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2022.03.26.
은조 집에서 나온 예지는 씩씩대며 주차장으로 걸었다. 쿵쾅거리는 발걸음에 분노와 짜증이 가득했다. 차 앞에서 고개를 홱 돌려 은조 집 쪽을 노려보았다.
“어디서 반말을 찍찍 해대?”
지난번 그 일 가지고 손아래이면서도 반말을 지껄이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어디 반말뿐이겠는가. 저를 쳐다보는 오만한 표정을 보니 살기가 차올랐다.
“아버님만 아니었으면 넌 내 손에 죽었어!”
강 회장이 화해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머리채를 잡았을 것이다. 예지는 주차장을 걸어가며 윤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동서가 한약을 다른 사람한테 줬대요.”
[다른 사람한테 줬다고요? 누구한테?]
“그건 말을 안 했어요. 어떡하죠? 그거 다른 사람이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태아를 잘못되게 할 수도 있는 약인데 분명 보통 사람에게도 안 좋을 것이 뻔했다. 윤 회장이 짜증 난 듯 한숨을 쉬었다.
[그건 나도 모르죠.]
“어떡해요?”
그 사람 혹시 잘못되면, 이라는 뒷말은 붙이지 못했다. 주변에서 누군가 들을까 조심해야 했다.
[뭘 어떡해요. 잘못되면 그 사람 팔자인 거지.]
윤 회장은 제 소관 아니라는 듯 말했다. 예지는 잠깐 걱정했던 생각을 고쳐먹었다. 생각해 보니 누군가 잘못되더라도 자신은 이 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이 약을 짓고 준 사람은 윤 회장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고. 자신이 윤 회장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나중에 이용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이제 어쩌죠? 약 잘 먹고 있는지 회장님이 한번 떠보세요. 다시 약을 보내든지요.”
[아니에요. 약은 안 보내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도 모르죠.]
“그럼 이제 뭘 해야 하죠?”
[이렇게 되면 그 보살 선생님이 말했던 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윤 회장 말에 예지의 눈이 커다래졌다.
[물가로 데려가라고 했다면서요.]
무당이 은조의 자식 운을 없애려면 물가로 데려가라고 했다.
“물가로 데려가서 뭘 어떻게 하죠?”
예지는 무당이 물가로 데려가라고는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아기를 잘못되게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은조가 물을 싫어해요.]
“…….”
[걔를 물가로 데려갈 방법을 찾아봐요.]
예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설마, 죽이라고?’
이런 생각까지는 해본 적이 없다. 먼저 출산하는 것을 막고자 했을 뿐이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는 건 예지도 두려웠다.
‘할머니가 되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친손녀가 아닌 거 아니야?’
예지는 은조와 윤 회장의 관계가 대체 왜 이런지 의아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언니야는 자식 운이 없어. 아니면 늦거나.’
무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예지가 자식 운이 없거나 늦게 온다고 했다. 만약 이번에 일이 잘 해결되어 아이를 잘못되게 하더라도 저쪽이 또 임신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자신이 난임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계속 불안한 상황이 될 것이다.
‘애초에 불안한 요소를 없앤다?’
예지는 은조가 없어지면 모든 것이 평화로워질 것 같았다. 이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야망에서 비롯된 예지의 집념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예지는 장남인 남편이 당연히 경영권을 승계받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당연히 제 것이 될 거라 믿었던 권력과 재산, 모든 것을 둘째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내 것을 빼앗기게 생겼는데 가만히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적극적으로 그것을 막았을 뿐이다. 그런데 제 뜻대로 안 되니 예지는 점점 광적으로 집착했다. 어릴 때부터 원하던 것은 뭐든 손에 쥐었던 예지는 기필코 자신이 회장 사모님이 되어야만 했다. 예지는 자신과 뜻이 같은 윤 회장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위험한 일이니 앞에는 윤 회장을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빠져야겠다.
“물가로 데려가면 회장님이 알아서 하실 건가요?”
[내가 왜? 이건 사돈 쪽 일이잖아요.]
예지의 의도를 간파한 윤 회장이 선을 그었다.
[사돈이 그 보살한테 상담한 내용이잖아요.]
예지가 입술 한쪽을 비틀며 픽 웃었다.
‘교활한 늙은이.’
“협력하시겠다면서요?”
[계획을 짜면 도와는 주겠다고 했지. 사고로 위장하려면 도움 없이는 힘든 법이니까.]
예지는 짧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일단 생각 좀 해보죠.”
전화를 끊은 예지의 표정이 비장했다. 뜻하지 않게 판이 커져 버렸다.
“오늘 네년이 나한테 반말을 찍찍 해대며 오만하게만 굴지 않았어도 내가 이런 생각까지는 안 했어.”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건 화해요청을 받아주지 않은 은조의 탓이라고 여겼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음산하게 중얼대며 예지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 2주 후. 퇴근하는 차 안에서 민후는 책을 보고 있었다. 손에 든 책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동화책이었다. 그의 옆자리에는 스무 권 정도의 동화책이 쌓여 있었다. 늘 태블릿으로 기사를 읽거나 서류를 보던 민후였다. 그 모습이 신기해 운전기사가 룸미러로 민후를 힐끔 쳐다보았다.
“동화책 관련 사업 아이템 구상 중이십니까?”
민후가 시선을 들어서 기사를 보았다.
“아, 이거요.”
민후가 웃으며 말했다.
“태교 차원에서 배 속 아가한테 읽어주려고요.”
민후는 임신한 아내를 위해 남편이 준비할 것에 관해 알아보다가 ‘태교 동화 읽어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 속 아기에게 부모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목적인데 아빠가 읽어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해서요.”
배 속 아기는 저음의 아빠 목소리를 더 잘 듣는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렜다. 기사가 따뜻한 얼굴로 동화책을 보는 민후를 보며 말했다.
“전무님이 아빠 되는 준비를 열심히 하셔서 의욉니다. 예전 일에만 빠져 사시던 전무님 생각하면 상상할 수도 없던 일입니다.”
민후가 룸미러로 기사를 보며 픽 웃었다.
“그렇습니까?”
“행복해 보이십니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서요. 노력해야죠.”
아기가 태어나면 함께 살 수 있을지 따로 살지 결정된 건 없었다. 혼자서 키우게 될지, 함께 보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 . . 민후가 태교로 읽어줄 거라며 동화책을 한 꾸러미 가지고 들어왔다. 은조가 무척 기뻐했다. 사실 은조도 임신·출산 관련 책을 보다가 아빠가 동화책을 읽어주면 좋다는 얘기를 보았다. 민후에게 부탁해보고 싶었지만 바쁘게 일하다 들어온 사람에게 숙제를 떠안기는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탁하려고 했었어요.”
“얼른 씻고 한번 읽어줘 볼까?”
“아직 12주밖에 안 되었는데 들을 수 있을까요?”
“연습 삼아 해보지 뭐.”
민후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동화책 하나를 들고 왔다. 소파에 편하게 기댄 은조 옆에 앉았다. 민후가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이제 아랫배가 약간 나왔다.
“여기쯤 있을까?”
민후의 표정이 들떠 있었다. 아기에게 뭔가 직접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로 설렜다. 아랫배에 손을 얹고 태명을 불렀다.
“리은아, 아빠야.”
태명은 은조가 리은이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리은이로 정했다.
“아빠가 리은이한테 책 읽어줄 거야. 잘 들어 봐.”
민후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무인도에서 있었던 일. 한 부부가 살았습니다.”
조용하게 낭독하는 저음이 듣기 좋았다. 은조가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띠고 민후를 바라보았다. 동굴 같은 저음을 들으며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올곧게 뻗은 콧대, 길게 내리깐 속눈썹, 적당히 두꺼운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봐도 봐도 잘생겼다. 이 정도 잘생긴 얼굴은 질릴 만도 한데 새로운 매력이 매일 퐁퐁 샘솟는 것 같았다. 짧은 동화라 어느새 다 읽은 민후가 시선을 들고 은조를 보았다.
“더 읽어줘?”
남편의 얼굴을 홀린 듯이 보던 은조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민후의 얼굴을 감싸고 쳐다보자 민후가 물었다.
“왜?”
“너무 잘생겨서요.”
민후가 픽 웃었다. 뭘 새삼스럽게 그러느냐는 얼굴로.
“우리 아기는 민후 씨 닮았으면 좋겠어요. 남자아이면 잘생겼을 거고, 여자아이라도 예쁠 것 같아요.”
“난 당신 닮은 딸이면 좋겠는데?”
은조가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더니 말했다.
“아들이면 어쩌려고. 아기 들어요.”
민후가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은조의 아랫배에 입을 맞추었다.
“리은아, 미안. 아빠는 리은이가 딸이어도 좋고, 아들이어도 좋아.”
“민후 씨 어렸을 때 어땠어요? 어렸을 때 사진 보고 싶어요.”
“어렸을 때 사진?”
“부모 어릴 때랑 아기 모습이 많이 닮는대요. 백일 때나 돌 사진 비교한 거 인터넷에 많은데 아빠랑 아들이랑 붕어빵처럼 닮은 경우가 많더라고요.”
“잠깐만.”
민후가 서재로 가더니 앨범을 가지고 나왔다. 아기 때부터 모아둔 사진첩이었다. 은조가 사진첩을 하나씩 넘기며 신기해했다. 그의 어릴 때 사진은 은조도 처음 보았다.
“어머. 너무 귀여워.”
그의 아기 모습을 보는 은조의 눈이 반짝거렸다. 돌상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아기 때부터 떡잎이 보였다. 아기인데도 잘생겼다.
“멜빵 바지 입은 거 너무 귀엽다.”
은조는 아기가 태어나면 이런 귀여운 모습이지 않을까 상상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맘때 모습을 과연 볼 수 있을까? 출산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그와 이별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 백일, 돌 때의 아기 모습을 자신이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사진첩을 넘기는 은조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이렇게 태어날 아기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의 돌잔치는 함께 준비할 수 없겠지? 아기가 어떤 돌잡이를 잡을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간을 함께 맞이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은조는 목이 메려는 것을 꾹 참고 사진첩을 넘겼다. 그의 초등학생 때와 중학생 때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훌륭하게 성장하는 과정을 직접 보는 것 같았다. 어느 한 사진에서 책장이 멈추었다. 갑자기 대학생쯤의 사진이 나왔는데 여자와 찍은 사진이었다. 여자가 남편의 팔짱을 끼었는데 꽤 다정해 보였다. 배경으로 보니 미국 유학 중에 찍은 사진 같았다. 은조는 그 사진을 들어서 보았다. 과거이기는 하지만 남편이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보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누구예요? 전여친?”
민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은조는 속으로 웃었다.
‘쳇, 저 표정에 다 드러나는 것 좀 봐.’
“아냐. 사귄 거 아니야.”
좀처럼 당황하지 않던 그가 당황한 티를 내며 말했다.
“숨길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잖아요.”
“첫사랑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