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폭풍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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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폭풍 전야
2022.04.26.
예지가 향한 곳은 강 회장 소유의 요트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요트를 관리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예지 부부도 몇 번 요트를 이용했던 적이 있어 안면이 있었다.
“최 씨 아저씨. 안녕하세요.”
요트 내부를 한창 점검 중이던 최 씨가 밖으로 나왔다.
“사모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최 씨가 반가운 얼굴로 예지를 맞았다.
“좀전에 전무님한테서도 연락이 왔었는데, 다 같이 여행 오셨나 봅니다.”
최 씨는 온 가족이 여행 온 것으로 알고 물었다.
“아니에요!”
그 말에 예지가 정색하고는 대답했다.
“저희 서방님한테는 여기서 저 봤다는 얘기 절대로 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예?”
너무 정색해서 최 씨는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아까 서방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내일 1시에 요트 타시겠다고. 선상 낚시 준비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지가 최 씨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아저씨, 조용한 데 가서 저랑 얘기 좀 하실까요?”
예지가 최 씨를 비장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
회사로 출근한 윤 회장은 사무실을 보고는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실도 검찰에서 다녀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임원들의 컴퓨터와 중요 문서들을 다 가져갔다고 했다.
임원이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다 가져갔는데 재무제표에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어떡하죠?”
기업어음 발행 건뿐 아니라 분식회계 정황도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형량은 더 무거워질 것이다.
출국 금지조치가 내려져 몸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완전히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윤 회장이 이로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나 혼자 죽지 않아. 두고 봐.”
윤 회장은 자신을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은 민후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전 비서! 핸드폰 어떻게 됐어!”
윤 회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서실을 향해 소리쳤다.
비서가 황급히 다가왔다.
“여기 핸드폰 준비되었습니다. 명의는 세탁되었으니 안심하고 쓰셔도 됩니다.”
핸드폰까지 압수당해 비서에게 새 핸드폰을 준비하라 일렀더니 대포폰까지 준비했다.
윤 회장이 비서를 한 번 쳐다보고는 핸드폰을 받았다.
민후와 은조가 제주도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압수수색을 하는 난리 통에 예지와 연락을 하지 못했다.
예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사돈, 나예요.”
[회장님!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이렇게 연락하기가 힘들어요?]
“사정이 좀 있었어요.”
[회장님도 제주도로 빨리 오세요. 함께 힘을 모아야죠.]
*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난 뒤 은조는 낮잠을 잤다.
임신 중기에 접어들자 피곤함을 빨리 느꼈다.
민후는 아내가 낮잠을 자는 동안 일을 했다.
휴가를 받았지만 민후의 메일함에는 하루에 200여 통의 메일이 쌓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씩 처리해야 나중에 급할 때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어느 정도 일을 끝냈는데도 은조가 일어나지 않았다.
잠든 아내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내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만지며 속삭이듯 말했다.
“잠꾸러기 씨. 언제까지 잘 거야? 나 배고픈데.”
은조는 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잠에서 깨지는 못했다.
민후는 출출하기도 해서 룸서비스로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얼마 후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스위트룸에 있는 대리석 식탁에 하얀 식탁보가 깔렸다.
직원이 음식을 하나씩 올려두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나갔다.
민후가 침실로 가 잠든 은조 옆에 몸을 눕히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은조야. 그만 일어나. 낮잠 많이 자면 밤에 잠 못 자.”
볼에다 입을 촉, 맞추니 은조가 꿈틀댔다.
“물론 밤에 안 자면 나랑 더 많이 놀 수 있어서 난 좋긴 하지만.”
장난스레 웃으며 민후가 은조의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했다.
“룸서비스로 음식 주문했어. 일어나서 밥 먹자.”
“으음.”
은조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
“잘 잤어?”
눈뜨자마자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이 보이니 은조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은조가 안아달라는 듯 팔을 벌렸다.
민후가 은조를 안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녀의 체취를 느꼈다.
“음, 은조 냄새 좋다.”
은조도 민후의 등을 꽉 끌어안고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졌다.
“내가 자는 동안 뭐 했어요?”
“일 잠깐 했어.”
“휴가와서 또 일이에요? 일 중독자.”
민후가 고개를 들고 은조의 두 볼을 꼬집듯이 살짝 잡았다.
“누가 일하고 싶어 일했나? 나 혼자 얼마나 심심했는데.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민후가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렸다.
“낮잠 많이 잤으니 밤에는 나랑 놀아줘야 해.”
장난스럽게 음흉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안 재울 거니까 각오해.”
“내가 잔 거 아니고 우리 리은이가 졸리다고 해서 잔 건데요? 밤에는 나도 자야죠.”
“응. 이제 그런 말 안 속아.”
민후가 은조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아!”
“일어나. 밥 먹자.”
민후가 은조를 일으켜 스위트룸의 거실 쪽으로 나갔다.
차려진 음식을 보고는 은조가 탄성을 질렀다.
“뭘 이렇게 많이 시켰어요?”
“우리 리은이 배고플까 봐 많이 시켰지.”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보니 은조도 시장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은 맛있게 식사를 시작했다.
테라스밖에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식사하니 전망 좋은 레스토랑 부럽지 않았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푸른 바다가 보이고 이쪽으로 돌리면 멋진 남편이 보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행복감에 젖은 은조가 민후를 보며 웃자 민후가 물었다.
“왜 웃어?”
“너무 행복해서요.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어요.”
민후도 따라 웃었다.
민후도 시간이 이대로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예상대로 낮잠을 많이 잔 덕에 밤늦은 시간까지 은조는 잠이 오지 않았다.
11시만 지나면 곯아떨어지던 아내가 깨어 있자 민후가 좋아했다.
그가 안 자는 아내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민후가 조심스레 은조의 몸을 안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양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은조의 모습이 예뻤다.
민후가 은조를 안으며 그녀의 목과 어깨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은조의 귓가에 대고 민후가 낮게 말했다.
“당신 요즘 날 미치게 하는 거 알아?”
은조는 더운 숨을 뱉을 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살이 올라서 임신 전보다 훨씬 매력적이야.”
은조는 배가 불러오고 여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졌을까 봐 자신감이 떨어졌는데 남편은 그런 모습이 좋다고 했다.
부끄럽다고 배를 가리면 그는 볼록하게 부른 배에 종종 입을 맞추기도 했다.
은조는 어떤 모습이든 사랑스럽다고 하는 남편이 너무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았다.
격렬한 시간이 지나고 민후는 은조와 함께 욕조에 들어가기 위해 물을 받았다.
스위트룸의 욕조가 꽤 넓어 두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았다.
거품 입욕제를 풀어놓으니 욕조에 구름처럼 하얀 거품이 가득했다.
민후가 수시로 손을 넣어 물의 온도를 체크했다.
적당하게 기분 좋은 온도로 맞추고 은조를 데리고 왔다.
욕실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가득 퍼져 있었다.
민후는 은조를 뒤에서 안은 자세로 욕조에 들어갔다.
은조는 민후에게 기대어 따뜻한 물에 들어가 있으니 순식간에 몸이 노곤해졌다.
“아, 너무 좋다.”
민후는 부드러운 스펀지에 거품을 묻혀 은조의 팔을 천천히 문질렀다.
“내일은 요트 타고 낚시해서 거기서 바로 회로 떠서 먹자.”
“네. 좋아요.”
“가끔 문어나 게가 잡히기도 하는데 라면에 넣고 끓여 먹으면 맛있어.”
“와, 문어라면 맛있겠다.”
은조가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노을 지는 것도 보게 될 거야.”
“멋있을 것 같아요.”
은조는 내일이 무척 기대됐다.
*
다음날, 민후와 은조는 요트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갔다.
선착장에는 개인 소유의 요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그중 강 회장 소유의 요트가 가장 컸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크네요. 나 요트 처음 타봐요.”
하얀 동체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였다.
요트를 관리하는 최 씨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민후가 최 씨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 안녕하세요. 전무님.”
“운행 허가는 받으셨죠?”
“……예.”
대답하는 최 씨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민후가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왜요? 운행하는 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최 씨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요트에 오르는 계단을 놓아주었다.
민후는 신경이 쓰였으나 개인적인 근심이 있나 생각하며 요트에 올랐다.
임신한 은조가 잘 올라탈 수 있도록 민후가 손을 잡아주었다.
요트는 2층으로 이루어진 럭셔리한 하나의 호텔 방 같았다.
실내는 침실과 응접실이 있었고 2층에는 소파와 함께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상쾌한 바닷바람과 함께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여기 진짜 멋져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은조가 민후를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를 낀 모습으로 그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겼다.
하얀색 반바지에 하얀색 셔츠를 입은 민후의 모습이 무척 근사했다.
꼭 잡지 화보를 보는 것 같았다.
‘멋있다.’
팔불출처럼 남편 멋있다며 바라보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쟁반에 예쁜 색의 칵테일과 과일 주스를 가지고 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요트에는 요트 조종 자격증이 있는 최 씨 외에 서빙 등을 도와주는 여자 직원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은조가 인사하자 여자 직원은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뒤돌아서 갔다.
은조는 여자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은조는 서빙하던 직원으로 예지가 변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예지는 안경과 마스크와 가발을 쓰고 직원으로 변장해 요트에 함께 타 있었다.
“그럼 운행 시작하겠습니다.”
최 씨가 요트조종석에 앉아 배를 출발시켰다.
요란한 모터 소리를 내며 배가 속도를 냈다.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날렸다.
민후는 속도를 내는 요트에서 은조의 어깨를 감싸 안아 보호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상하게 구명조끼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선박에는 구명조끼가 의무적으로 구비되어 있어야 했다.
민후가 조종석의 최 씨를 향해 소리를 높여 물었다.
“아저씨, 구명조끼가 왜 없죠?”
조종석에 있던 최 씨가 고개를 돌렸다.
“예?”
“구명조끼가 왜 없냐고요?”
모터와 바람 때문에 목소리를 더 키웠다.
“아, 구명조끼가 낡아서 교체하려고 내렸는데 새것을 싣는다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최 씨가 민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요즘 사람들이 요트 안에서 구명조끼 착용 잘 안 하시더라고요.”
“모든 선박에 구명조끼 착용이 의무이지 않습니까?”
“예, 그렇긴 하죠. 그런데 오늘 파도가 잔잔해서 별일은 없을 겁니다.”
최 씨의 대답에 민후는 찝찝한 얼굴로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무척 잔잔했다.
폭풍 전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