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지난번에 분명 경고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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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난번에 분명 경고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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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난번에 분명 경고했죠?
2022.04.12.
“유산율을 높이는 약재라고 합니다.”
“뭐라고요?”
민후가 눈가를 사납게 찌푸렸다.
“유산하게 하는 약재라는 말입니까?”
“예.”
비서가 대답하고 입매를 굳게 닫았다.
민후의 표정이 경악으로 굳었다.
“하아, 이게 대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대체 뭔가?
민후가 분노가 가득한 눈을 부릅떴다.
“일부러 유산되는 약을 지어서 줬다?”
민후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꽉 조인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후.”
화를 참느라 심호흡하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윤 회장.”
성난 주먹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말했다.
“내가 전에 경고했잖아. 가만있지 않겠다고.”
민후가 비서에게 말했다.
“장 변호사님 연락해서 오시라고 하세요. 검찰에 고발할 것이 있습니다.”
“예.”
“아, 그리고 지난번 명신제지 기업어음 발행에 관한 자료 있죠? 그것도 챙겨놓으세요.”
“예.”
비서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민후가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댔다.
지금까지는 참고 넘어갔지만, 이번만큼은 넘길 수가 없다.
일단 도우미가 그 약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만약 그 약을 아내가 먹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유산이 되었다면 자연유산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냥 넘겼을 것이다.
민후는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일부러 그런 약재를 넣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밝혀내 이번에 꼭 처벌받도록 해야 한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고의로 독성이 있는 약물을 이용해 신체에 해를 입혔으니 특수상해죄, 몰래 유산시키려고 한 존속학대죄.”
적용할 수 있는 모든 죄목은 다 끌어다 넣어야 한다.
하지만 이거로는 타격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기업어음 부정발행한 혐의도 추가해주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릴 때 사용하려고 가지고 있던 자료를 사용할 때가 왔다.
민후는 결연한 눈빛을 빛냈다.
*
관장님이 커피숍에 오지 않은 지 일주일 되어갔다.
시은은 핸드폰 통화목록에 찍힌 ‘이준호 관장님’이라는 이름을 오늘도 보았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각에 3개나 찍혀 있었다.
시은이 머리를 숙여 테이블에 제 머리를 쿵쿵 박았다.
“어휴. 붕어냐? 왜 기억을 못 해, 왜!”
시은은 풀이 죽은 얼굴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도대체 이날 내가 무슨 얘기를 한 거냐고!”
.
.
.
관장 준호는 시은의 전화를 받은 그 날 이후 1층 커피숍에 내려가지 못했다.
2층 자신의 사무실에서 나와 난간에 서면 커피숍이 보였다.
요즘은 난간에 서서 커피숍을 지켜보고는 했다.
전면이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끔 시은의 모습이 보였다.
항상 유쾌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손님을 응대할 때는 항상 밝은 얼굴이던 그녀.
그녀는 커피를 주문하고 받을 때 몇 마디 나누는 대화만으로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커피를 마시러 가는 목적보다 그것 때문에 매일 갔었던 것도 같다.
준호에게 시은은 비타민처럼 상쾌한 바람을 불어 일으키는 사람이었다.
저런 밝고 유쾌한 사람이 지인으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과를 끝내고 저 친구를 만나면 상큼한 레몬주스를 마신 것처럼 피로가 풀리고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가까운 사람으로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이 어느 날 고백을 해왔다.
‘좋아해요. 저 관장님 좋아해요. 매일 관장님이 커피 사러 오시는 그 시간만 기다려요.’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단다.
친구로라도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을 남자로 좋아하고 있었단다.
술에 많이 취한 듯했지만, 취중인 것을 빌려 제게 고백하는 게 귀여웠다.
생각지도 못했던 커다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준호는 가슴이 뛰었었다.
고백받았던 그 날 밤만 해도 어떻게 멋지게 대답해줄까 고민했었다.
그녀와 연인이 되는 과정을 상상하니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 날이 밝고 준호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난관에 봉착했다.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준호는 박물관의 관장이고 그녀는 편의시설의 운영자이다.
한 직장에서 남녀관계로 발전하는 것이 부담이 안 될 리가 없다.
게다가 각 편의시설은 6개월마다 계약을 갱신한다.
고객 불만이 접수되면 재계약에 영향이 미친다.
연인이 되어 만약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뒷말이 나올 수 있다.
관장이 뒤를 봐 준다고.
그녀의 연인이 되는 것이 그녀에게 과연 좋은 일일까, 생각이 많아졌다.
커피숍에 가면 고백에 대해 대답을 해야 하는데 고민이 많아져 갈 수가 없었다.
준호는 며칠 동안 그녀의 고백에 관해 결정을 하느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
민후는 고발장을 검찰에 접수하기 전에 윤 회장을 만나기 위해 명신 제지로 향했다.
윤 회장이 임신부에 치명적인 한약을 지어서 줬고 엉뚱한 피해자까지 생겼으니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회사에 도착한 민후는 다짜고짜 회장실로 올라갔다.
“윤혜란 회장님 좀 뵈러 왔습니다. 한주 그룹 강민후라고 전해주십시오.”
민후를 알아본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약속이 안 되어 있으신데 면담 가능한지 여쭈어보겠습니다.”
“안에 계신가요?”
물어보는 민후의 발길이 이미 출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민후를 비서가 제지했다.
“저기, 잠시만요! 그냥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다급하게 외치는 비서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민후가 문을 벌컥 열었다.
책상에 앉아 있던 윤 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코끝에 걸친 돋보기안경 너머로 민후를 보았다.
“강 전무?”
윤 회장과 눈이 마주치고는 민후가 윤 회장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무슨 일인가? 약속도 없이.”
윤 회장이 돋보기안경을 빼서 책상에 올렸다.
질문에도 민후는 곧장 윤 회장에게 직진해 갔다.
민후의 표정과 분위기로 보아 뭔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데 윤 회장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벅저벅 걸어 윤 회장 책상 앞까지 온 민후가 윤 회장을 보았다.
윤 회장은 앉아 있었기에 민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엔 분명 경고했죠?”
윤 회장을 응시하는 민후의 눈빛이 분노에 싸여 번뜩였다.
“두 번 다시 아내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윤 회장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건드리긴 내가 뭘 건드려? 만나지도 못했는데!”
민후가 탁! 둔탁한 소리를 내며 책상에 무언가를 올렸다.
한약과 검사결과지였다.
한약을 보는 윤 회장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떻게 된 거야? 한약은 다른 사람한테 줬다며?’
분명 예지에게서 한약을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이게 강 전무의 손에 들어간 걸까?
“한약 성분 검사한 결과지입니다.”
윤 회장이 검사결과지에 나열된 어려운 화학성분표를 보았다.
‘성분 검사까지 했다고?’
“임신부가 먹으면 유산율을 높이는 약재가 들어 있더군요. 거기에 중독성 강한 맹독성 물질까지!”
유산시킬 목적으로 한약을 지어 준 것을 다 들통날 위기에 처했다.
동요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윤 회장이 표정을 바꾸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유산율을 높이는 약재라니?”
시치미를 떼는 윤 회장을 보며 민후는 어이가 없었다.
“은조한테 한약 지어 주셨죠?”
“그래. 그랬어.”
“거기에 임신부한테는 절대로 써서는 안 될 한약재가 들어가 있었다 이 말입니다!”
윤 회장이 놀라는 연기를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윤 회장은 한약을 지을 때 빠져나가기 위해 한약을 두 종류로 지었다.
하나는 진짜 임신부에 좋은 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관절염이 있는 자신을 위해 지은 약이었다.
소화불량과 관절염 등에 사용하는 약재가 임신부에게 써서는 안 될 약재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의사에게 그 약재를 많이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들켜서 추궁을 당할 것을 대비해 자신의 약과 바뀌었다고 할 계획이었다.
“은조한테 준 약은 임신부에게 좋은 약이야.”
사나운 얼굴로 노려보는 민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설마 약이 바뀌었을 리는 없을 테고.”
넌지시 약이 바뀌었을 수 있다는 말을 던졌다.
“그때 내 약도 같이 지었어. 소화가 안 되고 관절염이 있어서.”
민후는 여전히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윤 회장이 가방에서 한약 봉지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한약 포장재가 똑같이 생겼다.
겉에 아무런 표시가 없어 구별이 전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약과 바뀐 건지도 몰라. 이 약이 은조 약인 셈이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민후가 말했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안 믿으면? 내가 은조한테 일부러 유산하는 약을 줬다는 말인가?”
적반하장으로 윤 회장이 소리를 쳤다.
“당신이 은조한테 했던 행동을 뒤돌아봐요. 몸보신하는 약을 지어 줄 사람인지.”
민후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아이 지우라고 병원까지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았습니까!”
“자네, 지금 날 이렇게 모함해도 되는 거야? 실수로 약이 바뀐 걸 가지고 말이야!”
한약을 민후에게 내밀며 소리쳤다.
“약이 어디서 바뀐 건지는 내가 한번 알아보겠네. 애초 한의원에서 바뀐 건지, 배달해온 기사가 착각해서 내게 잘못 전달해준 건지.”
“이미 사람들 입은 다 맞추어놓았겠지.”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뭘 어쩌겠나?”
그 약에 임신부에게 치명적인 약재가 있다 한들 약을 다른 사람이 가져갔으니 은조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약 먹고 애라도 떨어졌어? 어디 잘못됐어? 피해받은 게 있냐고!”
은조가 그 약을 먹지 않은 것을 알고 있던 윤 회장이 따지듯 물었다.
피해자가 없는데 민후도 뭘 어쩔 방도는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 약을 먹고 죽을 뻔했습니다.”
“뭐?”
“응급처치로 겨우 목숨을 살려냈고 수술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윤 회장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게 나 때문이라는 건가?”
피해자가 생겼다는 말에도 윤 회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열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독성 약재 때문입니다. 피해 입은 사람이 있으니 고발하겠습니다.”
민후가 고발서류가 들어 있는 봉투를 들어 보였다.
“고발? 허, 실수로 약이 바뀐 걸 가지고 무슨 고발이야?”
“수사하면 진실이 밝혀지겠죠. 일부러 그런 약을 지은 건지 아닌지.”
민후가 다른 봉투를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고발 건은 그거 말고도 또 있습니다.”
윤 회장이 봉투와 민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지난 3월 기업어음 부정발행 건 고발 접수하겠습니다.”
“뭐?”
윤 회장이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증거가 다 있으니 바로 압수수색에 들어갈 겁니다.”
윤 회장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압수수색을 하다 보면 분식회계 한 정황 등도 나올 거고 걸릴 게 한두 개는 더 나오겠죠.”
윤 회장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전 고발하러 검찰청으로 가겠습니다.”
냉정하게 말하고 민후가 뒤돌아서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민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윤 회장의 눈동자가 떨렸다.
‘아, 안 돼. 압수수색만은 피해야 해.’
압수수색을 당하면 탈탈 털릴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