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우리, 협력할까요?2022.03.12.
점집에서 나온 윤 회장은 예지와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예지에게 얘기 좀 하자며 따로 만났다. 예지는 은조의 할머니가 왜 따로 만나자고 할까 의아하면서도 불안했다. 은조의 출산을 막고자 했던 상담 내용을 혹시나 듣고 따져 물으려고 그러나 내심 두려웠다. 혹시 물어보면 절대로 아니라며 시치미를 떼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뭐라고 둘러대지? 하고 생각하는데 윤 회장이 입을 열었다.
“내가 따로 만나자고 한 이유는.”
예지가 긴장한 얼굴로 윤 회장을 쳐다보았다.
“나랑 생각이 좀 비슷한 걸 알게 되어서예요.”
“……네?”
생각지 못했던 말에 예지가 목을 쭉 빼고 되물었다.
“생각이 비슷하다고요?”
윤 회장이 얇은 입술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나도 은조한테 애 지우라고 말했었거든요.”
예지의 눈이 커다래졌다. 생각이 비슷하다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예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도 은조가 애 낳는 거 반대예요.”
“왜요?”
예지는 친정 할머니가 왜 아이 낳는 것을 반대하는지 의아해 물었다. 윤 회장은 아이가 있으면 이혼 후에도 민후와 인연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 힘들 거로 생각했다. 친권과 양육권을 다 넘긴다고 해도 한 달에 한 번 만날 면접교섭권이 있어 아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아이가 가교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민후와의 관계를 칼같이 잘라내는 것이 힘들 것이다. 서로를 좋아하고 있으니 그것은 불 보듯 뻔했다. 아예 그렇게 될 만한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 윤 회장은 예지에게 민후와 계약을 했고 곧 이혼할 거라느니 이런 사정을 따로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 전략적으로 계약 결혼했다는 사실이 강 회장 귀에 들어가서 좋을 건 없었다.
“그건 개인적인 이유라서 말하긴 좀 그렇고.”
윤 회장이 예지의 관심을 차단하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그쪽이랑 내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으니 우리, 협력할까요?”
예지의 눈이 반짝였다. 은조의 친정 할머니란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은 예지에게 나쁠 건 없었다. 오히려 일이 더 순조롭게 될 것이다. 예지의 입이 옆으로 찢어지며 활짝 웃었다.
“저야 너무 좋죠, 사돈어른!”
윤 회장이 예지와 눈을 맞추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오늘 야근 없지? 데리러 갈까? 저녁 외식 어때?]
오후에 민후에게서 문자가 왔다. 은조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문자를 보았다. 오늘은 퇴근하고 할머니 집에 가서 각서를 받기로 했다.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민후가 불안해하며 못 만나게 할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맞는 장면까지 목격했으니 분명 그럴 것이다. 아니면 본인도 함께 가겠다며 따라나설 것이 분명했다. 남편에게는 이혼과 엄마의 문제가 얽혀 있는 것이 비밀이기에 숨겨야만 했다. 대충 핑계를 대고 혼자 가야 했다.
[미안하지만 약속 있어요.]
[약속? 누구?]
[친구 시은이랑 저녁 먹기로 했어요.]
이럴 때 핑계가 되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어 다행이었다.
[나도 거기 끼면 안 되나? 대신 내가 더 맛있는 저녁 사줄게.]
약속 있다고 하면 웬만하면 물러설 민후가 자신도 끼워달라고 부탁했다.
[아, 친구가 좀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연애 상담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거짓말은 항상 다른 거짓말을 낳게 된다. 은조는 민후에게 거짓말까지 하며 따돌리는 것이 양심에 찔렸다. 하지만 그가 알면 안 되는 거라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아쉽지만 오늘은 친구한테 아내 양보해야겠네. 저녁 맛있게 먹어.]
민후는 순순히 물러나며 다정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끝나거든 데리러 갈 테니까 언제든 전화해. 오늘 기사로 마음껏 부려먹어.]
은조는 남편을 속이는 것이 미안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 . . 은조는 퇴근 후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은조는 할머니에게 이런 약속을 받아냈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엄마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행여 또 몰래 연락했다고 할머니가 엄마를 못살게 굴까 봐 두렵고 불안했다. 자신의 행동 대가를 항상 엄마가 치렀기 때문에. 할머니 집 앞에 도착한 은조는 저택을 올려다보며 심호흡했다. 오랜만에 온 할머니의 집. 높은 담벼락과 육중한 대문을 보니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다. 이 집에 들어올 때는 항상 이런 압박감을 느꼈다. 멋모르고 할머니 손을 잡고 이 집에 들어와 상상하지 못했던 생활을 했다. 할머니에게 모든 것을 통제당했고 감시받았다. 무엇을 하든 허락받아야 했고 할머니의 기준에 맞지 않는 품성을 보이면 훈육을 당했다. 하교해 집에 올 때마다 할머니가 들어오셨나? 오늘은 또 어떤 것으로 혼이 날까, 두려워하면서 이 육중한 문을 열었었다. 그 기억 때문에 아직도 이 대문을 보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집으로 들어가니 도우미 아주머니가 은조를 반겼다.
“어서 와.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은조가 할머니에게 혼이 나서 방에 감금되다시피 하면 몰래 먹을 것을 챙겨주었던 고마운 분이었다.
“아줌마, 안녕하셨어요?”
은조는 자신을 가엾게 여기며 잘해주던 도우미 아주머니의 고마움을 잊지 못했다.
“얼굴이 좋아 보여서 좋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좋아.”
도우미는 이 집에 있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 은조의 얼굴을 보며 진심으로 안도했다. 얼굴빛만 보아도 여기에 있을 때보다 마음이 편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들어왔으면 이리 와. 수다 그만 떨고.”
윤 회장이 입구에서 도우미 손을 잡고 한참 시간을 보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은조와 도우미는 웃다가 흠칫 놀라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은조가 거실로 와서 윤 회장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와서 앉아. 이거 받으러 왔지?”
윤 회장이 미리 써둔 각서를 테이블에 올렸다. 은조가 소파에 앉으며 각서를 들어서 보았다. 법적 이혼이 성립되면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쓰여 있었다. 단, 이 사실은 비밀로 한다는 내용과 함께 윤 회장의 이름과 서명이 있었다. 각서 따위가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말로만 약속받는 것보다는 믿음이 갔다.
“약속…… 반드시 지켜 주실 거죠?”
은조가 각서를 접어 봉투에 넣으며 한 번 더 확인했다.
“너나 잘 지켜. 계약에도 없던 임신이나 덜컥하는 애가 누구더러 약속을 지키라 말라 하는 거야!”
윤 회장이 못마땅한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강 전무한테는 절대 비밀로 하는 거 알지?”
“……네.”
“그리고 이거 가져가. 한약이다.”
윤 회장이 상자 하나를 테이블에 올렸다.
“한약이요?”
“임신부에게 좋은 약으로 지어달라고 부탁했으니 매일 하나씩 꾸준하게 먹도록 해.”
은조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한약 상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할미가 되어서 임신한 손녀 나 몰라라 하기도 그래서 약 좀 지었어. 이런 할머니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니? 말도 하나도 안 듣는 손녀 걱정되어서 약까지 지어주고.”
윤 회장은 자화자찬하며 으스댔다. 은조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윤 회장을 보았다. 할머니가 건강을 염려하며 이런 것을 챙겨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아도 건강해지고 임신부에게 좋은 것들로만 넣은 약이니 빼먹지 말고 매일 먹어.”
은조는 할머니의 이런 관심이 어색했다. 한 번도 은조의 건강을 생각해주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시지?’
엄마와 살게 해준다고 하는 것부터 약까지 챙겨주며 잘해주니 오히려 불안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가? 내가 속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일단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윤 회장이 고개 숙인 은조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윤 회장은 오늘 예지를 만나고 협력하기로 한 후 바로 아는 한약사에게 약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태아와 임신부 건강을 위한 약이 아니라 티 나지 않게 유산할 수 있는 약이었다. 아이를 잘못되게 할 목적으로 지은 한약이었다. . . . 은조는 집으로 돌아가 각서가 든 봉투를 화장대 서랍 속 깊숙이 넣어두었다. 민후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와 저녁 약속이라고 했더니 저녁을 먹고 들어올 건지 아직 귀가 전이었다. 민후에게 귀가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민후 씨, 저 집에 왔어요.]
[벌써? 친구랑 벌써 헤어진 거야?]
[네.]
[당신 약속 있다고 해서 못 봤던 볼일을 좀 보려고 나왔어. 일찍 끝내고 들어갈게.]
[볼일 있으면 천천히 볼일 보고 와요. 일찍 들어오라고 문자 보낸 거 아니에요.]
[당신 보고 싶어서 빨리 끝내고 들어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
*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핸드폰을 보는 민후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다 왔습니다. 전무님.”
기사의 말에 민후가 고개를 들었다. 민후가 볼일이라며 찾아온 곳은 송화의 꽃가게였다. 예전에 장모님에 관해 보고 받았던 것이 생각나 송화의 꽃가게에 찾아갔다. 부채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니 기존에 빚이 있었지만 최근 송화가 보이스피싱을 당한 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급하게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다고 했다. 이자는 엄청나게 불어났고 집까지 경매에 넘어가게 되었다고 했다. 민후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송화가 반가운 표정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민후가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네.”
대답하는 송화의 얼굴빛이 전보다 영 안 좋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얼굴이었다.
“가게를 내놓으셨던데요.”
송화는 건물주가 월세까지 깎아주며 도와주었는데 가게를 정리하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네. 많이 도와주셨는데. 제가 사정이 생겨서요. 너무 송구스럽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여쭈어도 됩니까? 제가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민후의 말에 송화가 민후를 쳐다보았다. 왜 이 사람이 자꾸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지 의아했다. 월세를 깎아준 것도 그렇고 회사에 납품하도록 도와준 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상하기는 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송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건물주님께서 왜…… 저를 자꾸 도와주시겠다고……. 물론 정말 감사한데, 궁금해서요.”
친인척도 아니고 지인도 아닌데 건물주가 자신을 도와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민후는 자신을 바라보는 송화를 보며 대답했다.
“어머니 같아서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민후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장모님의 존재가 민후에게는 남달랐다. 평범하게 장모님이라 부르며 지낼 수 없는 상황이라 더 애틋한 마음이 있을 것이다. 어머니 같아서 도와주고 싶다는 말이 송화는 언뜻 이해 가지 않았다. 민후가 가게를 가득 채운 꽃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 아내에게 줄 꽃을 매번 여기서 사 가는데 꽃집이 없어지면 너무 서운할 것 같기도 하고요.”
그저 단골집이 없어져 서운하다는 이유로 도와주고 싶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송화는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민후를 바라보았다. 민후가 진지한 얼굴로 송화에게 말했다.
“멀리 가시면 따님이 보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송화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네? 제게 딸이 있는 건 어떻게…….”
송화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민후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자신이 사위인 것을 알리는 것이 좋을지, 좀 더 숨겨야 할지. 자신이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정체를 밝히는 것이 유리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 민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장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