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당신이 제일 예쁜 꽃2022.03.15.
“장모님.”
뜬금없이 장모님이라는 말에 송화는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며 민후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잘못 들었거나 건물주가 말이 잘못 나왔을 거로 생각했다.
“제가 한은조 씨 남편입니다.”
“…….”
송화는 잠시 멍하게 민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송화가 그제야 놀라 입이 벌어졌다.
“……네?”
“재작년에 은조와 결혼한 강민후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장모님.”
민후는 송화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송화는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절을 드려야 하지만 장소가 여의치 않으니 이해해주십시오.”
흔들리는 눈동자로 민후를 보며 송화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은조와 결혼한 사람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정말 우리 은조와 결혼한 사람이라고요?”
“네, 제가 사위입니다. 이제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송화는 감격한 얼굴로 민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 은조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만나 결혼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하나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송화는 세상의 모든 신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할머니에게서 억압당하며 살아온 은조가 이렇게 결혼을 잘해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다행이었다. 얼마 전 통화에서도 요즘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던 은조의 말이 기억났다. 송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맙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우리 은조와 결혼했다니.”
“은조에게는 얘기하지 않고 이렇게 어머니를 만나는 겁니다. 할머니가 아시면 큰일 난다고 너무 걱정해서요.”
송화도 내심 불안했다. 윤 회장이 알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윤 회장은 은조와 자신의 연결 고리를 완전히 끊어내고자 하는 사람이라 은조의 남편까지 만났다고 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일이었다. 그 화살이 은조에게 갈 수도 있어 송화는 불안했다.
“은조 말이 맞아요. 할머니가 아시면 정말 큰일 나요.”
송화는 그동안 건물주로서 자신에게 준 혜택을 윤 회장이 알게 될까 걱정이었다.
“절 도와줬다는 걸 알게 되면 저는 물론이고 은조에게도 해코지할지도 몰라요.”
“은조는 제가 지킬 겁니다.”
민후가 단호한 투로 말했다. 민후는 윤 회장을 경계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은조나 장모님이 똑같아 더 마음이 아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윤 회장님이 은조 건드리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요. 약속드리겠습니다.”
불안해하는 송화에게 민후가 믿음을 주었다. 송화는 은조 곁에 이리 든든한 사람이 있어 감사하고 다행이라 여겼다.
“그래서 어머니께 도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민후는 처음 대화로 다시 돌아갔다.
“가게 정리하고 멀리 가시면 아내가 많이 서운할 것 같습니다.”
송화는 시선을 내리며 짧게 한숨 쉬었다. 민후에게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윤 회장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것보다 무슨 염치로 도움을 받겠나 하는 심정이었다. 딸 결혼할 때 자신이 도움 준 것이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모라고 사위 한번 챙겨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나이도 많아졌고 가게가 힘들어서요. 시골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어서 그래요.”
송화는 경제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가게를 내놓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이유라고 둘러댔다. 그래야 사위에게 도움받는 염치없는 장모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민후는 그런 송화의 의도를 간파하고 말없이 바라보았다.
“빚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도울 일이 좀 있을 것 같은데요.”
송화가 체념한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다 알아본 모양이었다. 건물주이니 건물 관리인에게 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또 도움을 받을 수는 없어요. 적은 돈 아니에요.”
“얼마인지 대충 압니다. 보이스피싱 당하셨다고, 급하게 돈 구하느라 불법 사채를 쓰셨고 원금보다 이자가 더 많아진 상황이고요.”
“예? 그걸 어떻게…….”
송화는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보이스피싱으로 돈을 날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알아보다가 경찰 쪽에 인맥이 있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송화는 창피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저도 제가 그렇게 당할 줄 몰랐어요. 뉴스에서 보이스피싱, 그런 거에 당하는 사람들은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이렇게 당할 줄은.”
송화는 자책하듯 고개를 떨구고 뒷목을 쓸면서 말했다.
“너무 감쪽같았어요. 은조 카톡으로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그러는데 의심할 생각이 하나도 안 들었어요.”
민후가 놀라 미간에 힘을 주었다.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것만 알았지 그 내용까지 잘 알지 못했다.
“은조 이름으로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는 겁니까?”
“은조가 연락을 자주 하지 않거든요. 몇 년 만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죠. 그래서 무슨 일이냐 묻지도 않고 보내줬어요.”
송화는 할머니가 무서워 연락도 잘하지 않던 은조가 뜬금없이 연락해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면 자신에게 연락했겠나, 걱정하며 돈을 보냈다. 은조가 아닐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엄마, 할머니가 도청하는 것 같아서 통화는 못 해.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빌려줄 수 있어?] 라고 왔기에 의심할 생각을 못 했었다. 민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은조를 걱정하는 마음에 어디에 쓸 건지 묻지도 않고 사채까지 써서 돈을 마련해준 사연이 안타까웠다.
“그러고는 얼마 후에 은조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그때 일은 잘 해결되었냐고 물었더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오히려 저한테 묻더라고요.”
송화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알았죠. 아, 내가 당했구나. 이게 말로만 듣던 스미싱이라는 거구나. 딸한테는 창피해서 스미싱 당했다는 말도 못 했어요.”
송화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제가 바보 같아서 당한 건데 어떻게든 제가 수습해야죠.”
민후는 마음이 아팠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인데도 딸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까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사채에까지 손을 대었던 장모님의 심정이 어땠을까.
“사연 들어보니 제가 더 도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송화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도움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힘들어서 이참에 가게 정리하려는 거예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송화는 만약 윤 회장이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웠다. 은조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를 일이다.
“진짜예요. 제가 이제는 쉬고 싶어서 가게 내놓는 거예요.”
“가게 정리하는 거 정말 장모님 뜻 맞습니까? 돈 때문에 접는 거 정말 아닙니까?”
민후는 송화의 말이 못 미더워 재차 물었다.
“네. 아니에요. 가게 그만두고 싶어요.”
송화는 그동안 민후에게 도움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 미안했다.
“그럼 지금까지 저한테 일부러 도움을 주신 거였어요? 저에 대해 다 아시고 월세도 일부러 깎아주신 거고요?”
민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 꽃 배달 서비스도 그래서?”
“네.”
“저한테 많은 도움 주셨던 거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사실 지금도 불안해요. 우리 가게에 이렇게 오시는 거 윤 회장님이 다 알고 계실 거예요. 알면 아마…….”
“예, 알고 있습니다.”
송화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장모님 존재에 대해 제가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일부러 이 건물 매입한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장모님은 모른 척하십시오. 제가 사위인 건 모르고 계시는 거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송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른 척할게요. 아무것도 모르는 거로. 그냥 새 건물주로만 알고 있을게요.”
“그렇게 하십시오.”
민후는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윤 회장이 장모님을 은조와 떨어트리고자 한다면 그의 뜻대로 장모님이 시골로 가도록 놔두는 것도 필요하겠다 판단했다. 윤 회장이 안심하도록. 그러다가 윤 회장 눈을 피해 장모님과 접촉하면 될 것 같았다. 그동안 경매로 넘어간 장모님 집은 민후가 입찰받아 다시 훗날 장모님께 드리면 될 것이다.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린 민후가 말했다.
“가게 정리하고 어디로 가실 건지 그것만 제게 넌지시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윤 회장님 모르게 아내와 찾아가겠습니다.”
송화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윤 회장님 모르게 진행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믿어주십시오. 아내에게도 장모님께도 피해 가지 않도록 방법을 연구해보겠습니다.”
민후는 장모님이 서울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면 오히려 아내와 장모님께는 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아내가 언젠가 계약이 끝나고 이혼하게 되면 윤 회장에게서 벗어나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윤 회장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 보내 달라고.
‘이혼하고 나서도 할머니에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저를 숨겨주든지, 어디 해외로 멀리 보내주든지 할머니에게 돌아가지 않게 도와줘요.’
아내와 장모님을 함께 보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장모님과 함께한다면 아내를 멀리 보내는 것도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관건은 어떻게 윤 회장 모르게 두 사람을 보내느냐 그것만 연구하면 된다. 찾지 못하도록 신분세탁을 하고 해외로 보내는 방법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런 방법은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은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진행해야 했다. 아내에게도 당분간은 비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윤 회장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계획이 물거품이 되니 극비리에 준비해야만 했다.
“어디로 가시는지 제게 꼭 알려주십시오. 약속해 주십시오.”
민후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 송화는 불안하긴 하지만 은조를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들었다. 왠지 민후가 나서면 잘 해결될 것 같았다. 민후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아내에게 줄 꽃다발 좀 만들어주십시오.”
송화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예전 민후가 아내에게 줄 꽃을 처음 사가던 그날이 생각났다.
‘따님에게 줄 꽃이라 생각하고 골라주십시오.’
송화가 그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래서 그때 그런 말을 했군요. 딸이 좋아하는 꽃으로 골라 달라고 했던.”
“네. 그날 은조가 매우 좋아했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좋아하는 꽃을 알고 사 왔느냐고 하더군요.”
민후와 송화는 마주 보고 웃었다. 송화는 은조가 좋아하는 꽃들로만 골라서 꽃다발을 만들었다. 민후가 꽃다발 들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아내가 무척 좋아하겠네요.”
. . . 역시나 은조는 꽃다발을 보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헉! 어머!”
평소보다 커다란 꽃다발에 자신이 좋아하는 꽃들이 가득했다. 화원이 통째로 제게 온 것만 같았다.
“어쩜, 예뻐라.”
은조는 양팔을 넓게 벌려야 할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얼굴을 묻어 향기를 맡았다.
“꽃향기가 너무 좋아요.”
은조가 민후를 향해 행복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민후 씨.”
꽃 속에 푹 파묻혀 해사하게 웃는 그녀가 너무 예뻐 보였다.
“꼭 꽃밭에 있는 것 같네.”
민후가 상체를 숙이고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이 꽃밭에서 제일 예쁜 꽃이야.”
닭살 돋는 말이었지만 은조는 기분이 좋아 웃었다. 원래 사랑은 유치한 거라고 했다. 이런 유치한 말에 가슴이 설레고 자꾸만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