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좋아해도 될까요?2022.03.08.
은조는 조금 전까지 11년 만에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었다.
‘당신, 사랑해. 당신만 괜찮다면 결혼 계약서는 파기할 생각이야.’
그런데 남편이 고백과 함께 결혼 계약을 파기하고 결혼을 유지하고 싶다고 한다. 은조는 마음이 흔들렸다. 은조가 여태 꿈꿔왔던 것이 아닌가. 그와 가정을 이루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 남편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니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왜 이제야 이런 꿈같은 일이 펼쳐진 걸까? 민후를 바라보는 은조의 머릿속에 엄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혼하지 않으면 할머니가 엄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이토록 잔인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끔찍했다.
“민후 씨 마음이 정말 고맙고 감격스럽지만…… 저는…….”
은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혼하기를 원해요.”
“…….”
민후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민후는 요즘 아내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그녀도 자신과 같은 감정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착각이었나 보다. 실망감이 들었지만 민후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애썼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그때 임신을 오해받게 된 그 책임감으로 아기를 낳는 대신 윤 회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었다. 윤 회장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했었다 이혼하지 않은 채로 살면 윤 회장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해 그런 것일까? 그런 거라면 자신이 최대한 도와줄 자신이 있는데. 아니면 남편으로서, 이성으로서 자신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자신과 다른 감정인 것에 실망감이 들지만 아내의 생각도 중요했다.
“그래. 당신 의견 존중해.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녀는 결혼을 유지할 생각은 없다고 하니 민후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계약이 끝나면 윤 회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민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날 좋아해달라고 한 말은 아니니까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민후는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조금 머쓱하고 난감했다. 잡고 있던 은조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그러자 은조가 민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일어선 민후가 은조를 내려다보았다. 은조는 그의 손과 팔을 매달리다시피 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은조는 민후를 좋아하는 제 진심을 모르고 실망하고 오해하는 그가 너무 안타까웠다.
“민후 씨. 이런 얘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가 상처받고 이대로 그의 마음이 영영 떠날까 봐 두려웠다.
“계약 끝날 때까지는 우리 부부잖아요.”
은조는 떨리는 눈동자로 민후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만 제가 민후 씨를 좋아해도 될까요?”
“…….”
은조를 내려다보는 민후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은조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그를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다. 그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은조도 좋아하는 마음을 떳떳하게 드러내고 후회 없이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민후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약이 끝날 때까지만……그때까지는 당신이 제 남편이니까요. 그때까지만 당신 좋아할래요.”
시한부라도 온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은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민후가 천천히 침대에 앉았다. 커다란 손으로 은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왠지 절박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이런 그녀의 표정은 항상 민후를 헷갈리게 했다. 민후는 뭐든 좋았다. 그녀가 자신을 싫어해 밀어내지만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계약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아내가 자신을 좋아해 주면 그것만이라도 행복할 것 같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마음의 반의반만이라도 좋아해 준다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것이다. 설령 그것이 시한부라 할지라도. 예정된 이별이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허락해주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행복할 것 같았다.
“당신이 날 좋아해 주면 가슴이 진짜 떨릴 것 같아.”
민후가 다정하게 웃으며 은조를 껴안았다. 은조도 민후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은조는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나려고 했다.
‘사랑해요, 민후 씨, 사랑해요.’
속으로는 절절하게 그에게 고백했다. 애가 탄 은조의 팔이 민후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민후가 고개를 들고 은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서로의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민후가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은조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서로의 숨결이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입술을 떼어 내고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랑이 충만한 눈으로 서로를 간절히 바라듯 바라보았다. 또다시 입술이 겹쳤다. 눈을 감고 온전히 서로의 입술 감촉과 숨결에 집중했다. 잠시 떨어진 입술에서 더운 숨이 쏟아졌다. 민후가 은조의 뒷머리를 휘어 감아 깊숙이 입술을 물었다. 언젠가는 소중한 것을 잃을까 두렵고 애절한 호흡이 뜨겁게 섞였다. . . .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벗겨낸 옷가지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민후가 은조의 위에 올라타 몸을 겹쳤다. 서로에게 닿은 몸의 체온이 너무 좋았다. 가슴이 닿고, 배가 닿고, 다리가 닿아 서로를 바라보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꿈만 같다.”
민후가 낮게 말했다.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렇게 안고 있는 것이.”
어제만 해도 뜨거워지려는 마음을 애써 꾹꾹 눌러 참았었다. 이제는 거리낌 없이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아내도 시한부이긴 해도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했다.
“당신, 정말 나 좋아해 줄 거야?”
“네. 좋아해요.”
은조가 민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내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민후의 표정이 감격스럽게 변했다.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100% 진심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단 1%만 있다 해도 민후는 그것만으로 행복할 것 같았다. 지금은 서로가 좋아하는 사이라는 상황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녀가 왜 시한부로 좋아하겠다는 말을 하는 건지 뒤에 어떤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건지는 나중에 알아봐도 될 것이다.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자연스레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럼 이제 우리 서로 사랑하는 부부, 맞지?”
민후가 확인하고 싶었는지 물었다.
“네.”
“믿어지지 않아.”
은조가 웃으며 민후의 입술에 촉, 입을 맞추었다. 민후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걸로는 부족해. 아무래도 잠자리를 해봐야 믿을 것 같아.”
장난처럼 던진 말에 은조가 웃었다. 민후의 시선이 은조의 입술에 머물렀다가 다시 눈을 바라보았다.
“사랑해, 은조야.”
은조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의 고백은 몇 번을 들어도 가슴 뛰게 했다. 가슴이 맞닿아 있어 그가 자신의 심장 박동을 다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저도요. 저도 사랑해요.”
은조의 고백에 민후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민후의 입술이 내려앉아 은조 입술을 차례로 베어 물었다. 부부는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지금까지의 키스와는 또 달랐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라 애틋함이 입술 사이사이에 녹아내렸다. 애절한 마음을 담아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또 탐했다. 뜨거운 숨결이 안을 파고들어 서로의 입안을 훑었다. 그의 손이 허리를 파고들자 은조는 어느 때보다 긴장되고 떨렸다. 마치 첫 경험을 앞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런 걸까?
“……떨려요.”
“나도 그래.”
민후의 손이 잠옷을 들추었고 은조는 민후의 목에 팔을 둘렀다. * 다음날. 예지는 친정엄마와 함께 무당을 찾아갔다.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예지는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천장에는 화려한 색감의 탱화에 원색의 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친정엄마인 이엑스푸드 김 부회장은 단골손님인지 안내하는 사람이 잘 아는 체를 했다.
“부회장님. 차 드시면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앞 손님 금방 끝나고 나오실 거예요.”
대기석에서 기다리며 예지가 소곤소곤 물었다.
“엄마, 여기 되게 유명한가 봐?”
“그럼. 유명한 보살 집이야.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한테 예견과 조언을 잘해줘서 유명한 기업가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야.”
예지가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미닫이문을 열고 안에 있던 손님이 나왔다. 김 부회장과 예지는 곧 자신들의 차례라 벌떡 일어났다. 법당으로 들어가려는데 예지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방금 법당에서 나온 사람이 익숙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은조의 할머니인 윤 회장이었다.
“어머, 사돈어른?”
윤 회장은 예지를 바로 알아보았다. 얼마 전 뉴스에 갑질 동영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니 그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옆에 엄마인 이엑스푸드 김 부회장도 있었다. 갑질 모녀가 사이좋게 무당은 왜 찾아왔을까 싶었다. 속으로 비웃고 싶었지만 윤 회장은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네. 이런 데서 다 뵙네요.”
예지는 기업가들에게 입소문 난 무당집이라더니 과연 그렇구나 싶었다.
“그럼, 상담 잘하시고 가세요.”
이런 곳에서 만나 근황 따위를 물어보기도 그래서 윤 회장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고 몸을 돌렸다.
“네, 안녕히 가세요.”
생글 웃으며 인사한 예지가 몸을 돌리는 순간 표정이 싹 바뀌었다. 은조가 미우니 그 가족도 주는 거 없이 싫었다. 법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상담을 시작했다.
“왜, 뭐가 잘 안 풀려?”
“보살님. 우리 사위, 앞길 좀 탄탄대로로 열어주십사 찾아왔어요.”
“사위 생년월일 좀 넣어봐.”
무당은 펜으로 어지럽게 글씨를 휘갈기며 말했다.
“막혔어, 막혔어!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헉, 맞아요! 방해하는 것들이 있어요.”
예지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무당 앞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들을 줄줄이 얘기했다.
“동서가 저보다 먼저 애를 낳으면 안 되거든요. 방법이 없을까요?”
무당이 아기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언니야, 언니 사주는 애가 없어.”
“네?”
“자식 운이 없다고 나오는데? 아니면 늦을 수도 있고.”
예지가 절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애를 못 낳는다고요?”
그러면 지분은 영원히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
“언니가 자식 운이 없으니까, 다른 그 언니야도 자식 운을 늦춰야 하잖아? 그래야 언니야 남편이 길이 뚫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무당이 펜을 들고 한자로 불화(火)를 휘갈기며 말을 이었다.
“음양오행으로 보면 그 언니야가 사주에 화(火)가 많아. 화(火)는 물을 무서워해.”
예지는 초집중한 얼굴로 무당이 휘갈기는 글씨와 무당을 번갈아 보았다.
“일단 물가로 데려가.”
“물가요?”
“음. 집에서 좀 멀리 떨어져야 해.”
“그래서요?”
무당이 매섭게 눈을 뜨고 말했다.
“방법은 본인들이 생각해야지. 난 힌트만 주는 사람이야. 물가로 데려가면 일이 술술 잘 풀린다 이 말이야.”
예지는 엄마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복채가 든 돈 봉투를 책상에 올려두고 법당을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생각지 못하게 거기서 윤 회장을 또 만났다.
“어머, 사돈어른. 아직 안 가셨어요?”
아까 분명히 나가는 것 같았는데 마주쳐서 예지는 뜨끔했다. 방금 은조에 관련해 상담을 끝내고 나와서 그 할머니를 만나자 찔린 것이다.
“아까 법당에 지갑을 두고 나와서요. 그거 가지고 가려고 기다렸어요.”
윤 회장은 지갑을 두고 나오는 바람에 다시 점집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기다리다가 윤 회장은 우연히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윤 회장은 예지가 은조를 견제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밖에서 엿듣던 윤 회장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저년도 같은 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