
시동 걸리는 소리가 나자 민후가 고개를 돌려 조종석 쪽을 쳐다보았다.
최 씨가 속도를 높이는 기어를 위로 쭉 올렸다.
배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잡힌 물고기를 신기하게 보고 있던 은조가 민후를 보았다.
“어? 배가 움직이는데요?”
“잠깐 여기 있어.”
민후가 이상하게 여기며 걸음을 옮겼다.
점점 속도가 높아져 안전 바를 잡고 걸어야 했다.
민후가 선실로 들어가 조종석 쪽으로 갔다.
“아저씨. 왜 갑자기 출발하는 겁니까?”
민후의 질문에 최 씨는 대답이 없었다.
굳게 다문 입매로 앞만 보고 있었다.
최 씨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비장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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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후가 조종석 쪽으로 가는 모습을 예지는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내내 떨어지지 않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떨어진 것이다.
예지는 초조한 표정으로 은조가 있는 쪽을 지켜보았다.
‘지금이 기회인데.’
은조가 혼자서 배 난간에 서 있었다.
배가 속도를 내자 난간을 잡고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지금 가서 확 밀어?’
구명조끼도 안 입은 은조는 위태로워 보였다.
‘바로 떨어질까?’
구명조끼도 안 입은 상태로 있으니 지금 밀어버리면 확실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혼자 힘으로 밀 수 있을지 조금 자신이 없었다.
예지가 민후가 들어간 선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민후가 곁에 없는 지금이 기회였다.
확 밀어버리고 얼른 몸을 숨기면 은조 혼자 부주의로 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예지가 살금살금 은조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 서 있는 은조 뒤로 조용히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