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당신, 사랑해2022.03.05.
은조는 할머니와 통화를 끝내고 가슴을 꾹 누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엄마와 다시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침대 헤드에 기대 마음을 추스르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조는 그제야 민후가 옆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잠들기 전에 민후가 울던 자신을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었는데. 침실 문이 열리고 민후가 들어왔다. 그의 차림새를 보니 외출했다 온 모양새였다.
“안 잤어?”
깨서 앉아 있는 은조를 보고 민후가 물었다.
“네. 깼어요. 어디 갔다 왔어요?”
민후가 다정한 얼굴로 조용히 다가왔다. 은조가 앉은 침대맡에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은조를 바라보았다.
“당신한테 할 얘기가 있어.”
은조는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민후가 은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민후는 그녀에게 제 마음을 고백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그녀에게 하지 못했던 수많은 말들을 떠올렸다. 그동안 자신이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 중 어떤 것부터 말해야 할까? 시간을 거슬러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부터 호감을 느꼈던 것부터 시작할까? 아니면 공식 행사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처음 팔짱을 꼈을 때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았던 것부터 말할까? 아니면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던 향기에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던 걸 말할까? 언제부터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지 사실 민후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사심이 생기려는 것을 이성으로 꾹꾹 눌러왔던 기간이 꽤 된 것 같았다. 언제부터 그녀가 좋아졌을까? 그녀의 마음이 다치면 제 가슴이 찢어지고 다른 이성과 대화하는 모습만 봐도 질투심에 몸이 달아 미치겠는 걸 언제부터 느낀 걸까? 그녀의 손을 잡고 민후는 한참을 망설였다. 하얀 그녀의 손등을 엄지로 문지르며 시간이 꽤 흘렀다.
“무슨 얘기인데, 이렇게 뜸을 들여요?”
은조가 물었다. 민후는 시선을 내린 채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내 마음을 어떻게, 어떤 단어로 당신에게 전달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
민후의 말에 은조가 조금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진지하게 그의 마음을 전달한다고 하니 혹시?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동안 민후가 자신을 대했던 태도 같은 것들은 은조가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정하게 대해 주고 모든 것을 배려해주고. 특히 잠자리에서 그녀를 안을 때 은조는 민후도 혹시 제 마음과 같은 건 아닌지 기대하게 될 때가 많았다. 민후가 시선을 들어 은조와 눈을 맞추었다.
“언제부터인지 나도 알 수 없어. 언제부터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쿵. 은조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쿵쿵쿵. 심장박동이 점점 거세졌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가. 은조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종일 당신 생각만 나고 당신을 보면 가슴이 뛰었어. 하지만 늘 계약서가 발목을 잡았지. 당신은 날 좋아해서 결혼한 게 아니니까.”
민후가 은조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이제 당신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어. 한은조, 당신이 내 전부가 되었어.”
은조는 터질 것만 같은 가슴을 겨우 부여잡고 있었다.
“…….”
“당신, 사랑해.”
은조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사랑한다고요? 민후 씨, 당신이 정말 날 사랑하고 있었다고요?’
은조는 가슴이 벅차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민후가 지금까지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왜 몰랐을까. 나도 당신을 사랑하는데. 우린 서로 사랑했는데 왜 몰랐을까?’
“난 당신과 이혼하고 싶지 않아.”
순간 은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결혼 계약서 파기하고 당신과 평생 살고 싶은데 당신 생각이 어떤지 궁금해.”
몰래 짝사랑하고 있던 남편이 자신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을 했다. 벅차오른 가슴에 덜컥 제동이 걸렸다. 계약대로 이혼하지 않고 그와 함께 사는 것이 그간 은조의 바람이었다. 얼마나 간절히 그걸 바라고 바랐었는데. 하지만 은조는 그에게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혼하면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혼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가 이해해 줄까? 할머니와 그렇게 거래를 했다고 하면 그가 이해해 줄까? 은조는 지금, 이 상황이 지옥 같았다. 왜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일어났는데 왜 자신 있게 그에게 고백할 수 없을까. 나도 당신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다고.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은조는 이 거지 같은 상황이 기가 막혔다. 눈에 눈물이 맺혔다. 고인 눈물 때문에 민후의 모습이 흐릿해져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얘기는 우리끼리 비밀이니까 강 전무한테는 입도 뻥긋하지 마. 만약 강 전무가 알게 되면 네 엄마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모르니까 잘 생각해.’
조금 전 할머니의 협박이 떠올랐다. 민후는 은조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고 갑작스러운 고백에 그녀가 난감해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니 날 좋아해달라고 말하는 건 아니야. 강요할 생각은 없어.”
‘좋아해요.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은조는 속으로만 외칠 뿐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저는 민후 씨…….”
은조가 말끝을 흐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은조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은조가 꿈꾸던 민후와의 미래. 그의 아이를 낳고 사랑하는 그와 평생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를 버릴 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엄마와 함께 살아갈 미래도 은조에게는 너무 소중했다. 은조가 고인 눈물을 손을 닦아 내고 민후를 보았다. 간절한 그의 표정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고백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자신을 싫어한다고 오해할까 봐 미안했다. 그와 이혼할 생각을 하면서 좋아한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저는 민후 씨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겐 너무나 과분한 사람이에요.”
은조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민후 씨는 너무 좋지만……. 하지만…… 전 이혼……하기를 원해요.”
“…….”
민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혼을 원한다는 말이 나올 줄 몰랐다. 은조는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 당신은 놀랄 거예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얼마나 원했는지 알면…….’
민후는 은조의 말이 조금 이상했다. 민후 씨는 좋지만 이혼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혹시, 윤 회장 때문에 그래? 그게 두려워서 이혼하겠다는 거야?”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말하는 민후의 말에 은조는 뜨끔했다.
“당신만 괜찮다면 윤 회장과의 결혼 계약서는 파기할 생각이야.”
결혼 계약서를 파기한다는 말에 은조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윤 회장이 무서워서 이혼을 생각하는 거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파기하고 결혼 유지할 생각이야.”
은조는 결혼을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꿔 왔기에 그의 말대로 하고 싶었다. 나도 좋아하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계약서 따위는 파기하고 싶었다. 그와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면 엄마는? 우리 엄마는 어떡해? 만약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그가 도와줄 수 있을까? 같이 엄마를 지킬 수 있을까? 은조는 자신이 없었다. 그간 은조가 할머니의 말을 거역해서 엄마가 그 대가를 치렀던 일이 많았기에 겁이 났다. 할머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엄마를 해칠 사람이었다. 은조는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너무 잔인했다. * 예지는 그날 이후 친정집에 며칠 다녀오겠다고 갔다.
“어떻게 된 거야, 엄마! 걔 산부인과에 다녀간 적 없다며!”
의료기록을 조사했다는 엄마에게 따져 물으며 분풀이했다.
“분명 없었다니까!”
“그런데 임테기에서 두 줄이 나왔다고! 진짜 임신이더라니까.”
예지는 자신의 촉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빗나가서 분했다. 강 회장 앞에서 은조를 망신 주고 치명적인 배신감을 주려고 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오히려 자신이 강 회장에게 미운털이 더 박혀버렸다. 자신을 보는 강 회장의 눈빛에 경멸이 차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시아버지에게 공을 들였는데. 다시 만회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예지는 그날 일만 생각하면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절 이렇게 모욕주면서까지 형님이 틀리면 이제 형님을 손윗동서 대접 안 합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은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형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고 존댓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형님이랑 저 동갑이잖아요? 예지야 이름 부르면서 동등한 위치에서 대할 거예요. 그러니 형님도 전처럼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아랫사람 부리듯 하지 말아요.’
은조가 자신 앞에서 그렇게 당당한 기세로 말을 한 게 처음이다. 항상 조용하고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 사람이었다.
“흥! 내 앞에서 착한 척하더니 아주 본색을 드러내는구먼! 지금까지 벼르고 있었나 보지?”
예지는 손윗동서 대접 안 하겠다고 했던 은조가 미워서 미칠 것 같았다.
“아유! 저걸 어쩌지?”
Rrrrrr. 그때 예지의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기현이었다. 기현은 오늘 한주 그룹 창립기념일 행사에 갔다. 참석하지 말라는 강 회장의 지시를 어기고 몰래 간 것이다.
“여보. 왜? 아버님이 또 뭐라고 하셔?”
[아냐. 여보. 민후 자식이 오늘 기조연설을 한대.]
“응? 기조연설? 당신이 그게 아주 중요하다고 했었지?”
[그래. 차기 경영권 후계자 결정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기조연설은 그룹에서 중요한 인물이 맡기 때문에 이게 주주총회 때 영향을 미친단 말이야.]
“그럼 서방님이 차기 회장이 되는 게 거의 확정된 거야?”
[확정까지는 아니고 주주총회에서 결정되는데, 기조연설을 하면 아무래도 표가 몰릴 수 있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박쥐 같은 이사들이 대세 쪽에 표를 주게 되어 있다고.]
이렇게 되면 차기 회장이 물 건너가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예지는 광기 어린 모습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점점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자 분하고 억울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은조가 회장님 사모님이 되어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자신은 기껏해야 계열사 대표 사모님 자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부부 모임에 가게 되어도 남편의 직급에 따라 아내들도 서열이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분위기였다.
‘어머, 형님. 오랜만이네요. 참, 형님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지? 예지야. 오랜만이야.’
은조가 자신에게 반말하며 도도하게 구는 모습이 그려졌다. 계열사 대표 부인인 자신이 회장님 사모님에게는 아무래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안 돼. 절대 서방님이 회장이 되도록 두지 않을 거야!”
예지가 굳센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직 기회는 있어.”
지분을 많이 보유한 이사들을 자신 쪽으로 포섭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지가 엄마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엄마. 엄마 회사가 우리 한주 그룹 지분 얼마나 가지고 있다고 했지?”
“1.2% 정도?”
“엄마 지분 좀 더 확보해봐. 우리 기현 씨 회장님 좀 만들어 줘. 힘 좀 써 봐.”
“우리가 지분 확보를 더 한대도 그거 갖고는 안 돼. 너희 시아버지가 출산하면 둘째한테 지분 더 준다고 했다며? 그거면 게임 끝이야.”
김 부회장이 예지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확실한 방법은 출산을 어떻게든 막는 수밖에 없어.”
예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떻게?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엄마가 아는 용한 무당이 있어. 일단 그 선생님께 한번 찾아가 보자.”
예지는 엄마와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